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시, 단순 시력 저하 아닌 ‘눈 건강 시한폭탄’
소아·청소년은 하루 1시간 이상 햇빛 받고 실내조명 밝게 해야
(시사저널=노진섭 의학전문기자)
"근시로 인한 실명과 시력 장애를 예방하는 일은 안과 의사 모두의 숙제다. 이를 위해 근시 진행의 위험 인자를 밝혀야 한다. 싱가포르·일본·대만은 이미 근시 위험인자를 찾는 연구를 국가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다." 올해 초 열린 학술 심포지엄에서 박기호 한국근시학회장(서울대병원 안과 교수)은 근시를 예방이 필요한 질환으로 공식화하며 이같이 말했다. 한국근시학회는 지난해 기존 안과 의사 단체인 대한안과학회와 별도로 설립됐다. 그만큼 근시 문제가 심상치 않다.
근시는 가까운 사물은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먼 거리의 물체가 흐릿하게 보이는 현상이다. 안구 앞뒤 길이(안축장)가 정상보다 길어져 사물의 초점이 망막(신경세포의 얇은 막)에 맺히지 않는 것이다. 태어날 때 약 16mm인 안축장은 12세가 되면 성인 크기인 약 24mm에 도달한다. 근시 인구는 세계 인구의 약 30%다. 호주의 브라이언 홀든 시력연구소는 2050년 이 비율이 50%(약 50억 명)로 급증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중에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근시 증가 속도가 매우 빠르다. 과학저널 네이처는 2015년 근시가 동아시아에서 심각하게 번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과도한 학업·온라인게임이 근시 위험 높여
싱가포르·중국·대만·홍콩·일본·한국의 도시 인구 중 80~90%가 근시라는 것이다. 유럽과 미국은 25% 안팎이고, 아프리카는 약 10% 수준이다. 특히 한국의 상황은 최악이다. 근시는 소아·청소년기에 발병하는데, 중국 연구팀은 올해 영국 안과학회지에 세계 소아청소년(5~19세)의 근시 비율이 36%라고 보고했다. 1990년에 비해 3배 늘어난 수치다. 그중에서도 일본과 한국은 각각 85%와 73%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근시 비율을 보였다. 3위인 러시아(46%)와도 격차가 크고 영국·미국(15% 안팎)이나 파라과이·우간다(1% 안팎)보다도 훨씬 높은 수치다. 미국의사협회 안과학저널은 이 비율을 일본 95%, 한국 79%로 더 높게 본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에 근시 인구가 많은 가장 큰 이유는 인종적 요인이다. 근시 유병률은 미국과 유럽에서 약 20%, 아프리카에서 약 10%, 아시아에서는 약 60%로 보고됐다. 또 근시는 유전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부모 모두 근시일 때 자녀의 근시 위험도는 약 5배, 한 부모만 근시일 때도 약 2배 높다.
이와 같은 인종적·유전적 요인 외에도 환경적 요인을 무시할 수 없다. 가장 주목할 만한 환경적 요인은 도시화다. 아시아 지역은 20세기 이후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됐다. 시각 자극이 부족하면 근시 발생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도시인은 시골에 사는 사람보다 시각 자극을 받을 일이 적다. 시각 자극이란 바다·숲·평야 같은 자연에서 오는 빛 자극을 의미한다.
도시에 살면 실내 생활은 늘어나고 햇빛 노출이 줄어든다. 햇빛은 도파민(신경전달물질)의 활성을 촉진해 안구 길이 성장을 억제한다. 덴마크 연구에 따르면 안구 길이가 일조 시간이 짧은 겨울에 0.19mm 길어졌고, 일조 시간이 긴 여름에는 0.12mm 길어졌다. 따라서 근시가 발병하는 소아·청소년은 야외에서 햇빛을 충분히 받으며 활동하는 것이 근시 위험도를 낮추는 데 중요하다. 실제로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밖에서 활동한 학생의 근시 비율은 8%, 그렇지 않은 학생은 17%라는 대만 연구 결과가 있다. 호주 연구에서는 실내에서 신체활동을 많이 해도 근시 예방에는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햇빛 노출이 근시 억제에 필요한 것이다. 대한안과학회는 근시 예방을 위해 하루 최소 1시간 이상의 야외활동을 권장한다.
어두운 조명 환경 또한 근시를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안 모건 호주국립대 교수는 "근시를 예방하려면 성장기 아이들은 최소 1만 럭스 밝기의 조명에서 하루 3시간 이상 생활해야 한다"고 말했다. 1만 럭스는 햇빛이 쨍쨍한 여름 낮에 나무 그늘에 있거나 선글라스를 꼈을 때의 밝기다. 사무실이나 교실 등 실내의 인공조명은 보통 500럭스 이내다. 대신 잠을 잘 때는 어두워야 한다. 2세 이전에 방에 불을 켜고 잔 어린이의 55%가 2~16세에 근시가 됐다. 반면 불을 끄고 잔 어린이 중 근시가 된 사람은 10%에 그쳤다는 미국 연구 결과가 있다. 김성수 세브란스병원 안과 교수는 "실내에서 공부나 작업할 때 조명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 스마트 기기 사용과 온라인 게임도 국내 소아·청소년의 근시 비율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교육 기간이 길고 학업 성적이 우수할수록 근시 비율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과학저널 네이처에 게재됐다. 중국 학생은 일주일에 평균 14시간 동안 숙제를 하는 반면, 미국과 영국 학생들은 5~6시간으로 나타났다. 가까운 거리에 눈 초점을 오래 고정할수록 근시 위험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는 책을 읽을 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휴식 없이 30분 이상 책을 읽는 경우, 근시 발생 위험이 1.5배 증가하며, 30cm 이내의 근거리 독서는 그 위험을 2.5배까지 높인다. 미국안과학회는 20분간 근거리 독서를 한 뒤, 20초 동안 약 6m(20피트) 거리의 물체를 바라보는 '20-20-20 운동'을 권장한다.
