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이 남측 전기 끊자… 급파된 美 발전선이 암흑천지를 밝혔다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1948년 5·14 단전 사태와
전력 자립을 위한 사투
태평양전쟁 막바지 식민지 조선의 생필품 공급은 매우 열악했다. 식량이 부족해 미곡의 공출‧배급제가 실시되었고, 석유가 부족해 대체재인 송근유(松根油) 제조를 위해 소나무 뿌리 채취에 열을 올렸다. 의복, 신발 등 기본적인 소비재 공급도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딱 하나, ‘전기’만큼은 차고 넘쳤다.
1930년까지만 해도 조선의 발전력은 5만여kW에 불과했고, 전등이 보급된 지역은 16.3%, 가구는 6.3%에 불과했다. 이렇듯 전력이 부족했던 조선은 1930년대 개마고원과 압록강 일대에 거대 수력발전소가 연이어 건설되면서 단 10년 만에 아시아에서 가장 전력이 풍부한 지역으로 탈바꿈했다. 닛치쓰(日窒)주식회사가 ‘조선질소비료 흥남공장’에서 사용할 전력을 얻기 위해 동양 최대 규모의 토목 공사를 벌인 끝에 1929년 1호기를 시작으로 1932년 4호기까지 준공한 부전강수력발전소는 발전력이 20만kW에 달했다. 당시 조선 전체 발전력의 4배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이 성공에 고무된 닛치쓰는 조선총독부에 발전량의 2분의 1을 공공용으로 제공하기로 하고 사업권을 확보해 1935년 장진강수력발전소를 준공했다. 이 발전소의 발전력은 33만kW에 달했지만, 전력을 공급받기로 한 평양과 경성의 전력 사용량은 7만kW에 불과했다. 1940년 35만kW 허천강수력발전소, 1941년 60만kW 동양 최대 규모의 수풍수력발전소가 전력 생산을 시작했다. 전체 생산 전력의 85%는 그 시기 북한 지역에 진출한 질소비료, 알루미늄, 마그네슘 등 전기화학 분야 일본 대기업들이 소비했다.
대규모 수력발전소 건설에 맞춰 전국적으로 송전선이 설치되었다. 1937년 ‘평양~경성’, 1941년 ‘경성~대전’ 송전선이 설치되면서 한반도 전역에 걸쳐 통일된 전력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 북한 지역의 거대 수력발전소에서 전기를 송전받게 됨에 따라 남한과 북한의 전력 불균형 문제는 해소되었다. 그러나 가뜩이나 원가가 비쌌던 남한의 화력발전은 경쟁력을 상실했다. 1937년 강원도 지역에서 생산된 무연탄을 원료로 발전력 10만kW로 건설된 영월화력발전소도 북한 수력발전의 보조적 역할로 축소돼 발전량을 줄여나갔다.
이렇듯 남북 간 전력 생산이 불균형한 가운데 맞은 해방과 분단은 남한에는 ‘대재앙’이었다. 해방 당시 북한의 발전력은 152만kW(88.5%)였지만 남한은 20만kW(11.5%)에 불과했다. 예비 발전소로 전환된 당인리와 부산화력발전소는 가동 중단 상태였고, 유일하게 가동되었던 영월화력발전소조차 1만kW 이하로 발전량을 줄인 상태였다. 북한과 남한의 발전 실적은 95.7% 대 4.3%로 발전력보다 그 격차가 더 컸다. 당시 남한에 필요한 전력은 8.4만kW였지만 자체 발전 능력은 3만kW에도 미치지 못했다. 필요 전력의 66%에 해당하는 5.5만kW는 북한의 송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38선 통행 규제 이후 남북 교역은 대부분 단절되었지만, 미국과의 관계를 의식한 소련은 남한으로의 송전을 굳이 끊지 않았다. 1946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소련 대표 스티코프 상장은 북한의 전력·석탄·화학제품과 남한의 쌀을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남한도 식량 위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소련의 제안을 거절했다. 미소공위 결렬 이후에도 소련은 “송전을 끊겠다”고 거듭 위협하며 ‘현물’로 전기 요금 지불을 요구했다. 미소 양국 전문가들이 협의해 합리적인 전기 요금을 책정하자는 미국의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6년 12월, 북한은 송전선 고장과 발전소 수리를 이유로 남한으로 송전하는 전력량을 줄였고, 남한 각지에서 정전 사태가 일어났다. 남한의 전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미군정은 전기의 남용이나 도전(盜電)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전기 요금을 인상해 절전을 유도했다. 한동안 사용 중지된 발전소의 증설과 복구를 통해 긴급하게 발전량을 늘려 나갔지만, 남한의 전력 자립은 1~2년 안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1947년 6월, 미‧소군정과 남북한 대표가 평양에 모여 ‘조선전력협정’을 체결하고, 해방 이후 남한에 공급된 전기 요금 400만달러를 기계·전기용품 등 북한이 지정한 현물로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전기 요금의 지불 방법과 액수 산정을 둘러싸고 양측이 대립을 지속해 남한이 북한에 지불한 전기 요금은 총액의 35%에 불과했다. 미군정은 소련이 요구하는 물자의 수입이 불가능하므로 현금으로 지불하게 해달라고 거듭 요청했지만, 소련은 현물 상환을 고집했다.
