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 강요하지 마라”…한국 채식요리 1인자의 ‘일침’[미담:味談]
“채소는 맛 없다는 편견 깨고 싶어”
“채식은 맛이 없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남정석 셰프는 답한다. “정말 맛있는 채식을 안 먹어 봐서 그래.”
남정석 셰프의 이름 앞에는 늘 ‘한국 채식 요리 1인자’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셰프로서 그의 정체성은 간결하고 뚜렷하다. ‘가장 맛있는 채식 요리를 만드는 셰프’ 남정석 셰프를 만나 맛있는 채식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에서 강릉까지 4시간. 강릉 시내와도 거리가 있는 한적한 주택가에 그의 레스토랑 그린볼이 있었다.
“아이고 멀리서 오셨네요.”
방송에서 봤던 화려한 패턴의 바지를 입은 남정석 셰프가 시골 청년같은 푸근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숨 돌릴 틈도 잠시, 그는 우리를 식당 근처 자신의 텃밭으로 데려갔다. “직접 키운 건강한 제철 채소만큼 맛있고, 건강한 재료가 없어요.” 남정석 셰프는 직접 키운 애플민트와 팬넬, 이탈리안 파슬리 등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 그에게 물었다. “셰프님, 채소가 맛있다고 하셨는데, 정말 채소가 맛있어요?”
내게 채식 요리는 ‘나물’이랑 동의어였다. 물컹하고 질기고 씁쓸하고 오래되면 쿰쿰했던, 고추장과 참기름으로 그 맛을 덮어야 목구멍으로 쓸어 담을 수 있던 존재였다.
“그건 정말 맛있는 채식 요리를 먹어보지 못해서 그런거라 생각해요. 흐물흐물하고 비릿한 가지나물 같이 맛이 없는 채소 요리를 어린 시절 접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편견이죠. 채소에 따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조리방법이 다 다른데, 일반 가정에서는 ‘나물’ 한 종류만 내놓잖아요. 당연히 맛이 없을 수밖에요. 맛있는 채식 요리를 먹어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걸요.”
그에게 가장 맛있는 채식 요리가 뭐냐고 물었다. 답은 수입산 명품 채소가 아니었다.
“지역에서 나는 제철 채소로 만든 요리가 최고에요. 재배한지 얼마 되지 않은, 제철 채소로 만든 요리의 풍미는 아무리 명품 수입산 채소라도 따라올 수 없어요. 채소가 컨테이너 안에서 바다를 건너 오는 동안 향과 풍미가 점차 사라질 수밖에 없거든요.”
가장 신선한 채소를 구하기 위해 그는 영업을 하는 날이면 새벽 5시에 문을 여는 지역 새벽시장에 가서 장을 본다고 한다. 텃밭에서 채소를 직접 키우는 것도 가장 맛있는 채식 요리를 만들기 위함이다.
이런 철학은 그의 음식에도 고스란히 담겼다. 그린볼의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인 ‘채소테린’에는 일반적으로 셰프들이 사용하는 ‘칙피(이집트콩)’ 대신 강원도 ‘백태’를 사용한다. ‘가지라자냐’에도 토종 품종인 ‘쇠뿔가지’를 사용한다.
여기에 더해 채소마다 어울리는 조리법을 찾는 것도 맛있는 채식을 만드는 중요 포인트다.
“가지를 나물로 무치는 건 사실 맛있는 조리법이 아니에요. 가지의 질감을 죽이지 않고 달큼한 맛과 향을 끌어올리려면 기름을 살짝 발라 굽는 방식의 조리법이 좋아요. 고온에서 튀기는 것도 방법이고요. 가지에 안 좋은 인식을 가진 이들도 그런 방법으로 만든 가지 요리를 먹으면 생각이 바뀌지 않을까요. 당근 같은 경우는 푹 익혀, 버터를 넣어 곱게 갈아 퓨레처럼 만들면 정말 맛있고요.”
채식 요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데에는 아픈 배경이 있었다. 셰프로서 탄탄대로를 걷던 그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위암이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위암 판정을 받았어요. 불규칙한 식사, 건강에 나쁜 재료로 만든 음식을 폭식하던 생활을 10년 정도 한 게 원인이었지요. 다행이 수술 후 완치됐지만, 이 계기로 건강한 음식에 관심을 갖게 됐답니다.”
그는 이후 시간이 날 때면 전국에 좋은 농산물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 때 대화하는 농부시장 ‘마르쉐’를 만났다. 마르쉐는 전국의 농부들과 소통하며 제철 채소를 구입할 수 있는 플리마켓이다.
“2018년에 마르쉐를 만난 건 행운이자 운명이었던 거 같아요. 전국에서 재배되는 좋은 농산물을 농부와 함께 이야기하면서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그 농산물을 손님들에게 꼭 맛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팜 투 테이블(Farm To Table)’ 같이 제가 직접 기른 농산물을 곧바로 식탁에 올려야겠다는 생각도 그 때 했고요.”
또, 그가 존경하는 세계적인 채식 요리사 영국의 요탐 오토렝기와 일본의 오기노 신야의 책을 탐독하며 채식 요리에 대한 공부에도 열중했다. 그의 요리에 오토렝기와 오기노 신야의 색깔이 스며들어 있는 것도 그런 영향 때문이다.
