경찰 트랙터 막은 남태령 집회현장 되다 "경찰 차빼, 尹 방빼"
'농부 딸'부터 '트랜스젠더 농업인'까지…밤새 자유발언, 참여자 늘어
"경찰 차벽 탓, 엄중 보도해달라"…비상행동 시민대회 예고
[미디어오늘 김예리 기자]
“누군가는 우리를 보며 가벼운 마음으로 나와도 되는거냐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럼 나는 여러분과 함께 묻겠습니다. 우리가 웃고 있다고 해서 춥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왔다고 해서 목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설레는 마음으로 왔다고 해서 간절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후원해) 보내주신 음식 덕분에 배는 고프지 않습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전봉준 투쟁단' 트랙터들이 전날 정오께부터 서울 서초구 남태령 인근에서 경찰에 막혀 대치한 지 24시간째, 경찰을 향해 “차 빼라”고 요구하는 시민들의 자유 발언이 끊이지 않고 있다. 22일 오전 날이 밝자 참가자들이 더욱 몰려들어 대오가 커지고 있다.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 대개혁 비상행동'은 낮 2시 이곳에서 시민대회를 예고했다.
22일 과천대로를 통해 서울로 진입하는 남태령 고개에선 아침 10시 기준 시민 약 3000명이 경찰 차벽 철수를 요구하는 집회에 대거 가세하는 등 24시간째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집회 참가자와 자유 발언자 절대 다수는 20~30대 여성이었다. '농부의 딸'부터 '중증 정신장애인', '성전환 운동선수' 등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존재를 부정 당하는 모든 이들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민주주의'를 외치는 발언이 밤새 줄이었다. 전농은 유튜브 채널 '전농TV'로 이를 생중계하고 있다.
농부의 딸이라고 소개한 한 27세 여성은 이날 아침 10시께 발언대에 올라 “농부의 딸인 저는 대학교 오기 전까진 '깡시골'에 살았다. 그 때문에 전봉준 투쟁단에 눈길이 많이 갔다”며 “트랙터로 이동한 게 무슨 죄인가? 제 할아버지는 차가 없어서 경운기로 이동하셨다. 바퀴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거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는 “저기 선 트랙터가 경찰차보다 비쌀 수 있다. 며칠 전 저희 아버지가 볏짐 옮긴다고 2억짜리 트랙터를 샀다”며 “경찰차가 물러날 때까지 여기 있겠다”고 했다.
트랜스젠더 운동선수 나화린 씨는 “저는 여성 농업인이기도 하다. 지금 여기 보이는 트랙터들, 다 1억 원이 넘는다. 타이어도 지우개(와 같아)라서 먼 길 주행을 안 한다”며 “그런데 어떤 심정으로 여기까지 끌고 왔겠나. 그런데도 이렇게 막는 경찰이야말로 불법”이라고 했다. 그는 “하늘은 우리 편이다. 점점 따뜻해지고 있다. 힘내 싸워서 앞으로 나아가자”고 말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중국인'이라 밝힌 20대 여성 발언자는 “어젯밤 실시간 뉴스를 보며 밤을 새다가 인천에서 출발하는 1호선 첫 차를 타고 달려나왔다”고 했다. 그는 “한자는 전혀 모르고, 16세에 중국이 신분증 갱신을 시험공부 때문에 건너뛰었다는 이유로 저(의 신분)를 말소시켰다”며 “1980년대에 천안문에서 국가를 향해 저항하던 제 외가 친가 친척들이 있었다. 지금 이 땅에 저는 매국노를 쫓아내고자 여기에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살며 존재를 부정당하는 모든 이가 당당하게 살아가는 민주주의를 바라며, 내란 동조자들은 당장 물러가라”고 했다.
