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생이 전복죽[손바닥문학상 우수상]

한겨레21 2024. 12. 21.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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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문학상]박준수
일러스트레이션

참석자들은 각기 다른 언어로 인사하며 회의실을 떠났다. 화면에 뜬 수많은 얼굴 중 몇몇은 손을 흔들다가 하나둘씩 자기 별로 되돌아가듯 팟- 하고 사라졌고, 순식간에 나윤과 주최 쪽의 까만 화면만 남아 각각 좌우에 클로즈업되듯 비쳤다. 나윤은 의자를 뒤로 젖히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화면에는 ‘녹음/녹화가 종료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떴다. 선생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번에는 다섯 개가 전부 맞나요? 행사를 주최한 기관의 안 대리의 목소리가 물었다. 네. 맞습니다. 나윤이 짧게 답했다. 이번에도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리포트도 잘 부탁드려요. 두 사람은 짧게 인사를 나눴고 나윤이 먼저 회의실에서 나왔다. 마이크 옆에 놓인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잔은 차가웠다. 의자에 앉아 쓰게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문을 바라봤다. 덕지덕지 붙어 있는 흡음보드를 떼버릴까, 나윤은 잠시 생각했지만 설치 비용이 떠올라 일단 그냥 두기로 했다. 우경으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언니, 일 끝나면 연락 줘.

“응. 지금 끝났어.” 거실로 나가 시계를 보니 열한 시 반이었다.

“그래? 빨리 끝났네?” 핸드폰 너머로 우경이 답했다.

“그러게. 별일 없어서 금방 끝났네. 무슨 일이야?”

“급하게 들어온 일정인데, 혹시 내일 오후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괜찮아? 간만에 동시야. 소공동 롯데호텔.”

“내일은 도아 학교에 가봐야 해.”

“아, 저번에 말했던 그 강연?”

“응.”

“어떻게 하려고? 생각해봤어?”

“학교에서는 있는 그대로 말해주면 된다고 하던데.”

“진짜 그럴 생각이야? 또 얼마나 솔직하게 하려고. 나도 내일 언니 강연 들으러 가고 싶다.”

“모르겠어. 아직도 고민이네.”

“잘하고 와. 내일 행사는 어쩔 수 없지, 뭐. 민훈 샘에게 물어봐야겠다. 아 참, 오늘은 어땠어? 고칠 거 많았어?”

“다섯 개밖에 없던데?” 나윤이 웃으며 말하자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는 더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내일 잘 다녀오고 또 연락할게. 쉬어.”

거실 창을 열자 늦은 밤의 싸늘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도아에게 잠시 전화를 걸까 하다가 룸메와 함께 있겠구나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나윤은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겨울옷들을 손끝으로 훑었다. 검은색과 짙은 남색 투피스 하나씩을 양손에 들고 저울질하다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이 옷을 마지막으로 입은 게 언제였더라.

*

통역사는 행사에서 중요한 존재이지만 주인공은 아니에요. 그림자 같은 존재죠. 결혼식에 하객으로 갈 때 보통 어떤 옷을 입죠? 네, 맞습니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정해져 있으니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며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 바로 통역사입니다.

나윤은 무대에 서서 자신이 입고 있는 어두운 남색의 투피스 정장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도아의 고등학교에서는 다양한 직군에 종사하는 학부모들을 초청해 달에 한 번씩 직업 탐구 강연을 열었다. 변호사, 의사, 회계사, 개발자 등으로 활약하는 누군가의 엄마 또는 아빠가 강당에서 차례로 마이크를 잡았다. 이번에는 나윤이 강연자로 초청받아 무대에 섰다. 아이들이 내 직업에 대해 궁금해할까. 이전 강연자 명단을 본 나윤은 지난밤 잠을 넉넉히 자지 못했다.

통역은 단순히 단어를 치환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문맥과 상황, 문화와 그 밖의 다양한 요소를 이해해서 다른 언어로 전달하는 거죠.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통역은 발화자가 열쇠 모양으로 빚어 던진 찰흙을 다시 빚는 게 아닐까 하는. 각 언어 사용자들에겐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을 반영한 열쇠 구멍이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해요. 받은 찰흙 열쇠의 홈을 깎고 파고 모양을 다듬어 그 구멍에 쏙 들어가게끔 만들어야 해요. 그러니까, 양쪽 언어 사용자의 특성과 문화와 상황, 맥락 등을 잘 알고 있어야 딱 맞는 홈을 새길 수 있겠죠?

