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후폭풍…‘반국가 세력에 지배당한 나라’처럼 비춰지는 한국
계엄 당일 미국 대사 전화 피한 외교장관…“尹, 심각한 오판” 美 격분
(시사저널=정대진 원주 한라대 교수)
지난 10월 '제2의 한국전쟁 발발' 가능성이 외신을 타고 전해졌다. '한국전쟁 위험 1950년 이후 가장 높다'는 제목이었다. 미국의 한 전문가가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에 기고한 글은 대중의 눈길을 끄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기고문은 실은 용두사미였다. 해당 기고문은 미 국가정보위원회가 작년에 내놓은 보고서를 인용해 북한의 남침 시나리오를 거론했다. 다만 최악의 시나리오가 곧 현실화한다는 건 아니고 북한의 중대 움직임이 향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에 일어날 수 있다며 끝을 흐렸다.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주장은 사실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다. 만일의 사태가 일어난다면 맞는 분석이 되는 거고,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사이 상황과 조건이 변한 것이라는 변명이 가능한 일이다. 관련 후속 보도는 더 이상 없었지만 한국 상황을 오해할 수 있는 미국발(發) 기사의 영향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美, 그간 찾아볼 수 없었던 강한 톤으로 경고
이번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에도 미국발 기사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지시간 12월4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연설에서 "이 극적인 발표(계엄)가 워싱턴을 포함한 모든 곳에 경종을 울렸다"면서 "한국의 민주주의 제도가 적절히 작동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서 "한국 민주주의는 강력하고 회복력이 있으며 앞으로도 공개적으로 발언하고 관여할 것"이라고 했다. 같은 날 블링컨 국무장관도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이 과정이 평화롭게 헌법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음 날 조태열 외교부 장관과의 통화에서는 이번 사태에 대해 깊은 우려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직설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은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부장관이었다. 백악관 아시아태평양조정관 시절부터 '아시아 차르'(아시아 전략 최고 담당자)로 불리는 캠벨 부장관은 현지시간 12월4일 애스펀안보포럼에서 "윤 대통령이 심각하게 오판(badly misjudged)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이 정도 발언은 독재국가 지도자에게나 쓸 법한 표현이다. 인권 문제 등으로 최악의 관계였던 지미 카터와 박정희 대통령 사이에서도 이런 표현은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카터 대통령이 자신의 구순 기념 회고록에서 '박정희 장군'과의 회담을 두고 "동맹국 지도자들과 가진 토론 중 가장 불쾌한 토론"이었다고 쓴 것도 퇴임 후 34년이나 지난 2015년의 일이다. 한미동맹 사이에서 캠벨 부장관 수위의 발언이 있었던 사실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회자될 일이다.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가 계엄 선포 소식을 접하고 조태열 외교부 장관을 포함한 정부 관계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상황 파악을 시도했으나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던 사실도 드러났다. 조 장관은 이에 대해 12월11일 '비상계엄 사태 관련 긴급 현안질문'을 주제로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고 잘못된 정세 판단과 상황 판단으로 해서 미국을 미스리드(mislead·잘못 이끎) 하고 싶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조 장관은 동맹국인 미국을 '미스리드' 하지 않기 위해 전화를 받지 않는 부작위로 최선의 조치를 다했다고 항변한 셈이다. 하지만 계엄 사태 그 자체가 이미 미국이 한국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가지도록 '미스리드' 하고 있다.
당장 지난주만 해도 워싱턴에서 열릴 예정이던 한미 제4차 핵협의그룹(NCG) 회의와 제1차 NCG 도상연습이 무기한 연기됐다. 오스틴 국방장관도 방한 일정을 취소했다. 골드버그 대사는 12월12일로 예정됐던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의 면담을 취소했다. 민감한 시기에 특정 정당 대표를 만나 '미스리드'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계엄 사태가 없었다면 곧 이임할 미국대사가 제1야당 대표를 만나 한국 정국 상황을 더욱 자세히 파악해 본국으로 돌아가 워싱턴 조야에 한국의 다양한 정보를 전할 수 있는 기회였을 거다. 하지만 그 기회는 사라졌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우려는 더욱 깊어진다. 트럼프 시대를 앞두고 더욱 주목받는 미국의 보수 채널 폭스뉴스 계열의 폭스 비즈니스는 계엄 사태를 다루며 "대한민국의 야당, 진보, 좌파는 실제로 북한에 동조해 왔으며 그들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공격해 왔다"는 전문가 대담을 내보내기도 했다. 이어서 "노조는 좌파 세력에 의해 통제되고 있으며, 이는 그들이 북한에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발언도 전파를 탔다. 이번 계엄 선포에서 등장한 '종북 반국가 세력'에 마치 한국이 이미 지배되고 있거나 곧 지배당할 것 같다는 오해를 미국 시청자들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용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함께 수호해온 한미동맹의 견고함과 분단하에서도 민주화와 시장경제를 성공적으로 발전시켜온 대한민국의 역사를 고려하면 있을 수 없는 발언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한국에 대한 오해는 한층 더 깊어질 수 있다. 특히 트럼프에게 한국에 대한 잘못된 시각이 생길 수도 있다. 본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마다 축하 전화를 해온 한국의 정상이 사라지는 상황을 트럼프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민주주의 선진국이라고 하더니 결국 '머니 머신(money machine·현금 자동지급기)' 정도밖에 안 되는 나라로 여기지는 않을지, 우리가 혼란한 틈을 타 방위비분담금 대폭 인상이나 관세 때리기를 선언하며 다음 대통령을 기선 제압하려 하지 않을지 우려된다.
'세계적 방산 큰손' 일정 앞당겨 귀국
'미스리드' 되는 건 미국뿐만이 아니라는 점에서 첩첩산중이다. 지난주 계엄 선포 직후 스웨덴 총리는 방한을 취소했다. 같은 기간 서울에 미리 와있던 방산 업체 투자자이자 스웨덴의 '큰손'인 야콥 발렌베리 인베스터AB 회장도 일정을 앞당겨 귀국해 버렸다. 올해 나토에 가입하며 국방력 증강에 힘쓰고 있던 스웨덴과의 방산 협력 기대감은 잠시 접어두어야 하는 분위기다.
한국 조선 업계가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3조원대 규모의 폴란드의 잠수함 도입 사업 오르카(Orka) 프로젝트와 60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캐나다의 잠수함 도입 사업 참여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방산 수출은 기술 보안이 핵심이고 주로 정부 간 거래로 이루어지기에 외교적 신뢰가 핵심이다. 갑자기 계엄이 선포되고 정치적 핵폭탄이 터지는 나라와 누가 방산 협력도 하고 투자 파트너가 되려고 하겠는가. 불확실성의 겨울을 최대한 단축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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