또다른 발언자는 “이 추운날 이 자리를 지킨 농민분들, 이들과 함께 밤을 새워주신 시민분들게 감사하다”며 “밤새 발언을 들으며 한강 작가가 말했던 두 가지 질문이 마음에 와닿았다. '왜 세계는 그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왜 세계는 그토록 아름다운가'”라고 했다. 그는 “SNS에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언굴로 팔레스타인의 건물을 폭파하는 이스라엘군이 나온다. 제주 4·3과 5·18 민주화 운동에선 한국군이 민간인 대상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윤석열은 12.3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짓밟으려 계엄을 했고, 지금 경찰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 집회의 자유를 침해하며 길을 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고려대 세종캠퍼스 35대 부총학생회장이자 젠더퀴어라고 밝힌 허정재(26세)씨는 “윤석열 정부가 트랜스젠더 혐오에 앞서 나서던 작년 겨울, 성 소수자 혐오를 견디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나 여기 오지 못한 친구 연재에게 이 발언을 바친다”며 “연재야 보고 있니? 윤석열은 네 바람대로 탄핵될 거야”라고 했다. 그는 “오늘을 살아내고 내일로 가자”라는 '새소년'의 노래 <난춘> 가사를 소개하며 발언을 맺었다.
중증 정신장애를 가졌다고 밝힌 발언자는 “지난 7일 윤 대통령 퇴직 촉구 집회에 참여했다가 환청 때문에 병원에서 집회 참여를 금지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도 농민이다. (경찰이 전봉준 투쟁단 진입을 가로막았다는) 소식을 듣고, 약을 먹어도 잠이 안 오더라. 그 길로 나왔다”고 했다. 그는 “제가 (밤) 11시쯤 도착했는데, 지금은 깃발이 엄청 많아졌다.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또다른 발언자는 “지금까지 20시간을 거리에 나와 있다. 사실 이렇게 비장한 마음으로 오진 않았다”며 “나 빼고 K팝 콘서트 하는 거 참을 수 없다, 나를 빼고 쓰여지는 역사 한 페이지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며 “우리가 웃고 있다고 춥지 않겠나?”라고 물었다.
오전 10시엔 전농을 비롯,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 대개혁 비상행동'의 입장발표 기자회견이 이어졌다. 박원호 전농 회장은 “우리는 끝까지 윤석열을 체포하기 위해 한남동으로 갈 것”이라며 “지금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함께 투쟁해 주신 시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기자회견에선 '대치 상태'를 실시간 보도하는 언론을 향한 당부가 이어졌다.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의 공동의장을 맡는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대표는 “언론 여러분들은 이 사태가 전적으로 경찰의 차벽 탓임을 엄중하게 보도해 달라”고 했다. “어제 한남동 공관을 거쳐 광화문에 진입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내란 수괴의 앞잡이 경찰들이 버스로 길을 막았다. 신고한 경로대로 행진했으면 국민 불편도 최소화하고, 주권자인 국민들의 저항권 행사는 강력하고 활발하게 이뤄졌을 것”이라고 했다.
박 대표는 “계엄군의 장갑차와 전봉준 투쟁단의 트랙터는 상징적으로 대비된다”며 “우리가 경찰에 '차 빼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이, 한남동 공관으로 가 '방 빼라' 이렇게 얘기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했다.
김재연 진보당 상임대표는 “여기 계신 기자들께 설명을 드리고 싶다. 어젯밤 그 춥고 어수선한 심야 시간, 이곳은 정말 질서정연하고도 뜨거웠다”며 “이 아래 남태령역 여성 화장실에 가본 분은 봤을 거다. 여성용품부터 마스크, 가글, 간식까지 여자 화장실에 엄청나게 많은 물품들이 쌓였다. 마치 대한민국 역사상 정말 보기가 드문 현장이라는 분위기를 말씀 드리고 싶다”고 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현재까지 “경찰은 차 빼라” “윤석열은 방 빼라” “국힘당 해체하라” “내란동조자 불러가라” 등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발언 중간엔 시민들이 후원하는 감귤과 식사 등 음식과 핫팩, 담요 등의 후원물품을 배포한다는 공지가 이뤄지고 있다.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은 이날 낮 두시 남태령역 앞 시민대회를 연다. 민주노총도 22일 오전 10시50분께 전 조합원에 남태령역 앞 집결 지침을 내렸다. 전농과 집회 참가자들은 이정현의 '바꿔',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레 미제라블 '너는 듣고 있는가', '임을 위한 행진곡', '나갈 때가 됐는데' 등 가요와 민중가요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집회를 이어나가고 있다.
트위터(X)에서도 남태령 앞 집회 현장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낮 12시30분 현재 트위터(X)에선 검색어 '남태령역' '농민분들' '전농TV'(전농 유튜브 채널), 전농 후원계좌인 '농협 301-0017' 등이 실시간 트렌드 검색어 최상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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