나윤은 자기 일을 좋아했다. 자기 몸 안에서 이해하기 좋은 형태로 변형시켜 리시버를 귀에 꽂은 청중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일. 나윤은 통역할 때면 모이를 꼭꼭 씹어 새끼에게 먹이는 어미 새를 상상했다. 청중이 안심하고 편하게 소화할 수 있도록 정성스레 자신의 몸속에서 씹고 자르고 녹이며 언어를 변형시키는 일. 행사가 끝나면 겨드랑이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문제없이 행사가 끝나면 주최 쪽은 나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다음에도 통역사님이 맡아주시면 좋겠어요. 그것이 나윤을 살게 했다.

통역과 번역의 종류, 통역사의 역할 등에 대해 이야기를 마친 나윤은 리모컨을 눌러 발표자료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대형 스크린 위엔 ‘에이아이(AI) 시대, 통역사의 전망’이라는 주제가 큰 글씨로 나타났다. 직업 탐구 강연은 항상 AI 시대의 각 직업의 비전으로 마무리됐다. 학생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단연 직업의 미래 전망이었기에 학교 쪽에서 강연자들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나윤 역시 통번역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이와 관련된 특강을 듣곤 했다. 여러 분야의 교수들과 전문가들은 연단에 서서 침을 튀기며 저마다 이야기했다. 강당에서 나올 때면 품고 있던 고민과 걱정은 살짝 녹아 있었다.

나윤은 무대에서 강당 바닥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많은 눈동자를 마주쳤다. 그중엔 도아의 두 눈도 섞여 있었다. 이전에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그대로 들려줬다. 스크린엔 통번역 오역으로 곤란을 야기한 역사 속의 사례가 소환됐다. 오역으로 인해 국가 간의 오해가 불거졌던 일, 의료진이 내린 진단을 제대로 통역하지 못해 환자와 가족의 얼굴이 일그러졌던 순간, 한국의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번역으로 논란이 된 소설 번역 사례, 음식 이름이 잘못 번역돼 온라인상에서 웃음거리가 됐던 메뉴판 등이 소개됐다. 많은 이들이 반짝이는 눈을 하고 나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학생들 사이에서, 때론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이따금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보람을 주고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세요.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은 많이 남아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국제회의통역사 신나윤이었습니다. 나윤은 언젠가 자신이 들었던 멘트를 끝으로 박수갈채 속에서 무대에서 내려왔다.

아아, 신나윤 국제회의통역사님의 멋진 강연 잘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일단 시험을 잘 봐야겠죠? 시험을 잘 보려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죠? 자, 오늘은 1반부터 차례대로 석식 먹으러 가고, 19시까지 교실로 돌아와 야자 준비를 마쳐주세요.

학생 주임 선생님으로 보이는 한 남자의 말에 학생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금세 적막해진 텅 빈 강당 한편에 도아와 친구들이 남아 있었다. 나윤은 천천히 짐을 챙겨 도아 쪽으로 다가갔다. 얼굴이 발그레해진 도아 옆에서 친구들은 나윤에게 웃음과 함께 환호를 쏟아냈다. 나윤은 도아의 친구들을 돌아가며 안아주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도아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별일 없지? 그치. 똑같지 뭐. 도아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윤은 도아의 등 아래를 살며시 토닥여주고 이제 가보라는 눈짓을 했다. 도아와 친구들은 인사하고 작은 새들처럼 떠들썩하게 강당을 빠져나갔다.

“도아 어머니, 안녕하세요. 도아 담임입니다.” 강당 문 쪽을 응시하던 나윤 옆으로 키가 작은 단발머리의 여자가 살며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나윤은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여자에게 악수를 건넸다.

“그러게요. 통화만 몇 번 했었죠. 오늘 강연 정말 정말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참, 도아 학교생활과 기숙사 생활 잘하고 있나요, 선생님?”

“그럼요. 성적도 상위권이고 친구들 사이에 인기도 정말 많아요. 제 딸이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니까요.” 여자가 넉살 좋게 웃으며 나윤에게 말했다.

“그런데요, 도아가 정말 완강해요.” 여자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니께서 전화로 부탁하셔서 이야기를 좀 나눠봤는데요. 선택과목도 과학탐구는 쳐다보지도 않아요. 나중에라도 바꿀 수 있으니 이과 기초과목은 그래도 들어놓는 것이 어떻겠냐고 해도 제 말은 듣질 않네요. 요즘 상위권 학생 중에서 흔치 않은 케이스예요.” 여자가 푸념하듯 덧붙였다.

“그렇군요.” 나윤은 어렴풋한 미소와 함께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제가 이야기 잘해볼게요.”

