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팥 달달 끓이며 기다리는 시간마저 달달[정연주의 캠핑카에서 아침을]
손끝 발끝 녹이는 화목난로 열기에
통팥 한 냄비 가득 천천히 삶아내
전통 팥죽·팥칼국수로 속 데우고
달달하게 조려 토핑 곁들인 단팥죽
다음날 아침 ‘앙버터 토스트’까지
세상에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많은 통조림이 존재했고 또 생겨나고 있다. 이것 하나만 있으면 점심밥도 뚝딱이던 참치 통조림, 가끔 어머니가 구워 주면 마치 특식 같았던 햄 통조림, 잡지 기자 시절에 유행했던 연어 통조림, 간단하게 영양 가득한 식사를 차릴 수 있는 콩 통조림, 올해 발매하며 파스타 종주국 이탈리아의 큰 비난을 받은 하인즈사의 카르보나라 통조림까지. 그중에서 내가 가장 반색했던 제품은 다름 아닌 단팥 통조림이다. 딱 참치 통조림만 한 크기에 원터치 뚜껑을 따면 자그마하게 간식 한 끼 정도 먹기 좋은 단팥이 들어 있다.
밥알과 새알심이 푹 퍼져서 그야말로 흐릿한 ‘팥죽색’을 띠는 슴슴한 팥죽이 아니라 설탕을 넣어서 또렷한 팥색이 남아 있는 단팥죽, 팥빙수의 꽃인 알알이 살아 있는 달콤한 조린 팥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딱 좋은 당도의 ‘단팥’ 통조림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먹기까지 30초도 채 소요되지 않는 통조림이 있어도 캠핑 짐을 꾸릴 때면 그 옆의 팥과 설탕을 집어 들게 된다. 단단한 팥이 부드럽고 달콤한 단팥이 되기까지는 그야말로 시간이 필요하다. 팥과 물이 함께 우르르 끓어오르면 물을 한 번 따라내고, 다시 한번 끓어오르면 또 한 번 물을 따라낸다. 그리고 냄비 가득히 물을 부어서 팥이 손가락으로 누르면 부스스 으깨질 때까지 몇 시간이고 천천히 삶는다.
처음에는 냄비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자갈 같은 소리가 나던 팥은 점점 냄비 가득하던 물을 흡수하고 잔뜩 부피를 늘려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다. 성질이 급해서 가만히 서서 기다리다 보면 속이 터지기 때문에 아예 타이머를 맞춰 놓고 일을 하면서 주기적으로 물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이제 충분히 익었는지 확인하러 주방으로 향한다.
그러는 동안 집 안에는 팥이 익어가는 은은한 향이 가득 찬다. 푹 익은 팥에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설탕을 쏟아붓고 달콤하게 윤기가 흐를 때까지 조리면 그제야 한 냄비 가득한 단팥이 완성된다. 당장 시나몬 가루를 톡톡 뿌려 한 그릇 먹어 치우고 나머지를 밀폐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면 마음이 든든하다. 팥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팥을 쑤는 시간까지 좋아하게 된 모양이다.
화목난로로 단팥 쑤기
동지가 되면, 그리고 언제든 마음이 답답할 때면 이렇게 여유롭게 팥 삶는 시간을 가지고 싶어진다. 다만 한 가지 걸림돌이 있으니 가스를 한참 동안 켜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안이 없으면 모를까 이제 통조림도 있는데 팥이 익어가는 시간 내내 소심하게 가스비를 걱정해야 한다니? 밥도 즉석밥을 먹는 판에 캠핑에 생팥을 가져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집에서는 따로 가스를 써야 하지만 날이 싸늘해지면 캠핑에서는 금방 불을 피운다. 그렇다면 이 화목난로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겠다! 여기에 팥을 쒀서 다음주 내내 먹을 것이다. 일거양득, 일석이조, 꿩 먹고 팥 먹고, 이런 식이다.
생각해보면 영양과 단맛을 제공하는 팥도 두 가지 역할을 한다. 전래동화 <팥죽 할멈과 호랑이>를 떠올려 보자. 여기서 할머니가 호랑이를 쫓을 시간을 벌어준 것도 동짓날을 맞이해 쑤기로 한 팥죽이었다. 도깨비가 말 피만큼 무서워한다는 팥, 액운이 물러난다는 팥. 나야 맛있어서 마음 놓고 잔뜩 먹고 싶어 한 냄비 가득 팥을 쑨다지만 어쨌든 삿된 것도 물리쳐 준다니 좋은 게 좋은 것이지 않을까?
