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만 더 일하면 되는데"···'주52시간'에 발목잡힌 R&D
韓 반도체산업 초격차 이미 실종
팹리스·소부장도 생존 발등의 불
빅테크조차 밤샘근무는 상식인데
국내선 초과근무 사실상 불가능
규제 혁파로 '속도전 부활' 나서야
한국 반도체 산업의 부흥을 위해 10개월 동안 머리를 맞댄 석학들의 제언은 ‘속도전의 부활’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과거 우리 메모리반도체는 빠른 의사 결정과 과감한 시설 투자로 기술 격차를 벌려가면서 세계 1위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는데 현재는 미국·중국·일본 등 전 세계가 반도체 추격전을 시작한 가운데 우리 내부의 규제까지 기업들의 발목을 잡아 혁신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석학들은 우선 당장 반도체 초격차에서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혁재 한국공학한림원 반도체특별위원회 공동위원장(서울대 교수)은 18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반도체특위 발표회에서 “D램의 미세화 기술은 이미 한계점에 봉착해 기업별 차이를 판단하기 어렵고 그나마 기술 격차가 벌어졌던 중국도 이제 턱밑까지 한국을 추격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여기에 팹리스(반도체 설계)와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도 경쟁력이 미흡해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게 이 위원장의 지적이다. 한마디로 국내 반도체 산업 전반에 위기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이 같은 위기 속에서도 기업을 가로막는 각종 규제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규제가 일주일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한 근로기준법이다. 그동안 재계는 적어도 첨단산업의 연구개발(R&D) 직종만이라도 이 규제에서 예외를 두자고 끊임없이 요구해왔다.
특히 반도체 산업의 경우 어제는 8단만 쌓아도 최선단 메모리로 인정을 받았지만 내일은 12단을 쌓지 못하면 구매 주문을 받기 어렵다고 할 정도로 정신없이 빠른 기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대만 TSMC는 물론이고 미국 엔비디아 같은 빅테크조차 밤샘 근무가 상식으로 통하는 배경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현실적으로 초과근무를 시행하는 게 상당히 어렵다. 1년에 최대 90일까지 64시간 특별 연장 근무를 허용하는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엄격한 조건하에서 직원들 동의를 얻어 정부에 인가까지 받아야 하기 때문에 발동 자체가 까다롭다.
이 위원장은 “30분만 더하면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일인데 규제 때문에 퇴근을 하고 다음날 똑같은 일을 다시 시작한다”며 “전쟁 중에 군인이 총을 놓고 퇴근하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경쟁 국가인 미국이나 일본의 사정은 다르다. 미국은 초과근무에 대해 수당만 제대로 지급한다면 시간 제한을 아예 걸지도 않을 뿐더러 고위 관리직이나 전문직에 대해서는 ‘화이트칼라 면제’라도 노동유연화제도를 운영해 근로시간 규제에 적용을 받지 않도록 제한을 열어두고 있다. 일본 역시 2018년부터 연구개발(R&D) 등에 관련된 고소득 전문직 근로자에 대해서는 근로시간 규제를 받지 않도록 하고 있다. 중국 역시 테크 업계에서는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일하는 ‘996’ 문화가 상식이 된 지 오래다. 이날 설명회에 참석한 안현 SK하이닉스 개발총괄 사장도 “TSMC는 오래 일하는 엔지니어에게 특급 수당을 주면서 독려한다”며 “반도체 개발은 한 번 관성이 붙었을 때 쭉 나가서 가속을 붙여야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석학들은 우리 반도체 산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투자 경쟁력을 유지하는 게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기조강연에 나선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앞으로 2047년까지 20년 동안 반도체 투자 및 시설 운영에 소요되는 재원은 1000조 원으로 추산된다”며 “이 가운데 300조 원은 정부가 지원해야 다른 국가들과 경쟁이 가능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거에는 천문학적인 투자를 감당하지 못해 쓰러지는 기업이 많았지만 앞으로는 국가와 함께 뛰면서 적자를 견뎌내고 공세에 나설 기업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어 기업 혼자서는 부담을 감당할 수 없다는 논리다. 안 전무는 “반도체 투자는 타이밍인데 한 번 시기를 놓치면 다음 투자는 손도 대지 못하고 경쟁에 밀리게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석학들은 또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 생산시설에 용수와 전기 등도 적시에 공급할 수 있도록 인허가 지연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정부가 지원하는 연구개발(R&D) 체계를 산업 변화에 맞춰 혁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김동순 세종대 교수는 “대기업과 팹리스가 연계해 상품 타깃형, 첨단기술 확보형 R&D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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