1947년 11월 18일 오전, 북한은 갑작스럽게 2시간이 넘도록 송전을 중지해 남한에 큰 혼란이 일어났다. 그 후에도 발전소 사고와 수리 등을 이유로 “당분간 종전 송전량의 절반만 공급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 하지만 기술적인 문제는 명분일 뿐이었고, 실제로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입국을 앞두고 남한에 보내는 일종의 경고였다. 모두가 예상했던 것처럼 5‧10 총선거가 남한 단독으로 치러진 이후, 북한은 ‘5월 14일 정오’를 기해 일방적으로 송전을 중단했다.
미군정은 영월·당인리·부산 화력발전소의 복구를 서둘렀고, 임시방편으로 미군이 운용하는 발전선 2척을 도입했다. 2만kW 발전선 ‘자코나’는 부산항에 정박해 3월부터 발전에 들어갔고, 6900kW 발전선 ‘엘렉트라’는 단전 직후 인천항에서 발전을 시작했다. 2척의 발전선은 단전 직후 남한 전체 전력량의 20%를 발전해 신생 대한민국이 암흑천지에 빠지는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
단전 이후 미군정과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가능한 수단을 총동원해 발전량을 끌어올렸지만 전력 부족은 피할 수 없었다. 부족한 전기 때문에 공장 휴업이 속출했고, 수돗물 공급에도 지장을 초래했다. 구역을 나누어 전기를 돌아가며 공급하는 윤번제 배전까지 실시해야 했다. 공장 휴업으로 각 지역에서 실업자가 속출했고 통신·수도·교통·치안 등에 전력을 우선 공급하는 바람에 한때 민간 배전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가정에는 30W 이하의 전구 사용만 허용하고, 1세대가 사용할 수 있는 전등 숫자도 3개로 제한했다.
발전선은 6‧25전쟁 때 다수의 발전소가 파괴된 위기 상황에서도 맹활약했다. 발전선은 1952년 남한 전력량의 50% 이상을 발전했고, 본국으로 귀환하는 1955년까지 매년 남한 전력 수요의 3분의 1 이상을 공급했다. 5‧14단전 이후 전력 공급량은 6년 후인 1954년에야 1948년 수준으로 회복되었고, 제한 송전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64년에야 해제되었다. 그 후로도 예비 전력 부족, 석유 파동 등으로 주기적으로 반복된 제한 송전은 1978년 58.7만kW 고리원자력 1호기가 준공되면서 간신히 극복되었다.
<참고 문헌>
류승주, ‘1946~1948년 남북한 전력수급교섭’, 역사와 현실 제40집, 2001
오선실,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전력시스템 전환’,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0-1호, 2008
오진석, ‘한국 근현대 전력산업사, 1898~1961′, 푸른역사, 2021
전성현, ‘한국전쟁 전후 전력 위기와 발전선의 역할’, 인문사회과학연구 제23-1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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