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 대신 승자독식…공화정은 무너졌다
에드워드 와츠 지음
신기섭 옮김
마르코폴로
윤석열 대통령의 돌발적인 계엄 선포에 따른 탄핵 정국이 일거에 한국 민주주의를 소용돌이 속으로 빠뜨렸다. 타협과 조정, 양보와 협치 없이 치킨게임으로 일관해 온 정치권 및 극렬 지지자들 간의 극한 대립과 갈등, 공화국과 민주주의의 위기를 한국이 과연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전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
때마침 『독재의 탄생: 로마 공화정의 몰락』 한국어판이 발간돼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던져 준다. 로마사 전문가인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역사학 교수 에드워드 와츠가 지은 이 책은 한국을 포함해 21세기 현재 우리 세계의 정치 현실을 이해하는 데 고대 역사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로마 공화정은 기원전 509년 시작해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가장 귀하고 신성한 사람)라는 칭호를 얻으며 최초의 황제로 등극할 때까지 거의 500년 가까이 지속했다.
당시 로마는 시민군을 동원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으며 지도자들과 동맹 세력 내에서 정치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도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시민군은 지칠 줄 몰랐고, 귀족 계층은 분열되지 않았으며, 지도자들은 뇌물에 매수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피로스 왕은 결국 몇 번의 전쟁을 더 치른 후 로마 정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로마 공화정은 한니발 장군이 이끄는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고 영토 확장과 경제 팽창으로 지중해를 제패하는 대국이 됐다.
심의와 합의에 기반한 로마 공화정이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30년대다. 급격한 경제성장과 이에 따른 빈부격차가 심해졌으나 로마의 정치지도자들은 시민들의 경제불평등 우려에 어떻게 대처할지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했다. 부와 권력을 과점해 영향력이 막강해진 경쟁자들은 정치적 행위의 허용 범위를 넘어 극단적인 정책을 밀어붙임으로써 정치인들의 무능을 기회주의적으로 공략했다. 정치적 타협과 합의 도출 관행 대신 승자독식이 뚜렷해졌다. 정치인들은 대중의 분노를 본인의 경력을 쌓는 데 이용했고 자신들을 공화국보다 우선시했다. 이제 로마에는 정치 폭력이 자주 등장했으며 곧 일상화했다. 급기야 내전 양상으로까지 번졌다. 이런 가운데도 공화정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넜다. 공화국에 대한 공개 반란에 나선 것이다. 원로원의 지지를 받았던 라이벌 폼페이우스를 제거하고 인사권 등 전권을 장악한 카이사르는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공화정을 유지했다. 카이사르는 스스로 왕이나 황제를 칭하지 않았을 뿐이지 거의 제왕이나 다름없었다. 공화정 수호파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기원전 44년 3월 카이사르를 암살했지만 정치적 공백기에 로마엔 평화와 자유 대신 대혼란이 찾아왔다.
카이사르 사후 로마엔 공화정 체제 아래 잠시 삼두정치가 도래했다. 카이사르의 양아들이자 법적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간에 공동 정권이 합의됐다. 삼두정치 만료 후 옥타비아누스는 월등한 힘을 바탕으로 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제거하면서 기원전 30년 유일 권력자가 됐다.
옥타비아누스가 보장해 준 ‘전쟁에서 해방된 자유’는 로마인들이 오랫동안 소중히 여긴 공화정의 자유는 아니었지만, 기원전 1세기의 내전 이후에는 많은 사람이 과거의 자유보다 더 가치 있게 여겼다. 시민들은 절대 권력자가 된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선사하고 공화정을 기꺼이 포기하면서 일인 지배 황제를 받들어 모셨다. 정치적 자율성이라는 자유를 독재가 제공하는 안전과 맞바꾼 셈이다. 공화국이 애초 의도대로 작동하지 못했을 때 시민들은 망가진 공화국의 혼돈 대신 독재적 지배의 안정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책은 선명하게 알려준다. 어떤 공화국도 영원하지는 않다. 공화국 시민들이 원할 때까지만 유지될 수 있다.
힘겹게 쟁취해낸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제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로마의 공화정과 민주주의 붕괴 과정을 정밀하게 재구성한 이 책을 잘 탐독하면 반면교사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한경환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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