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interview] 'K4리그→K리그1'까지...'인간승리' 김운 "그저 축구를 계속 할 수 있는 것이 즐거웠어요"(1편)
[포포투=이종관(안양)]
흔히들 프로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을 ‘하늘의 별 따기’라고 말한다. 1% 미만의 선택 받은 선수 만이 프로 무대를 밟기 때문이다. 1년 전, 29살의 김운 역시 ‘99%’의 선수 중 하나였다. 그러나 불과 1년 만에 모든 것이 180도 달라졌다. ‘프로 1년차’ 김운은 한 시즌 만에 K리그2를 뒤흔든 ‘슈퍼 조커’가 됐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또래보다는 다소 늦은 나이에 축구를 시작했고 피나는 노력이 동반됐다. 다행히 그가 흘린 피땀은 경기장에서 그대로 드러났고 매년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프로 진출은 무산됐고, 압박감은 해를 거듭할수록 커져갔다.
그럼에도 ‘오뚜기’ 김운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포포투’와 만난 김운은 당시를 되돌아보며 “그저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라며 웃어 보였다. 이제 프로 2년차에 접어드는 그의 얼굴엔 여유가 가득했다.
# 14살에 시작한 엘리트 축구, 끊임없이 노력했던 학창 시절
공 차는 것을 좋아했던 어린 소년 김운이 축구 선수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1학년부터였다. 또래 친구들보다 어린 나이에 축구를 시작한 만큼 격차는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 당시를 회상한 김운은 “다른 친구들은 리프팅도 잘 차고 하는데 나는 10개도 못했다”라며 웃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밤낮없이 축구에만 전념했고 매해 가파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명문’ 건국대학교에 진학했다. 본격적으로 성인 축구를 접하면서 겪은 어려움들도 있었지만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교 졸업을 얼마 안 남겼을 즈음, 한 프로 구단의 연락을 받아 입단을 앞두고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상황.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생하며 좌절을 맛봤다. 이후 이곳저곳 공개 테스트를 다니며 팀 구하기에 나섰으나 그를 원하는 팀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또래보다 다소 늦은 나이에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주말에만 축구 클럽에 가서 공을 차는 식이었다. 아무래도 늦은 나이에 축구를 시작했기 때문에 기본기에서 많은 차이가 났다. 다른 친구들은 리프팅도 잘 차고 하는데 나는 10개도 못했다(웃음). 많이 창피했고 수모도 많이 겪었던 것 같다. 그때 ‘지금은 내가 여기서 제일 축구를 못하지만 졸업할 때는 최고가 돼서 나가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새벽이나 저녁에도 훈련을 꾸준히 했고 코치님들이나 형들한테 많은 것들을 물어봤다. 그러다 보니 ‘나도 할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 졸업할 때는 당당히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고향 대전을 떠나 경기도로 올라왔다
이곳(대전)은 풀이 한정돼있다고 생각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수도권으로 올라오면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선수들이 오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신한고등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실제로 그런 것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면서 늘었다. 고등학교 진학 이후 실력이 제일 크게 올랐던 것 같다.
-고교 시절엔 어떤 선수였나?
당시 감독님께서 날 좋게 봐주셨다. 그래서 1학년 때부터 많은 기회를 얻었다. 신한고등학교는 공격적인 축구를 하던 팀이었다. 세 골을 먹혀도 네 골을 넣고 이기는 팀이었다. 공격수인 나에게도 자유롭게 역할을 맡기셨다. 그러면서 주변에서도 잘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으면서 성장했다.
-프로 구단의 제안은 관심이나 제안은 없었나?
당시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프로로 가는 선수들은 대부분 프로 산하 유스 팀 선수들이었다. 우리 또래 중에는 권창훈이 그랬다. 외에는 다 대학교를 진학하는 추세였다. 그래서 나 역시도 당연히 대학교를 진학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부모님도 그걸 원하셨다. 프로 진출은 대학교를 진학한 이후에 간다는 생각이었다.
