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61] 떠도는 도시들

‘보따리를 싼다’는 말은 하던 일을 완전히 그만두고 떠난다는 뜻이다. 그곳이 어디든 머물던 데서 완전히 떠나려면 아쉽고 서글프다. 어린 시절, 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자주 한 미술가 김수자(1957~)는 보따리를 싸고 푸는 일에 익숙했지만, 여러 번 했다고 해서 떠나는 일이 수월해지는 건 아니다. 1997년, 김수자는 보따리 수백 개를 트럭에 싣고 그 위에 올라타, 유랑하듯 머물다 떠났던 전국 방방곡곡을 11일 동안 달리는 퍼포먼스를 했다. 그렇게 2727㎞, 말하자면 서울과 부산 사이를 일곱 번 오갈 거리를 달렸다. 형형색색 화려한 천에 커다란 꽃무늬가 어우러진 김수자의 보따리는 20세기 대한민국 가정이라면 어느 집 장롱을 열어도 하나쯤은 있을 만한 이불보로 만들었다.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던 김수자는 회화라는 2차원 평면 위에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시각을 담으려 애쓰던 중, 어머니와 무심코 이불을 꿰매다 영감을 얻었다. 실과 바늘이 천을 가운데 두고 아래위로 오가면 분리된 두 존재가 하나가 됐다. 이불을 펼쳐두면 안락한 잠자리가 되지만, 그 이불보에 물건을 챙겨 묶으면 이별을 앞둔 보따리가 됐다. 보따리 안에는 한 사람의 아침에서 밤까지, 탄생에서 죽음까지, 사랑에서 이별까지 삶이 고스란히 담겼다. 김수자는 그때부터 캔버스 대신 보따리에 세상을 꾸리기로 했다.
보따리를 챙겨 길을 떠나는 사연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살다 보면 누구라도 이별의 슬픔과 이주의 괴로움을 겪게 돼 있다. 김수자의 보따리는 전 세계 곳곳에서 떠나야 하는 모든 이에게 위로와 공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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