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과 태국이 공존하는 도시, 필리핀 마닐라에서 400년 역사를 만났다

김현지 기자 2024. 12. 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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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고대 석조 요새, 성벽, 지하 감옥...‘올드 마닐라’의 풍경
긴 크리스마스 연휴, 방콕 비견되는 도심 속 호텔의 루프탑 야경도

(시사저널=김현지 기자)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오래된 도시, 인트라무로스(Intramuros, 스페인어로 '성 안에서'라는 의미) 구역으로 가면 산티아고 요새를 볼 수 있다. ⓒ시사저널 김현지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도시 파사이에서 북쪽으로 약 9km를 갔다. 갓 지은 듯한 신축건물, 고층 빌딩 등을 지나 이와 대비되는 풍경이 펼쳐졌다. 역사의 흔적이 드러나는 성벽이 보인다. 성인 키의 배 이상을 크게 웃돌 정도로 보인다. 짐작으로만 6m 높이로 보인다. 오랜 시간을 견딘 듯, 벽돌 일부는 깨진 모습이다. 그러나 켜켜이 쌓인 돌은 단단한 성벽을 이루고 있다. 16세기에 만들어진 산티아고 요새로 들어서는 길이다. 성벽 앞에 흐르고 있는 작은 물줄기는 유럽의 한 마을에 온 착각마저 들게 했다. 이곳은 필리핀 역사가 담긴 공간, 인트라무로스(Intramuros, 스페인어로 '성 안에서'라는 의미)에서 가장 북단에 있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오래된 도시, 인트라무로스(Intramuros, 스페인어로 '성 안에서'라는 의미) 구역으로 가면 산티아고 요새를 볼 수 있다. ⓒ시사저널 김현지

'역사의 도시' 인트라무로스로의 초대

필리핀을 설명할 때면 스페인을 빼놓을 수 없다. 스페인은 지난 1565년 필리핀을 정복했다. 인트라무로스는 300여년 동안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산물이다. 약 3.4km에 달하는 성벽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1593년 만들어진 산티아고 요새는 스페인 식민 시절 군사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지금은 한적한 공원처럼 시민들이 보고, 듣고,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바뀐 모습이다. 성벽을 따라 올라가면 파시그강(江)을 볼 수 있다. 파시그강은 수도 마닐라를 가로로 가로지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남긴 상처의 역사도 남아 있다. 산티아고 요새 내에 있는 지하 감옥이 대표적이다. 화약과 무기 보관소로도 이용됐던 지하 감옥은, 무고한 필리핀 사람들을 억압한 장(場)으로도 활용됐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일본의 악행이 본격화하면서다. 일본은 스페인이 군대 기지로 썼던 지하 감옥을 '포로 고문'의 장소로 삼았다. 필리핀은 스페인의 지배 이후 미국(1898년)과 일본(1942년)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산티아고 요새에 있는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는 입구. ⓒ시사저널 김현지
일제의 만행이 담긴 '마닐라 대학살' 당시의 기록들. ⓒ시사저널 김현지

그때의 기록은 참혹하다. 평지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지하 감옥으로 통하는 좁은 문이 나온다. 성인 여성 한 명이 비좁게 들어갈 정도다. 습기 가득한 공기를 뚫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건 희생자들의 사진. 이제는 기록으로만 기억되는 이들의 생전 모습은 적나라했다. 피를 흘린 채 누워 있는 이들 중에는 성인만이 있지 않다. 다섯 살도 채 되지 않았을 아이의 왼쪽 허리는 붉게 물들어 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마닐라 대학살', 그때의 현장이다.

아픔의 역사에는 늘 국민 영웅이 있다. 필리핀의 경우 호세 리살이 그렇다. 그는 식민 통치 철폐 등을 주장하다 공개 처형된 인물이다. 호세 리살의 동상은 성벽을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보이는 리살 공원에 있다. 공원을 거닐던 필리핀 사람들이 호셀 리살의 동상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만 봐도, 이 나라에서 그의 상징성을 가늠케 했다.

16세기 지어진 석조 요새, 발루아르테 데 산 디에고(Baluarte de San Diego)로 올라가면 탁 트인 도시 풍경이 펼쳐진다. ⓒ시사저널 김현지
16세기 지어진 석조 요새, 발루아르테 데 산 디에고(Baluarte de San Diego)로 올라가면 탁 트인 도시 풍경이 펼쳐진다. ⓒ시사저널 김현지

16세기 스페인 식민 시대 건축물서 풍기는 유럽 정취

유럽의 정취는 건축물로도 느낄 수 있다. 스페인 식민 시절 지어진 건축물은 당대의 분위기를 드러내는 듯하다. 16세기에 지어진 석조 요새, 발루아르테 데 산 디에고(Baluarte de San Diego)로 올라가면 탁 트인 도시 풍경이 펼쳐진다. 지난 풍파를 가늠케 하는 석조 요새는 원형 구조로 짜여 있다. 과거에는 방어 시설로 쓰였다고 한다. 현재는 잘 정돈된 정원으로, 사진 명소로도 유명하다.