-축구 명문 건국대학교에 진학한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꼭 좋은 대학교에 가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대학교만 잘 간다면 어느 정도 길이 확보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당시에 드래프트 제도가 없어지고 U-23 제도가 생기면서 취업의 문은 더 좁아졌다. 또 대학교는 성인 축구기 때문에 피지컬적인 요소들을 필요로 했다. 1학년 때 ‘내가 해오던 축구랑은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대학교 때도 감독님께서 나를 좋게 봐주셔서 많은 기회를 잡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선배들이 무서워서 주눅 들었던 것이 좀 아쉽다. 운동장 안에서만큼은 당차고 자신 있게 플레이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당시 이상윤 해설위원의 지도도 받았는데?
3학년 초에 (이상윤) 감독님께서 부임하셨다. 감독님께서는 항상 “공격수라면 수비수 한 명 정도는 쉽게 요리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특히 헛다리 스킬을 중요시 하셨다(웃음). 아스널 축구를 되게 좋아하시는 분이지 않나. 동계 훈련부터 그 축구를 연습했는데 실제로 대회에서 통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당시에 배웠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뚜렷하게 남는다.
-4학년까지 마치고 대학교를 졸업했다
사실 2학년 때도 프로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3학년까지 마치고 가는 것을 원했다. 또 4학년 때는 이미 프로에 가는 것이 결정되기도 했다. 9월쯤에 모든 것이 결정되고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11월에 또 한 팀에서 연락이 왔다. “네가 아는 분이 수석 코치로 오시는데 우리 팀으로 오는 것이 어떻겠냐”라고 제안하셨다. 그래서 마음을 돌려 '그 팀으로 가야겠다'라고 생각했는데 그분께서 오는 것이 무산되면서 완전히 백지화됐다. 그때부터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여기저기 공개 테스트를 다녔는데 2월 말까지 아무 진전이 없었다. 정말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졸업 이후엔 ‘나 이제 어디서 운동하지?’ 이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 절박한 심정으로 두드린 하부 리그
프로 구단의 부름을 받지 못한 김운의 선택은 K3리그 어드밴스(現 K4리그)였다.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학창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낸 그에게 하부 리그 무대는 너무 좁았다. 이적과 동시에 팀의 핵심으로 등극하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젊은 나이인만큼 프로 구단의 관심도 여전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프로 무대를 두드리지 않았다. “너를 정말로 원하는 구단으로 가라”는 부모님의 조언 때문이었다. 단계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택했다. 그렇게 이천시민축구단의 ‘에이스’ 김운은 1년 만에 내셔널리그(現 K3리그) ‘명문’ 경주한수원으로 향했다.
-대학교 졸업 후 이천시민축구단 유니폼을 입었다
졸업 이후엔 ‘나 이제 어디서 운동하지?’ 이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소속이 없다 보니 단체 운동을 할 곳이 없었다. 우선 내 소속부터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일 가장 낮은 리그에서도 내 경쟁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미련 없이 축구를 그만 둘 생각이었다. ‘딱 1년만 해보자’라는 생각이었다. 고등학교 때 코치님께서 (이천시민축구단 이적을) 도와주셨다. 또 사람 이렇게 죽으란 법 없이 열심히 하니까 득점왕도 하고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대학교 축구와는 또 달랐을 텐데?
피지컬적인 강도부터가 달랐다. 또 돈을 받고 하는 축구다 보니 치열함이 느껴졌다. 성인 리그에 대한 적응을 그곳에서부터 미리 하고 갔던 것 같다.
-생활적인 부분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나?
하부 리그다 보니 소득이 굉장히 적었다. 하지만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당시엔 승리·훈련 수당 정도만 받으면서 축구를 했는데 조금이라도 부모님께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여전히 프로 무대에 대한 갈망은 없었는지?
첫 시즌에 득점왕을 차지하면서 프로 팀에서도 나를 원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런데 또 기다려야 된다는 말을 들었다. 나도 그렇고 부모님께서도 그 말에 싫증이 나셨던 것 같다. 부모님께서는 “너를 확실히 원하는 팀으로 가라”라는 조언을 하셨다. 마침 경주한수원에서 제안이 왔고, 며칠 고민을 하다가 그 제안을 수락했다.