도시로 돌아오는 나윤의 차는 두 번이나 나들목에서 제때 빠지지 못했고, 돌고 돌아 늦은 밤에야 집에 도착했다.

*

우경과의 약속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남짓. 나윤은 약속 시간보다 더 일찍 도착해 근처의 한 카페 구석에서 노트북을 열었다. 지난밤 통역했던, 정확히 말하자면 ‘에코’가 통역한 것을 모니터링했던 회의 내용의 정확도 평가 업무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에코는 약 삼 년 전에 출시된 국제회의 전용 동시통역 인공지능으로 빠른 속도로 시장을 장악했다. 규모가 큰 국제 콘퍼런스나 비밀 엄수가 중요한 국가 간 회의에서는 인간 통역사가 출동하는 것이 여전히 당연시됐지만, 일상적이고 가벼운 행사에서는 에코가 그들의 자리를 꿰찼다. 물론, 그는 완벽하지 않았다. 통역사들에게는 회의실에 함께 접속해 있다가 그가 오역할 때 끼어들어 정정해주는 업무에 대한 요청이 들어왔다. 오역 수정 한 번에 이만원씩 페이에 얹어주겠다는 제안과 함께. 처음에 나윤과 동료들은 이와 같은 형태의 요청이 들어올 때면 받지 않았다. 통번역센터 요율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 액수가 아쉽기도 했지만, 기계가, 프로그램이 제대로 된 통역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코웃음을 치는 이들도 있었다.

시장의 생각은 달랐다. 많은 기업체와 기관은 갓 태어난 똑똑한 아기 정령에 열광했다. 동시통역은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일이었기에 두 명의 통역사가 함께 부스에 들어가 교대로 통역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렇지만 인간과 달리 에코는 초인이었다. 지칠 줄을 몰랐다. 의뢰처 입장에서 에코는 두 명의 페이를 반 명 수준으로 삭감할 수 있는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에코의 동시통역 정확도가 85%에 육박한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동시성을 유지하면서 문장 구조가 아주 다른 두 언어를 넘나들어야 하는 동시통역의 특성상 매우 높은 수치였다. 어쩌면 인간 통역사보다도. 에코는 수요가 많은 영어에서 시작해 중국어, 일본어를 거쳐 특수어에 해당하는 러시아어와 아랍어 통역이 필요한 행사에도 등장했다. 고정 클라이언트로부터 통역 모니터링 업무 요청이 들어왔을 때 나윤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집어 든 것도 이날이었다. 나윤은 연기를 공중에 뿜으며 도아를, 우경을, 많은 사람을 떠올렸다. 연기는 좀처럼 환기되지 않았고 머릿속에 뭉게구름처럼 쌓여갔다. 무거워진 구름은 땅으로 내려와 안개처럼 시야를 가렸다. 다음날 나윤은 클라이언트에게 전화를 걸었고, 곧 일정이 잡혔다.

42%. 나윤이 첫 모니터링에서 에코에게 부여해준 정확도였다. 언론에서 보도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발표자의 말을 들으며 에코가 스크린 하단에 자막으로 써 내려가는 통역과 번역이 결합한 결과물을 보며 나윤은 생각했다. 이래도 되는 걸까. 나윤은 서른다섯 건의 오역을 지적해냈고 회의는 그럴 때마다 지연되어 예정된 시간보다 더 늦은 시간에 끝났다. 모니터링 페이는 낮았으나 오역 수정으로 들어오는 금액은 쏠쏠했다. 나윤은 꼼꼼하게 리포트를 작성했다.

00:07:17 농담 섞인 인사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함.

00:11:35 출발어 문장에 주어 ×. 도착어에 잘못된 주어를 집어넣음.

00:13:58 동해를 일본해로 옮김.

00:17:01 발화자는 여성. 동사에는 남성 어미.

00:19:44 너무 친근한 표현. 격식×

이후에도 나윤은 다른 클라이언트들로부터 통역 대신 비슷한 업무 요청을 받았고 가끔 화상 통역을 진행하던 작은 방에서 에코를 들여다보는 일을 계속했다. 통역 파트너로 오랜 시간을 함께한 우경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지만, 나윤이 의뢰처로부터 통역 업무가 아닌 모니터링 업무를 맡아 진행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많은 동료의 귀에 흘러들어 갔다. 누구는 그가 스스로 자신의 몸을 인공지능의 먹이로 바치고 있다고 비난했고, 또 다른 이는 그가 센터에 명시된 요율보다 적은 페이를 받고 일하고 있음을 문제 삼았다. 소수이긴 하지만 업계에서 자신을 직업의 자긍심을 무너뜨리고 시장 질서를 파괴하는 반역자로 여기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따금 깊숙한 곳에 있는 자신의 마음들을 꺼내와 다시 저울에 올려보기도 했지만, 결국엔 같은 쪽으로 기울었다. 나윤은 연말에 열리는 총동문회에 가지 않는 것을 택했다.

