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재현’ 재계…투자 줄이고 현금 늘린다
尹 정부 경제정책 사실상 중단으로 비상
(시사저널=유호승 시사저널e. 기자)
재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글로벌 경기 침체와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변화 전망으로 어려운 시기를 간신히 버텨내고 있는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정국까지 겹치면서다. 경제계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될 당시 입었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유사한 상황이 재현되면서 8년 전 '트라우마'로 몸서리치는 모습이다.
삼성과 SK, 현대차, LG 등 주요 기업은 당장 기존에 수립한 내년 사업계획을 수정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보호무역주의 강화에 맞춰 오랜 시간 경영전략을 준비했지만, 탄핵 정국 도래에 이를 다시 짜야만 하는 형국이다. 기업들은 임원인사 및 조직개편을 마무리하고 내년 사업 준비를 어느 정도 마친 상황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로 촉발된 혼란스러운 국내 정세로 인해 처음부터 다시 준비해야 하는 셈이다. 새로운 정권이 출범하면 경제정책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통상 12월은 다음 해 사업·투자 계획과 자금 조달 방안 등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시기다. 사업목표를 뚜렷이 하고, 새해가 되자마자 준비한 계획을 실행할 수 있도록 세부 전략을 마련하는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올해 12월은 어느 때보다 높은 대내외 불확실성에 따라 수시로 회의를 진행하며 상황 파악에 매진하고 있다. 다음 해를 준비해야 할 시기에 모든 것을 다시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해외사업부에서는 더 큰 위기감이 나타난다. 상황 파악이 국내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해외사업부의 경우 한국 본사를 통해 정치 상황을 수시로 파악해 탄핵 정국이 기업 신뢰도를 훼손하지 않도록 하는 데 만전을 기하고 있다"며 "국내에서는 지주사나 계열사 모두 탄핵안 가결이나 부결 등 다양한 시나리오를 마련해 기업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이는 중"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미국 등 해외 반응에 주목하고 있다. 어수선한 우리나라 상황을 해외 언론이 다루기 시작하면서 국가 신뢰도 및 경쟁력이 낮아질 수 있어서다. 한국무역협회 등 경제단체는 주요 국가의 싱크탱크와 교류하며 현지 상황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16년 탄핵 정국과는 다르다…불확실성 더 심각해져"
또한 윤석열 정부가 추진해온 수많은 친기업 정책이 '올스톱' 될 공산이 큰 점도 우려한다. 국가경제 활성화를 목표로 법인세 및 상속세 인하, 투자 확대를 위한 세금 감면 정책 등을 추진해 왔지만, 탄핵 정국으로 인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새롭게 추진하려던 정책은 사실상 논의가 중단된 상태다. 직접 보조금 지원을 명시한 반도체 특별법 통과는 계엄 사태로 좌초된 모양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는 12월9일 반도체 특별법 관련 법안을 논의하려 했다. 하지만 탄핵 정국 여파에 소위조차 열리지 않았다. 이 법안의 핵심은 정부가 반도체 기업에 직접적으로 보조금을 지원한다는 점이다. 국회를 통과하면 우리나라와 미국 등에 대규모 생산거점을 설립 중인 삼성전자 및 SK하이닉스는 투자비용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반도체 특별법이 정치 상황으로 인해 통과가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경쟁 국가 기업의 맹추격을 뿌리치는 데 어려움이 나타날 것이 확실시된다. 반도체는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 산업이다. 주요 국가는 이 분야에 대대적으로 정부 지원금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표적으로 일본은 올해 11월 반도체 산업에 약 90조원을 지원하겠다는 종합경제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 미·중 갈등 속에서 국제 경쟁력을 잃지 않기 위한 대규모 정책 지원으로 풀이된다. 지원 방식은 보조금 지원은 물론 정부기관을 통한 출자, 민간 융자에 대한 채무보증 등이다. 중국 역시 64조원 규모의 반도체 투자기금 '빅펀드'를 조성했다. 미국의 강한 제재 속에서도 반도체 산업 자립을 계속 추구하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이 펀드는 중국 파운드리 기업 'SMIC'나 낸드플래시 제조업체 'YMTC', 현지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회사에 자금을 투자하는 데 쓰인다.
반면 '반도체 강국'으로 평가받는 우리나라는 정치 상황으로 정부 지원이 언제 실시될지 미지수다. 반도체 경쟁은 수개월만 뒤처져도 기술 경쟁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해외 경쟁 기업이 국가를 등에 업고 연구개발(R&D)에 매진해 한국을 추격 중인 상황에서 탄핵 정국으로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는 상황이다. 법안이 통과돼야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첨단 반도체 개발에 속도를 낼 수 있다. 보조금 지급이 늦어지는 것은 기업은 물론 국가 경쟁력과 신뢰도를 훼손하는 행위다.
반도체 공장에 전력 공급을 늘리는 확충 특별법(전력망법)도 언제 논의될지 알 수 없다. 설비에 필요한 전력 공급 인허가 절차의 간소화 등이 핵심인 법안이다. 삼성전자 및 SK하이닉스가 참여 중인 경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는 10기가와트(GW) 이상의 전력이 필요하다. 전력망법이 통과돼야 거점 조성 시기라도 빨라지는데, 법안 논의가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정상적인 사업 진행이 크게 지연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내외적 위기 요인이 커지면서 변동성에 대응하기 위한 현금 확보에 주력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경기 회복 둔화에 더해 친기업 정책의 폐기 위기 등으로 설비투자(CAPEX)를 늘리는 대신 안정적 운영을 위한 유동성 확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재계는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을 늘리는 데 주력한다. 갑작스러운 재무 리스크에 대처하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로 2020~22년 주요 기업은 투자보다 현금 확보에 주력했다.
지난해부터는 신규 투자를 늘리기 시작하며 지속 성장을 위한 발판 마련에 나섰지만, 탄핵 정국 도래로 또다시 현금 곳간에 자물쇠가 채워질 것으로 점쳐진다. 환율을 시작으로 금융시장에 예상보다 큰 변동성이 나타나고 있어서다.
다른 재계 관계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될 당시에는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국 경제가 상승기였던 반면, 현재는 우리나라는 물론 글로벌 경기가 하락세인 시점"이라며 "기업이 체감하는 탄핵 정국으로 인한 불확실성은 과거보다 지금이 더 심각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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