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것을 지키려 ‘가장 소중한 빛’ 들었다
아이돌 팬덤이 나서면 얼마나 큰 응집과 행동력이 발휘되는가. 이번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들은 ‘그립감’이 좋으며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높이 들기에 적합한 ‘봉’을 기본적으로 소지하고 있다. 길바닥 밤샘은 익숙하며 구호·함성·파도타기는 특기다. 모든 일정을 다 참여하고 싶은 ‘올출(ALL出)’ 욕구, 본능적으로 중앙 1열에 자리 잡는 적극성, 그리고 자신이 가진 정보와 재화를 조건 없이 나누는 연대 의식이 높다. 매일 밤 국회 앞 탄핵 집회 현장의 하늘은 K팝 응원봉이 뿜어내는 형형색색 빛으로 물들고 있다. 이를 본 기성세대는 ‘시대의 전환’이라고 나직이 말했다.
오색 빛깔 응원봉, 진짜 민주주의 같지 않나요?
그룹 NCT 팬인 서예민씨(25)는 이번 집회 현장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손에는 직접 만든 탄핵 스티커를 붙인 직육면체 모양 응원봉인 ‘믐뭔봄’이 들려 있었다. 마치 이번 집회를 위해 ‘탄핵봉’으로 새로 태어난 듯 보였다.
“믐뭔봄은 다른 팬덤 응원봉과 달리 투박하고 각이 져서 ‘돈가스 고기 망치’로 불리는 등 홀대를 받아왔어요. 그런데 이번 탄핵 집회에서는 세 보이는 디자인과 강한 발광으로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냈죠. 드디어 쓰임을 찾았다고 기뻐하는 팬들이 많아요.”
서씨는 X(옛 트위터)에서 같은 팬덤 동료들이 응원봉을 들고 집회 현장에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작은 빛이라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참가자들은 응원봉에 탄핵 관련 문구를 붙이거나 붉은 띠를 두르는 등 ‘봉꾸’(응원봉 꾸미기)도 적극적이다. 처음 집회를 경험한 그는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연대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방식을 새로 알았다.
“집회에서 본 오색 빛깔 응원봉은 마치 민주주의를 나타내는 집약체처럼 보였어요.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다른 색깔로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우리 뜻을 펼 수 있구나’ 새삼 깨달았어요.”
그룹 워너원 팬덤이자 멤버 김재환의 개인 팬인 윤이나씨(36)는 응원봉을 두 개 소지하고 있다. 워너원의 응원봉은 봉우리에 숫자 1이 있어 일명 ‘1찍봉’이라고 불린다. 김재환의 개인 응원봉은 바람개비 모양으로 파란빛을 내는 옵션을 장착하고 있어 ‘1찍봉’과 함께 들면 ‘시국 아이템’으로 안성맞춤이 된다.
“제 응원봉을 보고 중장년층 어른들이 신기해하셨어요. 게다가 같은 팬덤 봉끼리 하이파이브하듯 부딪치면 반짝거리는 것을 보고 ‘어디서 샀냐’ ‘얼마냐’, 엄청나게 물어보셨어요.”
응원봉에 대한 기성세대의 관심은 지대하다. 현장의 한 시민단체는 지난 7일 집회 도중 “우리도 응원봉이 누구의 팬덤인지 배워야 한다”며 때아닌 ‘응원봉 강의’를 열기도 했다. 각각의 응원봉이 호명될 때마다 해당 팬덤의 참가자들이 환호했다.
해당 단체의 관계자는 “즉흥적으로 준비한 강의”라고 밝혔다. 그는 “계엄령 포고 이후 금요일(6일) 밤부터 응원봉이 하나둘 보이더니 이제 촛불집회가 아닌 응원봉 집회라고 불릴 정도로 많아졌다. 주최 측은 기성세대도 어떤 응원봉이 어느 팬덤의 것인지 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2030 여성이 주도해 만들어낸 응원봉 물결을 두고 ‘시대의 전환’을 상징한다며 “대통령 탄핵 가결을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젊은이들을 보며 앞으로의 집회는 ‘자기 생각을 취향대로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형태’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응원봉은 언제부터 집회에 등장했을까?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집회 때부터라는 것이 참가자들 사이 정설이다. 당시 시민들은 특정 세력에 의해 동원된 정치 단체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장수풍뎅이 연구회’ ‘콜드플레이 예매 성공자 연합’ 등 이색 모임명이 적힌 깃발을 들었다. 그때 ‘민주팬덤연대’를 비롯한 몇몇 모임도 나타났다. K팝 팬덤에 각자 응원봉을 들고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가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이들이 단단한 결속력으로 집회마다 참여하자 “아이돌 덕후들이 나라 걱정하면 큰일 난 것”이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
중고거래 플랫폼 번개장터에 따르면 계엄령 선포로 집회가 시작된 12월 첫주 ‘응원봉’ 검색량이 그전 주에 비해 1923.40%나 증가했다. 응원봉은 정기적으로 리뉴얼을 거치며 기수별 버전이 출시된다. 응원봉이 ‘탄핵 아이템’으로 변모하며 중고거래 사이트에는 집 안에 모셔두었던 구 버전 응원봉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거나 ‘시위용으로 쓴다면 무료 대여해주겠다’는 글이 올라왔다. 응원봉은 별도의 보관함까지 구입해 둘 정도로 팬들이 애지중지하는 굿즈다. 가격은 보통 4만원대이나 9만원대도 있다.