에코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자라는 속도가 눈에 보였다. 기반이 되는 언어 데이터베이스 외에 음성 인식 기술, 목소리 구분 기능, 발화자 인식 및 프로필 저장 기능, 음성 정제 기술, 감정 인식 기술, 상황 기반 번역 엔진, 멀티모달 번역 시스템, 지속 학습 시스템, 로봇 제어 시스템, 신경망 기반 문체 분석 기술, 지리 및 문화 기반 맞춤화 시스템 등 수많은 하이테크가 에코에 주렁주렁 달렸다. 출시된 지 1년 정도가 흘렀을 무렵 나윤이 평가한 에코 v1.28의 정확도는 55%를 넘었다. 그즈음에는 나윤 외에도 우경을 포함한 수많은 통역사가 에코를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에코의 성장은 가속되었다. 평이한 내용만 오가긴 했지만, 지난밤의 짧은 회의에서는 오역 다섯 건만을 기록했다. 이제 에코 v2.04는 자막을 띄우는 것을 넘어 발화자의 목소리로 도착어인 외국어를 발음할 수 있었고, 청중은 그의 통역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모니터링 리포트 항목에는 음성 전달력(발음과 억양이 정확하고 또렷했으며 전달이 명확했는가?) 항목과 비언어적 요소 반영(발화자의 감정, 어조, 뉘앙스가 잘 반영됐는가?) 항목이 추가됐다. 나윤은 에코의 성장에 자신의 리포트가 기여한 정도가 고작 눈곱만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가끔 눈곱의 무게에 짓눌려 답답해했다.

한 시간은 오역 다섯 건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하기에 차고 넘치는 시간이었다. 나윤은 짧은 리포트를 마지막으로 검토한 후 오른쪽 하단 정확도에 82%를 써넣었다. 이제 오역은 거의 하지 않을뿐더러 유창성, 반응성, 전달력, 표현력 등의 측면에서도 고득점을 받는 에코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윤은 대학원에서 동시통역 수업을 맡고 있었다. 매년 겨울이면 학생들은 졸업시험을 봤고, 나윤은 평가자로서 녹음된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점수를 매기는 일을 했다. 나윤은 송곳처럼 예리하게 출발어와 도착어 사이의 간극을 찾아내 파고들었고 미묘한 틈들은 죄다 칼같이 점수에 반영됐다. 학생들은 다른 과목에서보다 나윤이 맡은 과목에서 더 많이 떨어졌다. 에코라면 몇 점을 받았을까, 생각하던 찰나 코트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보내주신 리포트 잘 확인했습니다. 빠르게 처리해주셔서 감사드려요.” 핸드폰 너머로 안 대리가 말했다.

“아니에요. 방금 보냈는데 바로 확인하셨네요? 특이 사항은 없죠?” 나윤이 물었다.

“그럼요. 평소처럼 잘해주셨어요. 저기, 선생님. 다른 게 아니라… 저도 방금 전달받아서요.” 안 대리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다음부터 에코 모니터링 오역 수정 개당 만원에 진행하라고 하시는데… 괜찮으실까요?” 안 대리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 그런가요?”

“네… 위에서 갑자기 내려온 지침이라서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네.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고생이 많으세요.” 숨을 한 차례 깊게 들이쉰 후 나윤이 말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또 연락드릴게요.”

둘의 대화는 짧게 끝났다. 다른 선택지는 사실상 없었으므로 대화라기보단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웠다. 어차피 고칠 것도 많지 않았는데. 만원이나 이만원이나. 나윤은 코트와 파우치를 챙겨 카페에서 나와 왼쪽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파우치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려던 순간 도아 또래 정도로 보이는 학생들이 골목으로 몰려 들어왔다. 나윤은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양팔을 아래로 떨어뜨렸고 등을 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니까, 우리 사촌 형도 지금 4학년인데 문과 선택한 거 존나 후회하던데. 진짜? 나도 지금부터라도 과탐 들어야 하나. 요즘은 문과 직종도 다 AI랑 데이터 필요하대. 이제 와서 공부하려니까 개힘들대. 하, 진짜 하고픈 게 뭔지 모르겠다. 다들 일단 이과 지원하는 게 ㄷ ㅏ ㅂ….