산티아고 요새 성벽에서 남쪽으로 15분쯤 걸어가면 성어거스틴 성당(San Agustin Church)이 보인다. 건물 외벽은 일부 깨지거나 색이 바래진 모습이다. 그러나 단단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압도감을 준다. 이 성당은 스페인풍으로 설계된 최초의 바로크 양식 석조 건물이다.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기적의 성당'으로 불린다. 제2차 세계대전 폭격을 받을 당시 성어거스틴 성당만은 파괴되지 않아서다. 지진 등 자연재해에도 성당의 모습은 유지되고 있다. 이곳은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성어거스틴 성당 내부. ⓒ시사저널 김현지

성어거스틴 성당 오른편으로 길을 건너면 또 다른 유럽이 펼쳐진다. 필리핀에 살았던 스페인 귀족과 필리핀 상류층의 저택을 재현한 카사 마닐라(Casa Manila)다. 거리에는 3층을 채 넘지 않은 저층의 유럽풍 건물이 즐비하다. 카사 마닐라 3층 건물의 가운데에는 스페인 중정식 정원 파티오가 있다.

크리스마스와 화려한 야경도 있는 도시

필리핀의 시간은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도시의 화려함도 공존한다. 필리핀은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에 여행하기 좋은 나라로 알려진다. 필리핀에서는 가족과 함께 긴 휴가를 즐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매년 마지막 달에 있는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필리핀 사람들은 일찍부터 크리스마스 준비를 시작한다.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식 행사부터 길거리 공연 등은 '미리 만나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필리핀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반복되지만 기다려지는 선물과도 같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리조트에서의 행사도 화려해진다. 필리핀 사람들은 물론 해외 여행객이 자주 찾는 유명 특급 호텔, 솔레어 리조트는 특히 매년 크리스마스 행사를 진행한다. 지난 11월4일 오후 찾은 솔레어 리조트에서도 크리스마스 대형 트리 점등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솔레어 리조트 엔터테인먼트 시티 입구에는 6m 높이의 대형 트리 2개가 자리했다. 대형 트리는 고급 바(bar) 인근 등 리조트 곳곳에 설치돼 있다. 이곳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원 없이 느낄 수 있다.

솔레어 리조트에 마련된 크리스마스 대형 트리. ⓒ시사저널 김현지

그도 그럴 것이, 솔레어 리조트는 여의도 공원의 약 40% 크기에 달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지난 2013년 3월 석양을 바라볼 수 있는 마닐라 베이에 조성됐다. 압도적 규모 덕에 명품 브랜드 41개, 레스토랑 17개 등 수많은 업체가 입점해 있다. 각종 세미나와 연회가 열리는 그랜드볼룸, 뮤지컬과 콘서트 등 공연이 수시로 열리는 1740석 규모의 '더 시어터(The Theatre)' 등 문화 공간도 충분하다. 이날 점등식 행사에 세계적인 뮤지컬 배우 레아 살롱가가 등장했는데, 그는 '더 시어터'에서 크리스마스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곳은 포브스 트래블 가이드(Forbes Travel Guide)에서 8년 연속 5성급 리조트로 선정됐다.

여기서 자동차를 타고 북쪽으로 약 한 시간을 가면 태국 방콕의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마닐라 북동부 케손시티에 있는 솔레어 리조트 노스에서다. 솔레어 리조트 엔터테인먼트 시티가 공항 인근 복합리조트에 가깝다면, 솔레어 리조트 노스는 도심 속 호텔로 볼 수 있다. 지난 5월 문을 연 '신상 호텔'이다.

솔레어 리조트 노스의 스카이 바(Sky bar)에서는 새벽까지 이어지는 공연을 볼 수 있다. ⓒ시사저널 김현지

마닐라 북동부 케손시티에 있는 솔레어 리조트 노스의 스카이 바(Sky bar)에서는 특히 마닐라 시내를 감상할 수 있다. 이 호텔은 38층 높이로 지어졌다. 그러나 루프탑에 오르면 이보다 층고가 더 높게 느껴진다. 태국 방콕에 온 듯한 야경 속에서 스카이 바의 재즈 공연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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