팥은 맛있는 데다 액운도 없애 주고, 혼자 바쁘겠네, 감사하네. 중얼거리며 화목난로의 열기에 손끝 발끝을 녹이고 팥이 우르르 끓어오르기를 기다린다. 어쩌면 이게 주말 캠핑이 생활이 되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캠핑이 특별한 이벤트이던 초보 시절에는 지금보다 두근거렸을지는 몰라도 캠핑을 준비하는 데 심력을 많이 소모하고, 신경을 쓴 만큼 피로해서 다녀온 후에는 휴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는 여유가 생겨서 캠핑 중에 주중의 먹을거리를 챙기는 경지에 이르게 된 모양이다. 주중에 일하면서 꺼내 먹을 단팥을 쑤고 가끔은 빵도 굽는다. 내가 사골국물을 직접 내는 사람이 된다면 당분간 먹을 곰탕을 끓이는 장소도 캠핑장이 될 것이다. 분주한 주중을 보내며 주말의 여유로운 캠핑만을 기다리던 나를 위해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마련해 주는 주말의 캠퍼인 나.
다재다능한 캠핑 단팥
하지만 따끈하게 쑨 팥 한 그릇은 캠핑장에서 다양한 메뉴로 대활약할 수 있다. 일단 한 냄비 삶아 놓으면 설탕을 넣고 달달하게 만들기 전에 절반을 덜어서 밥알을 넣고 푹 퍼지도록 삶은 전통 팥죽을 만들 수도 있다. 오일장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내고 싶다면 쭉쭉 찢은 김치를 곁들인 팥칼국수를 끓이는 것도 좋다. 할머니 댁에서 놀고 있는 것처럼 마음도 뱃속도 따뜻해진다.
단팥죽을 먹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일본에는 단팥에 각종 과일과 한천 등을 넣고 꿀을 두른 안미츠라는 디저트가 있다. 가끔 우리나라 팥빙수의 토핑만 모아 놓으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단팥에 고소한 콩가루, 쫀득한 떡이나 경단, 통조림 과일.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팥빙수의 모양이니까. 요즘에는 백화점 지하에서 판매하는, 단팥과 함께 생과일을 넣은 과일 찹쌀떡이 인기다.
그래서 팥에 원하는 만큼 설탕을 넣고 달달하게 조리는 동안 옆에서 절편을 굽기도 한다. 식빵을 굽는 토스터에 절편을 올리면 겉이 살짝 거뭇하고 바삭바삭하며 속은 쫄깃하고 따끈해진다. 그릇에 단팥을 담고 절편을 올린 다음 시나몬 파우더를 살짝 뿌리면 캠핑날 오후의 간식이 완성된다. 장작불에 파묻어 익힌 군고구마를 숭덩숭덩 썰어 넣어도 좋고, 귤이나 샤인머스캣, 홍시처럼 좋아하는 과일을 잔뜩 넣으면 아삭하고 신선한 달콤함이 단팥과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우유나 코코넛 밀크를 살짝 두르는 것도 어딘가 우유 팥빙수 같은 느낌을 준다.
마지막으로 캠핑 단팥의 화룡점정이라면 다음날 아침의 앙버터 토스트가 되겠다. 두툼한 식빵을 노릇노릇하게 구운 다음 따끈할 때 가염 버터를 골고루 바르고 전날 쑨 단팥을 한 덩어리 올려보자. 가염 버터가 없다면 무염 버터를 바르고 소금을 살짝 뿌리는 것도 좋다. 질리지 않는 ‘단짠’의 맛을 선사하는 앙버터 토스트가 간편하게 완성된다.
간편한 통조림이 있어도 굳이 공들여 팥을 쑤는 시간.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만족하는 시간. 다시 바빠질 주중의 나를 위한 선물을 마련하는 시간. 완성한 팥을 먹기 전부터 벌써 복잡하고 답답한 마음속이 편안해진다.
생각해보면 팥죽 할멈을 잡아먹으려는 호랑이를 물리친 것은 팥죽 그 자체가 아니라 할머니의 팥죽을 얻어먹은 주방 집기와 동물이었다. 내 마음속 삿된 것을 물리친 것도 단팥을 쑤며 나와 일상을 돌보는 정성과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연주
캠핑 다니는 푸드 에디터, 요리 전문 번역가. 르 꼬르동 블루에서 프랑스 요리를 공부하고 요리 잡지에서 일했다. 주말이면 캠핑카를 타고 떠나는 맛캠퍼로 ‘캠핑차캉스 푸드 라이프’ 뉴스레터를 발행한다.
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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