그들의 목소리가 나윤에게서 멀어져갔다. 나윤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들을 뒤쫓아가서 묻고 싶었다. 그렇지? 맞지, 얘들아? 그 나이 때는 하고 싶은 게 없는 게 당연한 거잖아? 하고 싶은 게 없으면 일단, 일단은 나중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하는 게 좋은 거잖아? 나윤은 멀어져가는 그들의 어깨를 붙잡고 도아에게는 하지 못했던 말을 모조리 쏟아내고 싶었다. 도아의 친구들은 그녀에게 무엇을 말할까. 도아는 그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까.

나윤은 일하면서 비행기를 타고 지구 이곳저곳을 누볐다. 비록 공항, 호텔, 행사장 정도로 축약할 수 있는 루트였지만 한국 땅을 밟지 않았던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다. 한국에 있더라도 집에 없는 날이 많았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캐리어를 끌고 기차를 탔다. 집에 있더라도 거실이 아닌 닫힌 방 안에 있던 시간이 길었다. 그녀는 방 안에서 문서를 뒤적였고, 입으로는 무언가를 쉴 새 없이 중얼거리며 노트북에 끊임없이 글자를 적어 넣었다. 그러면서도 혼자 도아를 키웠다. 어쩌면, 도아가 혼자 컸다는 말이 더 어울릴 수도 있겠다고 나윤은 생각했다. 나윤과 도아의 관계는 모녀 관계라기보단 부자 관계에 더 가까웠다. 딸이 전원 기숙사 체제로 운영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짧은 대화를 나눌 기회마저 사라졌다. 딸과의 기억을 되살려보면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도아와 함께했던 순간을 떠올리려 애썼다. 어린 도아는 팝콘을 좋아했다. 겨우 팝콘이었다. 팝콘을 입에 넣으며 열중한 옆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도아의 모습이었다. 두 좌석 사이에 꽂힌 종이컵을 집으면 짭짤한 팝콘 기름이 손에 묻곤 했다. 입술 끝이 뜨거워질 때까지 담배를 끝까지 피우고 나서야 나윤은 골목을 빠져나왔다. 자리에 돌아가니 우경이 옆자리에 앉아 목도리를 풀고 있었다.

“으, 담배 냄새. 언제 끊을 거야?”

“걱정 마. 통역하는 날엔 안 피워.”

“메일 확인했어?”

“무슨 메일?”

우경은 가방에서 노트북을 열어 보여줬다. 나윤에게도 같은 메일이 와 있었다. 다음주에 있을 콘퍼런스 식순과 발표자료가 도착했다. 발표자는 총 여덟, 도착한 자료는 아직 셋뿐이었다. 우경은 도착한 피피티(PPT) 파일 중 하나를 열었다. 87페이지였다. 이야, 쉽지 않겠는데? 한두 번이야? 둘은 가위바위보를 했고, 나윤에게는 홀수 번째 발표자가, 우경에게는 짝수 번째 발표자가 배정됐다. 사회자 시나리오는? 부스 안에서 아이컨택 하면서 그때그때 하자. 콜! 우경의 주도하에 파트 배정은 순식간에 끝났다. 시원시원한 우경은 나윤에게 언제나 든든한 존재였다. 그녀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지만, 그 선택이 어긋나는 일은 드물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머릿속에서 최선의 단어를, 문장을 골라냈다. 우경은 매 학기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고, 어렵다는 졸업 시험을 한 번에 통과했다. 동료들은 통역하는 그녀를 보고 작두를 탄다며 혀를 내둘렀다.

나윤과 우경은 크고 작은 행사를 오랫동안 함께 해왔고 서로에게 딱 맞는 파트너였다. 사회에 던져져 돈을 받고 일하기 전부터 둘의 손발은 척척 맞았다. 과제를 끝낸 뒤 먹고 싶은 안주가 같았고, 번역할 때 듣는 음악도 비슷했다. 누군가가 개떡같이 말해도 다른 한 사람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통역부스에서 둘의 조합은 빛을 발했다. 커다란 두 눈덩이가 합쳐져 눈사람이 되듯, 작고 어두운 네모 박스 안에서 두 사람은 완성됐다. 한 명이 마이크에 대고 말할 때면 다른 한 명은 놓친 것이 없는지 확인했고, 적절한 것을 바로 떠올리지 못할 때는 신호나 메모를 통해 알려주곤 했다.

