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대표이사 누군지 몰랐다고?…심각한 ‘이사회 패싱’
올해 대기업 사장단 인사가 대부분 마무리된 가운데 새 대표이사를 내정한 주요 그룹 계열사 상당수가 사전에 이사회를 거치지 않고 인사를 공표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사회가 법적으로 대표이사 선임 권한을 갖고 있는데도 후보를 내정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돼 있을 뿐 아니라, 발표 전 사전 보고조차 받지 못할 정도로 기업 의사결정 과정에서 역할이 제한적이라는 점을 여실히 드러낸 셈이다.
삼성에스디에스(SDS)는 이준희 현 삼성전자 부사장을 신임 대표이사 사장으로 내정했다고 지난달 28일 밝혔다. 이날 발표는 삼성에스디에스 이사회의 결의는 물론이고, 공식적인 보고조차 거치지 않은 채 이뤄졌다. 삼성에스디아이(SDI)도 같은 날 최주선 현 삼성디스플레이 사장을 새 대표이사로 내정 발표했다. 삼성에스디아이 쪽은 “그룹 차원 인사라 사전 이사회를 거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각 기업 단위로 적임자를 찾는 게 아니라 그룹 차원에서 사장단 인사를 하고, 이 과정에서 회사의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가 철저히 배제된 것이다.
사전 이사회 보고나 결의가 법적 의무는 아니다. 상법상 신임 대표이사를 선임할 때 기업이 열어야 할 이사회는 최대 두 번이다. 신임 대표이사가 사내이사(등기이사)가 아닌 경우, 먼저 주주총회를 통해 이사로 선임돼야 하기에 이를 주총 안건으로 상정하기 위한 이사회가 필요하다. 그리고선 이사가 된 내정자를 대표이사로 선임하기 위한 이사회를 한번 더 거치면 된다. 신임 대표이사의 임기가 시작되는 건 이 때부터다. 이사회가 대표이사 선임에 대해 갖는 법적 권리란 이런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사회의 권리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 그룹에선 각 계열사 대표이사를 내정하는 과정에 이사회가 관여하기는커녕 내용도 공유받지 못하고 있다. 회장 비서실에서 계열사 사장단 인사를 조율·발표하던 과거 잔재가 관행으로 남아 이사회와 사전에 인사 관련 정보를 공유·협의하는 문화가 자리잡지 못한 것이다. 법적 의무가 아니어서 이사회 내에 임원후보추천위원회를 설치하지 않은 기업이 대다수라는 점도 한몫 한다. 결국 이사회는 결정된 후보를 형식적으로 승인하는 ‘거수기’에 그치고 있다.
삼성만이 아니다. 현대자동차는 올해 사장단 인사에서 처음으로 외국인 대표이사를 내정하면서 이사회에 이를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 한화그룹도 마찬가지다. 새 대표이사를 맞게 된 한화오션은 사전 이사회 소집이나 통보가 없었음은 물론이고, 공식적으로 대표이사 선임을 결의하기 위한 이사회 소집 전까지 이사회가 내정자를 만나지도 못했다. 각 기업 이사회가 대표이사 내정자를 맞으며 회사를 잘 이끌만한 후보인지 검증할 겨를도 없다는 이야기다.
총수 일가가 경영 전면에 나서는 한국 기업 실정상 이같은 관행이 책임경영에 가깝다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총수 일가의 그룹 내부지분율이 평균 3~4%에 불과한 점을 보면 너무 많은 권한을 행사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런 관행에서 벗어난 그룹도 있다. 일찍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엘지(LG)그룹은 계열사 대표이사를 내정할 때 각사 이사회에서 후보자를 집행임원(최고경영자)으로 먼저 선임하는 결의를 거쳐 내정자로 발표하고 있다. 에스케이(SK)그룹 계열사 역시 이사회를 소집해 대표이사 후보자 추천 결의를 한 뒤 대외에 공표한다. 이사회를 거쳐 대표이사 내정자를 공표하는 것이 법적 의무가 아니어도 정관을 통해 기업이 얼마든지 자체적으로 이사회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국내 주요 그룹의 ‘이사회 패싱’ 관행이 이사회의 법적 권한을 노골적으로 무력화하는 조처라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김우찬 경제개혁연대 소장(고려대 경영학 교수)은 15일 한겨레와 통화에서 “최소한 정관 개정을 통해 대표이사 내정자 선정을 이사회 보고 사항으로 규정해 사전에 공유·협의하는 절차 정도는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천준범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부회장(변호사)도 “상법상 절차를 요식행위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라며 “상장회사라면 일반 주주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 사외이사의 사전 승인을 받는 게 공식적인 업무 절차에 당연히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인식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남지현 기자 southj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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