-(경주한수원) 이적 이후 곧바로 부상을 당했는데?
동계 훈련 때부터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의욕이 앞서다 보니 혼자 넘어지면서 갈비뼈 타박상을 입었다. 차라리 골절이면 붙을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데 타박은 통증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또 의욕이 앞서다 보니 통증을 안고 뛰었다. 그러니까 또다시 아프더라. 회복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직전 시즌의 기세가 좋은만큼 아쉬움도 컸을 것 같다
한 단계 더 높은 리그로 갔기 때문에 동기부여도 남달랐다. ‘의욕만 가지고는 안되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 개인적으로 성숙해졌던 시즌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복귀 이후의 기세가 나쁘지 않았다
시즌 개막 2~3주 정도를 앞두고 부랴부랴 복귀했다. 다행히 개막전에서부터 결승골을 넣었다. 여름에 부상을 당하면서 경기력이 떨어지기도 했는데 중요한 골들을 많이 넣었다. 그때 또 많은 관심을 받았던 것 같다.
-직접 느낀 K3리그 어드밴스와 내셔널리그의 차이점은?
경주한수원이라는 팀 자체가 프로 무대에 진출했다가 많은 기회를 잡지 못한 선수들이 오는 곳이었다. 그렇다 보니 선수 개개인의 기량이 출중했다. 레벨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기량 면에서 오는 차이를 확실히 느꼈다.
-경주한수원 생활이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2018시즌부터 충분한 기회를 받았는데 어딘가 모르게 잘 안 풀렸다. 특히 2019시즌은 정말 힘들었다. 이때까지 해 온 대로 축구를 했는데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이곳으로 차면 골이 들어가겠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완전히 통하지 않았다. 자신감을 많이 잃으면서 기회도 줄어들었다. 실수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것 같다. 그 시즌은 정말 힘들었다.
-군 문제 해결에 대한 생각도 했을 것 같다
부진을 겪고 난 이후 이천시민축구단으로 돌아가서 공익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던 찰나에 팀이 해체됐다. 고양 KH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잘 됐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당시 고양엔 고교 시절 코치님이셨던 배성재 감독님이 계셨다. 학창 시절부터 날 이뻐하셨다. 나 역시도 그때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또 당시 소문엔 프로에서 뛰던 선수들이 대거 이 팀으로 온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같이 축구를 해보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다
많은 분들이 잘못 알고 계신데 나는 MVP만 수상하고 득점왕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때 득점왕은 지금 충남 아산에서 뛰고 있는 (박)대훈이가 받았다. 마지막 두 경기까지 내가 (득점) 1위에 있다 보니 득점왕을 했다고 아시는 분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항상 짚어준다. “득점왕은 아니고 MVP만 받았다”라고 말이다(웃음).
-공익과 선수 생활을 병행하기 힘들었을 텐데?
맞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이것도 축구 선수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당시에 소방서에서 일을 했는데 내가 언제 또 소방서에서 일을 해보겠나. 거기서 ‘공무원들은 이렇게 생활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많이 배웠다. 오전 오후 모두 근무를 하고 저녁에 운동을 하는 삶을 살았지만 재밌었다.
-K3·K4리그를 뛰면서 얻은 것이 있다면?
프로와 세미프로는 체력적인 차이가 크다. 지금 K3·K4에서 뛰고 있는 동료들이 “확실히 프로는 달라?”라고 많이 물어본다. 50~60분까지는 큰 차이가 없을 수 있지만 그 이후에는 차이가 벌어진다. 또 팬들의 규모도 많은 차이가 있다. (아무래도 FC안양에 오면서 더 크게 실감할 텐데?) 맞다. 사실 모든 프로 구단들이 이런 팬들을 보유한 것은 아니지 않나. FC안양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2편에서 계속
이종관 기자 ilkwanone1@fourfourtw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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