둘은 자주 가던 근처 오뎅바로 자리를 옮겼다. 중앙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어묵이 꽂힌 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소주를 시켰다. 벌써 겨울이네. 원래 제일 바빠야 할 시즌인데. 나윤은 소주를 따르며 말하는 우경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두 잔이 공중에서 탁- 하고 부딪혔다. 그러게. 잔을 내려놓으며 나윤이 말했다. 우리 다음주 통역 끝나면 제주도나 갔다 올까? 우경이 제안했고, 나윤은 그런 우경의 제안이 낯설었다. 보통 1월 중순부터 봄이 시작되기까지는 행사가 많지 않아 통역사들은 그 시기를 겨울방학이라 불렀다. 그렇지만 다음주는 아직 12월 말이었다. 갑자기 일정이 급하게 잡히는 경우도 허다했기에 여행과 같은 계획을 논하기엔 이른 시기였다. 우경은 두 잔을 다시 채워 나윤 앞에 내밀었다. 나윤은 잔을 단숨에 목구멍에 털어 넣고 핸드폰 속 캘린더를 확인했다. 딱히 잡힌 업무 일정은 없었고 잡힐 것 같지도 않았지만, 다음주면 도아가 집으로 돌아오기로 돼 있었다. 나윤의 생각을 읽었는지 우경이 먼저 말을 꺼냈다. 도아 방학 시작했으면 셋이 갈까? 나윤은 물어볼게, 라고 답했고 비워진 두 잔을 다시 채웠다.

*

행사장이 위치한 호텔 앞, 구름 낀 하늘 아래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 몇몇은 검은 외투를 걸쳐 단단히 무장한 모습이었다. 피켓을 손에 든 그들은 결연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윤은 손목에 찬 시계를 흘긋 보고는 주먹을 높이 치켜들며 한목소리를 내는 그들 앞을 지나쳐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부스에 도착한 나윤은 짐을 한쪽에 내려놓고 노트북과 인쇄된 자료들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익숙한 장비들과 마이크가 설치돼 있었다. 의자에 앉아 창을 통해 넓은 콘퍼런스 홀을 바라봤다. 무대 위로 행사명이 적힌 펼침막이 보인다. MedAI 2030: Surgery and Beyond. 행사 시작까지는 한 시간도 더 남아 있었기에 홀은 아직 한적하다. 발소리가 들려온다. 사람 몇몇이 홀 안으로 들어와 분주하게 움직이며 고요를 깬다. 나윤의 심장도 덩달아 쿵쾅대기 시작했다. 십 년을 넘게 해도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구나, 나윤은 생각했다. 이 일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긴장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나윤이 이 일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나윤은 입을 풀기 위해 뽑아온 자료를 소리 내 발음하기 시작했다. 도통 익숙지 않은 용어들을 입에 붙이기 위해 지난밤 수도 없이 읽어본 단어들, 문장들. 곧이어 우경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장비 테스트 시작하자.

둘은 통역장비 담당자, 음향 담당자와 함께 무대 위 음향이 부스로 잘 들어오는지, 마이크로 나가는 소리가 리시버로 잘 전달되는지, 다른 언어 부스와 오디오가 겹치지 않는지, 볼륨은 적당한지 등을 확인했다. 얼굴이 익숙한 다른 언어 통역사들과도 짧게 인사를 나눴다. 여러 국가의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큰 행사였기에 통역부스는 네 개가 설치됐다. 장비 담당자는 그들 앞에 놓인 인터프리터 장비에 얇은 포스트잇으로 언어명을 적어 각 채널 아래에 붙여준 뒤 다시 홀 안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두 통역사는 맡은 파트를 다시 체크했고, 번역해 온 키워드와 발표자 정보 등을 재차 확인했다. 당일 아침까지 메일함을 확인했지만, 추가로 확보된 발표자료는 셋에 불과했다. 나머지 둘의 발표는 주제만 공개된 상황이었고, 덕분에 나윤과 우경은 주제와 관련된 논문과 기사를 긁어모아 밤새 정독하며 두 언어로 공부해야 했다. 자료가 확보되지 않은 두 발표자는 전부 홀수 번째로 발표하기로 돼 있었으므로, 나윤과 우경은 사전 조율을 통해 하나씩 맡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부스에 나란히 앉은 둘은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이윽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홀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채웠고, 보건복지부 장관의 개회사와 인공지능미래기술부 차관의 축사를 시작으로 행사가 시작됐다.