“오토렝기나 오기노 신야 셰프는 채식 요리를 할 때 무엇보다 재료 자체에 맛을 살리는 데 굉장히 포커스를 많이 두거든요. 심플함으로 맛을 극대화하는 조리법을 많이 사용하고요. 저 역시 그런 방향성을 가지고 요리를 하고 있어요. 채소와 오일, 소금, 후추 정도로 맛을 낼 수 있는 그런 요리를 지향하고 있지요.”
어쩌면 아픔이 있기 전부터 그는 채식 요리를 해야 할 운명이었을 지 모른다. 남정석 셰프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채식 요리를 입에 달고 살아왔다. 남정석 셰프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위한 간식으로 찹쌀부꾸미 같은 것을 만들어 주시곤 했다. 늦가을이면 달디 단 무를 밭에서 뽑아 먹기도 했다. 집 마당에는 오이와 토마토가 주렁주렁 열려 있어, 언제든 손만 뻗으면 싱싱하고 맛있는 야채를 먹을 수 있었다.
“제가 경북 영덕에서 태어났어요.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 아래에서 여러 채소를 먹으면서 커왔던 게, 채소를 좋아하게 된 근본적인 계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채소를 곁에 두고 살아왔던 만큼 채소를 어떻게 이해하고 다뤄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 같아요.”
한국에서 ‘채식주의’는 유별난 사람들의 취향으로 취급받는다. 또는 건강하지 못한 식습관으로 여겨지며, 부정적 인식 속에서 제대로 싹도 못 트고 있다.
그런 인식이 만들어진 데는 극단적 채식주의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들은 오로지 채식만이 옳다는 신념을 가지고, 시위라는 명목 아래 식당이나 마트 등에서 ‘난동’ 수준의 행패를 부리곤 했다. 조금의 육식도 허용하지 않는, 그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채식주의 개념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한국에서 ‘채식주의=채식만 먹는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퍼졌다.
사실 채식주의는 단계에 따라 육식을 허용한다. 계란이나 닭고기, 생선을 먹는 것도 채식의 한 단계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도 과거 달걀과 우유만 먹는 채식주의를 실천한 바 있다. 남정석 셰프는 가금류와 수산물을 먹는 ‘폴로페스코’ 단계의 채식주의를 지향한다.
채식주의를 실천하지만, 그는 채소만 먹는 비건을 지향하지 않는다. 채식주의를 강요하는 일부 채식주의자들의 폭력적 행위를 옹호하지도 않는다.
“저는 채소만 먹는 ‘비건’을 지향하지 않아요. 그걸 강요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극단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의 성향을 바꿀 수 없어요. 오히려 부작용만 커지게 될 뿐이에요. 저희 레스토랑 역시 채식 요리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한우 채끝 요리도 있고, 양지를 이용해 라구를 만들기도 하고요. 많은 사람에게 맛있는 채식 요리를 접하게 해주고 싶은 것이지, 모든 이를 채식주의자로 만들려는 게 아니거든요.”
남정석 셰프의 꿈은 사람들을 채식주의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채식은 맛이 없다’는 편견을 깨고, ‘채식도 맛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많은 이에게 맛있는 채식 요리 한 그릇을 만들어주고 싶은 게 그의 소망이다.
“하나, 셰프로서 제 꿈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채식도 맛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이에요. 그러기 위해 많은 이에게 정말 맛있는 채식 요리 한 그릇을 만들어 드리고 싶어요.”
추운 겨울 남정석 셰프의 텃밭에도 눈이 내렸다. 꽁꽁 언 흙 속에 씨앗들이 가만히 웅크리고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새싹이 자라고, 채소가 영글면 그는 채소를 수확해 손님들의 식탁에 올릴 것이다. 손님들이 음식에 행복을 느낄 때마다, 남정석 셰프의 꿈도 조금씩 영글어 간다.
◆ 돼지감자수프
재료 : 돼지감자, 양파, 그라나파다노, 채수, 포르치니 버섯 또는 표고버섯, 버터, 생크림
1. 냄비에 슬라이스한 양파와 돼지감자를 올리브유에 볶는다.
2. 채수와 버섯, 치즈, 생크림을 넣고 끓인다.
3. 소금 간을 하고 믹서에 곱게 갈아준다.
4. 허브향을 좋아하면 샐러리나 이탈리안파슬리를 같이 넣고 끓여준다.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정용진 “트럼프 만나 10~15분 대화”…韓 정재계 인사 중 처음
- “결국 월 4000원 내렸다” 쏟아지는 뭇매…200만 이탈 ‘사태’ 터지더니
- “헬스하다 ‘성병’?”…SNS 뜨겁게 달군 논란
- 한때는 17만원이었다…“4만원 역대급 추락” 궁지에 몰린 ‘국민 메신저’ 특단 조치
- 음주 운전 말리는 시민 매달고 ‘질주’…알고보니 군의관
- “재벌·연예인 몰리더니”…평균소득 선두 질주 ‘이곳’
- 구독자 166만 유튜버 히밥 “월수익 1억…누적 40억원”
- “순간 눈을 의심”…왕복 4차선 한복판에 ‘킥보드’ 덩그러니
- “아주 질렸다”…美언론 놀래킨 ‘오징어 게임’ 감독 발언
- ‘스우파’ 모니카, 결혼·임신 동시 발표… “기적 찾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