근시는 진행성 만성 질환
근시는 단순히 안경으로 교정하면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 안과 의사도 과거에는 근시를 단순한 시력 저하로 여겼으나, 현재는 이를 질환으로 간주한다. 한번 발생한 근시는 꾸준히 악화되어 '진행성 만성 질환'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근시는 실명 위험을 증가시키는 여러 안과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 근시는 생애 전반에 걸쳐 심각한 안구 건강 문제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최대한 억제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백혜정 가천대길병원 안과 교수는 "근시는 단순히 안경으로 시력을 회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꾸준한 관리가 필요한 질환이다. 문제는 근시가 진행될수록 심각한 안과 질환 위험이 커진다는 점이다. 근시보다 고도 근시일 때 안과 질환 유발 확률이 더 높아진다"고 말했다.
근시는 안구의 굴절력을 디옵터 단위로 측정해 진단한다. 경도 근시(-3디옵터 이하), 중등도 근시(-3디옵터에서 -6디옵터), 고도 근시(-6디옵터 이상)로 구분된다. 만약 굴절력이 -10디옵터라면, 시야에서 10cm 이상 거리에 있는 글씨가 흐리게 보이거나 전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근시가 심할수록 녹내장·망막박리·황반변성 등 안과 질환 발생 위험이 증가한다. 이러한 질환들은 회복이 어려운 실명을 초래하는 3대 안과 질환이다. 실명은 반드시 앞이 캄캄한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시력이 상당히 나빠지더라도 볼 수 있는 거리의 표지판마저 식별할 수 없으면 실명과 다를 바 없다. 김성수 교수는 "안경·콘택트렌즈·수술로 먼 물체를 또렷이 보게 됐다고 근시가 치료된 것이 아니다. 근시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나빠질 수 있다. 안구 앞뒤 길이가 28mm를 넘어서거나 -6디옵터를 초과하면 눈은 심하게 망가지고 실명 위험까지 매우 커진다"고 설명했다.
녹내장은 안압(안구 압력)이 높아져 시신경이 손상되는 질환이다. 망막박리는 안구에서 망막이 떨어지는 질환이다. 안구는 젤리처럼 끈적하고 투명한 유리체로 채워져 있는데, 고도 근시로 유리체에 공간이 생기면 망막이 분리될 수 있다. 고도 근시 환자의 망막박리 위험은 정상인보다 8~10배 높다. 황반변성은 경도 근시 환자의 0.1~7%에서 발생하는데, 고도 근시에서는 13~65%까지 급증한다. 황반은 망막에서 시각세포가 밀집해 있는 부위로 시력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1디옵터만 줄여도 황반변성 위험이 40%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김성수 교수는 "고도 근시는 백내장 위험도 높인다. 백내장 수술이 연간 70만 건이나 되는데, 그만큼 근시가 많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근시 억제용 안경·렌즈·안약으로 진행 늦춰야
근시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지만 최대한 억제할 수는 있다. 발병 시기를 늦추거나 고도 근시로의 진행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근시를 억제하는 가장 적절한 시기는 소아청소년기다. 안구 길이가 길어지면서 빠르면 1년마다 1디옵터씩 근시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백혜정 교수는 "성인이 된 후에는 근시에 큰 변화가 없으므로 성인이 되기 전에 근시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근시 교정법은 오목렌즈(안경·콘택트렌즈)를 사용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근시를 교정할 뿐, 근시 진행을 막을 수는 없다. 최근 근시 억제용 안경 렌즈가 개발되고 있다. 렌즈 기업 한국호야렌즈는 삼성서울병원과 공동으로 근시 억제용 안경렌즈 임상시험에 착수했다. 또 렌즈 업체 쿠퍼비전은 근시 억제용 소프트렌즈를 출시했다. 임흥섭 쿠퍼비전코리아 소아근시사업부 상무는 "10년 이상의 임상 결과, 소프트렌즈의 근시 억제 효과는 59%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밤에만 착용하는 렌즈(드림 렌즈 또는 OK 렌즈)는 이미 안과에서 처방되고 있다. 자는 동안 렌즈를 착용하면 눈꺼풀의 압력을 받아 각막을 평평하게 누른다. 물리적으로 각막을 변형시켜 근시를 교정하고 억제하는 방식이다. 근시 진행을 약 40% 줄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기 강동경희대병원 안과 교수는 "해외 연구에서도 드림 렌즈를 시작하는 연령이 낮을수록 안구 성장을 더 많이 억제해 근시 진행을 늦추는 것으로 보고됐다. 그러나 너무 어린 연령에서는 렌즈 적응이 어려워 보통 초등학생 때 착용하는 경우가 많다. 시력 교정 지속 시간은 보통 하루 정도다. 드림 렌즈 착용을 중단하면 2~3일 이내에 원래 본인의 시력으로 돌아오므로 매일 밤 착용하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
근시 진행을 늦추는 안약(저농도 아트로핀)도 있다. 서울대병원 연구팀은 2021년 '0.05% 농도의 아트로핀 안약은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이라는 내용의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이처럼 심각한 안과 질환을 초래하는 근시가 증가함에 따라 근시에 대한 관심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백혜정 교수는 "아시아 특히 한국의 근시 증가는 매우 심각하다. 어릴 때 근시를 억제하는 치료를 해야 고도 근시나 심각한 안과 질환으로 발전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이를 국가 차원에서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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