부스 안은 금세 후덥지근해졌다. 두 마이크엔 이십 분마다 번갈아가며 빨간 불이 들어왔다. 나윤과 우경은 자신의 몸에서 귀와 입을 제외한 모든 것을 지워버린 것처럼 몸의 신경을 두 기관에 집중했다. 그들의 몸속에서 한국어는 외국어로, 외국어는 한국어로 변환됐다. 연사의 말이 느려도, 빨라도 둘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유지됐다. 교대할 때 두 사람은 눈빛을 교환했고, 한 목소리는 톤과 속도를 유지한 채로 깔끔하게 다른 목소리로 대체됐다.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통역하는 파트너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익숙지 않은 의료 용어가 등장하면 재빨리 메모장에 큰 글씨 크기로 용어를 번역해 써놓고 스크린을 옆으로 돌려 파트너가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두 사람이 번갈아 내뱉는 숨으로 산소 농도가 위험 수치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네 개의 발표로 구성된 첫 세션이 끝났다. 휴식시간을 알리는 아나운서의 멘트 통역이 끝나자마자 둘은 마이크를 끄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후- 하- 둘은 크게 심호흡했다. 20분은 짧았다. 둘은 화장실에 다녀온 뒤 다시 마이크 앞에 가 앉았다.

두 번째 세션 역시 순조롭게 흘러갔다. 나윤이 ‘인공지능과 외과 로봇의 도입: 미래의 무인 수술실’에 관한 발표 통역을 마치고 우경이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다음 발표자는 ‘AI 기반 성형수술 로봇의 정밀 조작’에 대한 발표를 시작했다. 사전에 발표자료를 전달하지 않았던 발표자 중 하나였던 그는 나윤과 우경이 통역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이었다. 외국어로 된 발표를 듣고 우경이 한국어를 옆 부스들에 전달하면, 다른 통역사들이 다시 그 한국어를 그들이 맡은 외국어로 통역하는 릴레이 통역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때였다. 발표자가 쌍꺼풀 수술을 예로 들며 로봇의 움직임을 설명하고 있을 때, 홀 안의 누군가가 손을 들며 주최 쪽을 찾았고, 장내는 순간 일렁였다. 무대 위 발표자도 잠시 마이크를 내려놓았고, 헤드폰으로 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제야 우경도 말을 멈추고 창 너머를 바라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나윤 역시 어리둥절했다. 두 사람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장내 아나운서가 침착한 목소리로 기술적 문제가 생긴 것 같다며 홀 안의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첫 번째 세션 발표자 중 한 명이었던 장 교수가 주최 쪽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며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어라 말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장 교수에게 몇 차례 허리를 굽히더니 나윤과 우경의 부스로 뛰어와 말했다.

“통역사님, 죄송합니다. 피부절개와 피부절제가 혼용되어 통역되고 있다고 합니다. 용어 구분을 명확히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요. 부탁 좀 드릴게요.”

우경의 실수였다. 절개와 절제는 명확히 다른 용어였다. 쌍꺼풀 수술에 절개법과 절제법이 따로 존재하는 만큼 둘을 구분해서 통역하는 것이 옳았다. 외과 수술 전문가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그 차이는 더 크게 부각됐다. 우경의 한국어를 듣고 통역해야 했던 옆 부스들 역시 혼용되는 두 단어에 갸우뚱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우경은 마이크를 통해 모두에게 자신의 실수에 대해 사과의 말을 전했고 발표는 이내 재개됐다. 나윤은 붉어진 우경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신중하고 침착하게 통역을 이어갔고 나윤 역시 발표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다. 더 이상의 실수는 없었고 행사는 별다른 문제 없이 마무리됐다. 정식으로 컴플레인을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

세 사람이 탄 차는 제주의 겨울 바다를 따라 달렸다. 열린 창문으로 묵직한 짠 공기가 들어왔다. 해안가에는 까만 슈트를 입은 사람들이 서핑보드를 들고 파도를 타고 있었다. 그들이 물에 빠질 때마다 나윤은 자신이 빠진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조수석에 앉은 우경이 오백 미터 앞에서 좌회전이라고 말했다. 차는 낮은 민가가 펼쳐진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우경이 예약해뒀다는 숙소는 아담한 1.5룸이었다. 외관은 오래된 일층 건물이었지만 인테리어는 최근에 다시 한 듯 깔끔했다. 거실 겸 주방에 방 하나가 딸린 숙소에는 꼭 필요한 것들만 갖춰져 있었다. 도아는 배낭을 방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채 밖으로 나갔다.