스스로를 ‘아이돌 덕질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직장인일 뿐’이라고 말하는 윤씨는 “이런 상황이 터지니 내가 즐기던 취미도, 당연한 일상도 파괴될 수 있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처음 오시는 분들은 여의도가 넓고 복잡해 우왕좌왕할 수 있지만 응원봉만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집회에 참석할 수 있다”며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하기를 바랐다.
우리는 집회에 최적화된 프로들이다.
K팝 ‘덕질’과 시위,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두 행위는 흡사한 지점이 많다는 분석도 나온다. 현장에서 만난 K팝 팬덤도 ‘우리는 집회 환경에 매우 익숙하다’ ‘시위에 특화된 집단’이라며 한목소리를 냈다.
연말에 열리는 콘서트, 가요 시상식 방청을 위한 혹한기 야외 대기는 이들에게 예삿일이다. 연말엔 ‘사녹’이라 불리는 사전 녹화가 주로 새벽에 이뤄지는데, 선착순 입장이라 전날 밤부터 노숙도 불사한다. 시위에 참석한 한 아이돌 팬은 “과거 MBC <가요대제전>은 매년 12월 임진각에서 이원생중계를 해왔다. 영하 20도 추위 속 공연과 비교하면 이번 집회는 일도 아니다”라며 웃음 지었다. 응원봉뿐만 아니라 한겨울 야외라는 가혹한 환경, 든든한 옷차림, 방한용 핫팩, 바닥의 한기를 막을 방석, 카드나 휴대폰 결제가 불가능한 경우를 대비한 현금, 본인 확인을 위한 신분증 등 방송 녹화장과 집회 참가의 여건과 모든 준비물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K팝 팬덤은 세대를 넘어오면서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집단으로 진화했다. 박선민 대중문화평론가는 이들을 ‘소셜미디어를 통한 자기표현에 능하며 생각을 그대로 실천하는 세대’라고 정의했다.
“팬덤의 이름으로 소외된 이웃을 돕거나 기부하는 활동이 이어지고 있어요. 글로벌 팬덤으로 확장되면서 국제적으로도 다양한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흑인 인권운동, 필리핀 독재 통치 반대 운동에도 K팝 팬덤이 있었어요. 또 각종 환경 캠페인을 펼치고 2021년에는 기후위기에 대항하기 위한 플랫폼 ‘케이팝포플래닛(Kpop4planet)’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K팝 팬덤의 특징인 ‘나눔 문화’도 이번 집회에서 빛을 발했다. 몬스타엑스 팬인 KBS 청주 지역국 리포터 백지원씨(33)는 응원봉 ‘몬둥이’를 다부지게 들고 집회에 참석했다. 그는 주변 팬들과 나눠 먹기 위한 간식을 넉넉히 준비했다.
“콘서트나 행사가 있는 날은 그날 처음 만나는 이들을 위한 선물을 항상 챙겨요. 이번 집회에서도 핫팩, 간식, 방석 심지어 간이의자까지 주시는 분들이 있었어요. 집회 현장 인근 여자 화장실에 생리대까지 준비해 챙겨두시는 팬분도 계셨고요.”
오피스 밀집 지역이라 주말이면 대부분 문을 닫는 서여의도 소재 카페들도 지난 주말 문을 활짝 열었다.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들이 참석자들을 위해 커피, 각종 간식을 ‘선결제’해둔 덕분이다. 이 역시 K팝 팬덤의 넉넉한 나눔 문화에서 비롯된 풍경이다.
화염병은 촛불이 되었고 촛불은 응원봉이 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 대신 그룹 에스파의 ‘위플래시’가 구호와 함께 집회장에 울려 퍼졌다. 집회를 주최하는 기성세대는 그 변화를 적극 수용하며 ‘탄핵플리(탄핵 집회 플레이리스트)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지난 9일 집회 현장에서는 한 중년 남성이 ‘다만세’ 가사를 외워 왔으니 틀어달라 요구했다는 후기도 들린다. 2007년 발표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는 2016년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을 규탄하며 대학가 첫 시국선언을 시작한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의 투쟁가로 불린 이래 ‘민중가요’로 자리 잡았다.
K팝 팬덤의 집회 현장을 직접 체험한 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는 “자신들이 심취한 하위문화 요소를 정치적 집회를 이용해 즐기는 풍경이 정말 흥미로웠다”며 “집회를 주도하는 세대가 바뀌고 있음을 몸소 느꼈다”고 평했다.
“좀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1980년대 민중 저항 정신이 깃들어 있던 집회는 촛불집회를 통해 범시민 문화로 변했습니다. 이제는 한발 더 나아가 젊은 세대가 K팝 어법으로 집회를 축제와 평화 분위기로 만들기 시작했죠. 광장이란 원래 그런 장소죠. 다양한 정체성과 의견이 공존할 수 있는 곳이니까요.”
이유진 기자 88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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