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는 즐겁게, 구호는 절실하게'…콘서트장 만든 DJ와 MC[인터뷰]
광장에 갇힌 목소리…응원봉과 2030이 만든 낙관
'집플리' 핵심은 비트, 메시지, 그리고 도입부 3초
환대의 응원봉, 연대의 MZ세대가 다시 만날 세계
[서울=뉴시스]임철휘 기자 = 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첫 번째 탄핵소추안이 국민의힘 의원들의 불참으로 폐기될 것으로 보이자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 사이에서 분노와 탄식이 돌림노래처럼 이어졌다. 분위기는 격앙됐으며 현장에는 비관과 부정적인 기운이 맴돌았다.
집회 주최 측이 "윤석열 탄핵" "국민의힘 해체" 등 구호로 성난 민심을 국회에 전하려 했으나, 실망감이 자아낸 무겁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최 측이 투표 불성립에 따른 메시지의 내용과 방향을 고민하는 동안 무대는 잠시 비워졌고 현장은 더욱 침울해졌다.
분위기가 반전된 건 집회 주최 측의 "국회를 에워싸자"는 제안에, 무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2030 여성들이 무대 앞을 메운 후부터였다. 무대 스피커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다만세)가 울려 퍼졌고, 이들의 '떼창'과 함께 비관적이고 부정적이었던 분위기는 금세 긍정과 낙관으로 바뀌었다.
이때 무대 앞을 가득 메운 응원봉을 보고 "에라 모르겠다"며 케이팝을 내리 10여곡을 튼 이가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의 김지호(52) 행사기획팀장이었다. 사회자로는 무대 아래에서 진행을 보조하던 박민주(27) 비상행동 활동가가 급하게 호출됐다.
둘은 각각 DJ와 MC로 집회 현장을 지키며 '케이팝의 민중가요화'와 '민중가요의 대중화' '응원봉 시위' 등 새로운 집회 문화의 중심에 섰다. 윤석열 대통령의 두 번째 탄핵소추안의 국회 가결 이틀 후인 지난 16일, 이들이 인터뷰에 참여해 집회 기획 과정에서의 고민과 집회가 남긴 것에 대해 얘기했다.
광장에 갇힌 목소리…투쟁은 즐겁게 구호는 절실하게
"'○○하라'로 끝나는 규격화된 구호, 기존의 집회 문화와 방식이 '그들만의 리그'로 보인다고 느꼈어요."
12·3 비상계엄 사태 전부터 김 팀장은 기존의 집회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운동권 사투리'로는 시민들의 공감을 사기 어렵다고 느끼던 차였다. 그는 "도심에서 시민을 만날 때 어떤 이미지로 보여야 하나를 고민했다"며 "친숙함이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박 활동가도 같은 생각이었다. 재미와 메시지를 동시에 잡고 싶었다. 둘은 "투쟁은 즐겁게 구호는 절실하게"라는 슬로건을 세우고 "사람들이 오고 싶어 하는 집회"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대중가요로 플레이리스트를 채우고, 구호는 "○○하라"에서 야구장 응원 박자로 바꿔 나갔다. 에스파의 '위플래시' 마디 사이에 "탄핵, 탄핵, 윤석열 탄핵"을, 김연자의 '아모르파티' 후렴구에 '아모르파티' 대신 '윤석열 퇴진'을 넣는 식이다.
"어떻게 하면 메시지를 간결하고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을지 연구했어요. 그렇다고 '케이팝을 들으러 집회에 간다'고 희화화되진 않았으면 했어요. 노래로 젊은 세대의 저항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박 활동가가 말했다.
'집플리'의 핵심은 비트와 메시지, 그리고 도입부 3초
'집회 플레이리스트' 선정 기준은 비트와 메시지, 도입부 3초였다. 집회를 주도한 2030 여성들이 학창 시절 부르고 따라 췄던 케이팝이 이 삼박자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행진할 때는 걸음 속도와 비트가 잘 맞아야 해요. 제자리를 뛸 때도 너무 빨라도 안 되고 너무 느려서도 안 돼요. 그리고 도입부 3초가 중요해요. 사람들의 심장이 뛰어야 해요." 박 활동가가 웃으며 말했다.
가사의 직관성도 중요했다.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에 맞춰 구호를 외칠 때는 "토요일에는 반드시 탄핵시키겠다"는 결기를 담았고, 탄핵안이 가결됐을 때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는 뜻"으로 에스파의 '넥스트 레벨'을 틀었다. "젊은 세대의 저항을 보여주기 위해서" 빅뱅의 '삐딱하게'를 선곡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평일·주말 가릴 것 없이 2주간 국회 앞에선 '탄핵 콘서트'가 열렸다. "케이팝 노래에 호응하는 시민들을 보고 확신했어요. 이 싸움은 이기겠다." 김 팀장이 말했다.
환대의 응원봉, 연대의 MZ가 다시 만날 세계
집회의 중심은 2030 여성이었지만, 이들은 탄핵 촛불 집회가 세대 간 연대와 소수자를 환대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랐다. 평범한 시민들도 즐길 수 있는 집회 분위기를 만들면서도 소수자와 연대 메시지를 비중 있게 다뤘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이 표결에 부쳐진 14일 가수 이랑이 연단에 올라 200만명(주최 측 추산) 앞에서 "페미니스트가 요구한다, 윤석열은 물러나라"고 외쳤다. 장애인, 기후활동가, 학생 등 사회의 약자들이 연단에서 연대 발언을 했다.
정권 퇴진이라는 단일한 구호 아래 모인 시민들이 소수자의 목소리에서 느낄 낯설고 불편한 감정이 신경 쓰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 만날 세계의 상을 그리기 위해서는 이들의 목소리가 필수라고 생각했다.
"이 정권이 우리 삶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누구나 절절하게 얘기해야 한다는 게 제 심정이었어요. 장애인은 어떻게 소외됐고, 여성들은 어떤 차별을 받았으며, 노동권은 어떻게 후퇴됐고, 민생은 어떻게 망가졌는지가 얘기돼야 일상과 삶에 연결된 정치 투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단순히 이 정권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다른 정권으로 갈아보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정권 퇴진으로 우리 삶까지 바꿔내기 위해서는 소수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김 팀장이 힘주어 말했다.
이들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신뢰와 연대를 다졌다는 점에서 이번 탄핵안 가결 국면과 집회를 높이 평가했다.
박 활동가는 "불만 많고 예민해서 조금만 힘들어도 포기하는 세대라는 인식이 'MZ세대'라는 말에 담겨 있었다"며 "그런데 이번에 집회로 MZ의 의미가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느꼈다. 젊은 세대가 다른 세대와 화합하는 걸 보면서 민주주의는 죽지 않는다는 걸 새삼 확인했다"고 전했다.
김 팀장도 "사회 운동의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세대 화합을 통해 보수 정권에서 민주 세력으로 단순히 정권을 바꾸는 게 아니라 개인 삶과 사회의 낡은 틀이 바뀌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비상행동은 윤석열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촉구하기 위해 전국 1500여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발족한 기구다. 비상계엄 선포 이튿날인 4일부터 광화문 사거리와 여의도 국회 앞에서 평일·주말 시민들이 참여한 촛불 대행진을 주최했다. 오는 21일 오후 3시 광화문 앞에서 집회와 행진이 예정돼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fe@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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