“여기 어때? 편하게 쉬다 가. 내 첫 손님이야.” 우경이 거실의 커튼을 걷으며 말했다. 창밖으로 납작하게 뻗은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백사장 위로 도아가 조그맣게 보였다.

“무슨 말이야?” 나윤이 물었다. 우경은 여기에 당분간 머물 예정이라고 했다.

“일단 일 년 계약했어. 살아보고 좋으면 연장하고, 아니면 다른 곳 찾아봐야지. 봄부터는 요 앞 서핑숍에서 주말에 일도 하기로 했어. 서핑도 배울 겸.” 나윤은 그제야 우경이 큰 캐리어를 가져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일은 어쩌고?”

“모니터링 일은 어디서든 노트북만 있으면 할 수 있잖아? 맞다. 나 저번주 통역이 은퇴식이었어. 마지막인 만큼 잘 끝내고 싶었는데.” 우경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실수 때문에 은퇴하는 건 아니야. 원래 생각하고 있었어. 여기 계약도 그 전에 해놓은 상태였고. 여기서 지내면서 미뤄왔던 책 번역을 하고 싶기도 했고. 언니한텐 미리 말할까 했는데, 와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안 했지. 우리 언니 이제 믿음직한 파트너 없어져서 어떡해? 나 없다고 울지 말고. 또 혹시 알아? 다시 통역이 그리워져서 금방 올라갈지?” 우경은 이빨이 드러나게 웃으며 나윤을 안았다. 거짓 웃음이 아님을 나윤은 잘 알았고, 그녀도 우경을 꼭 안아주었다.

세 사람은 바로 옆 건물에 있는 해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전에 계약하러 왔을 때 먹어봤는데 여기 매생이 전복죽 죽이더라. 어머니 손맛이 미쳤어. 주문을 마치고 셋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도아와 함께한 여행도 오랜만이었다. 도아는 요즘 어때? 남자친구는 있고? 우경이 도아에게 짓궂게 물었다. 그럼요. 도아의 답을 들은 나윤은 깜짝 놀랐다. 진짜? 누군데? 어디서 만났어? 우경이 흥미롭다는 듯 캐물었다. 학교 영화동아리에서 만났어요. 영화를 진짜 좋아하는 애예요. 도아는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에게 티켓 두 장을 내밀었다. 개학 전에 학교에서 영화제 하는데 꼭 보러 오세요. 제가 연출했거든요. 나윤은 이어지는 둘의 대화를 엿들었고, 도아가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들뜬 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윤은 하려던 이야기를 미뤄도, 어쩌면 하지 않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희미하게 번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매생이 전복죽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나윤은 십 년도 더 전에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짤을 떠올렸다. 한 뷔페의 음식 이름이 적힌 라벨이었다. 한글로 적힌 ‘매생이 전복죽’ 아래에는 영문으로 ‘Every life is ruined’라고 적혀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나윤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니 엄마 왜 저런다니? 그러게요? 모든 삶이 망가졌다는 이름의 음식을 먹어본 외국인들은 어떤 반응이었을까, 생각하며 나윤은 한 숟갈을 크게 떠 입에 넣었다. 크게 잘린 전복 덩어리는 너무나도 부드럽게 그녀의 어금니에서 부서졌다.

수상 소감

박준수

소제목: 검은 글자로 그물을 짜는 재미

새하얀 종이 위에 까맣게 적힌 것들을 봅니다. 멀리서 실눈을 뜨고 보니, 일정한 간격을 두고 먹이를 나르는 개미들 같기도 하고 촘촘하게 짜인 그물 같기도 합니다. 문득 이것들이 나열되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는 사실이 신비롭고 생경하게 느껴집니다. 검은 글자로 그물을 짜는 재미를 알아버렸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알기 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안에 많은 것을 담아보겠습니다. 거대한 재미를 알려준 세상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오늘 세상이 망해 없어지더라도, 내일도 여전한 사랑과 애정을 주실 가족에게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제 곁에 머물러줄 친구들에게 감사합니다. 연서, 은총, 예진, 꽃비, 지현. 오륙청춘 글친구들을 한 명씩 떠올리며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서진, 용주, 예진, 윤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눌 많은 날이 기대됩니다. 이번에 글을 쓰면서 한 노래만 주야장천 들었습니다. 자판을 두드리던 2024년 11월 초를 생각하면 언제나 귓가에 맴돌 곡 ‘시티’(City)를 써주신 래퍼 오왼님께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심지에 불을 붙여주신 한겨레21 관계자분들, 심사위원분들께 감사합니다. 꺼뜨리지 않게 조심하며 오래오래 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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