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 시대의 과학자[김우재의 플라이룸](56)
2024. 12. 13. 15:00
2004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을 때, 나는 이공계 대학원의 박사과정에 있었다. 전국이 들끓었고 이전까지 정치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던 과학기술인들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며 시민으로서 당연한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고 있었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던 실험실 동료들이 하나둘 우리도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느냐며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한 재기발랄한 동료의 제안으로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모두가 지나다니는 계단 한복판에 ‘근조’라는 한자를 종이로 이어 붙여 크게 새겼다. 다음 날 아침 학교 게시판은 난리가 났고, 학교 당국은 바로 해당 글씨를 제거해버렸다. 학생은 정치에 관심을 두지 말고 학생의 본분을 다하라는 권유와 함께.
정치의 노예가 된 한국 과학기술
자연에 대한 보편적 이해를 추구하는 과학과 인류의 복지를 위한 기술발전을 추구하는 공학은 보편적 원리에 입각한다. 중력의 법칙은 국적과 성별을 초월해 보편적으로 작동하고, 스마트폰과 발전소 역시 국가를 초월해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할 뿐이다. 하지만 과학기술을 수행하는 과학기술인의 문화적 특유성은 국가별로 확연히 다르다. 벤저민 프랭클린처럼 과학자가 건국의 아버지이기도 한 미국에서 빌 게이츠나 일론 머스크 같은 엔지니어의 정치 참여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국가주의 이념 속에서 발전해온 동아시아 3국에서 과학기술인의 정치 참여는 낯선 일이다.
미국 과학자들은 공화당이 정권을 잡을 때마다 불안해한다. 연구개발비 삭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 과학자들처럼 대규모 연구개발비 삭감에 대해 말문을 닫고 가만히 있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아버지 부시(조지 H.W. 부시·미국 41대 대통령)와 아들 부시(조지 W. 부시·미국 43대 대통령)가 대통령이던 시절, 한국에 세미나를 오는 미국 과학자들 대부분이 슬라이드 마지막 장에 부시 부자의 연구개발비 삭감을 비판하는 그림과 문구를 보여주곤 했다. 캐나다에서 조교수 생활을 시작했을 때, 보수 정부에 의해 대폭 삭감된 연구개발 예산을 회복시키기 위해 캐나다 과학자들은 트위터를 이용해 여론을 만들어냈고, 정부를 상대로 협상을 시도해 국회와 정부의 움직임을 끌어냈다. 과학자의 목숨이 달린 연구개발비 삭감에 대해 개별 과학자들이 저항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시 캐나다에서 열린 한인과학기술인대회에 참석했던 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오지 않아도 될 캐나다까지 외유를 와서는 젊은 과학기술인에게 ‘정치에 관심 두지 말고 연구나 똑바로 하라’는 어이없는 꼰대질을 해댔다. 어쭙잖은 연설 후에 돌아가는 그에겐 큰 화가 나지 않았지만, 그 어이없는 연설에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현장의 과학기술계 리더들에겐 화가 났다. 언젠가 과학사 연구자 박성래 교수는 한국 과학기술인을 조선시대의 중인계급에 비유했다. 자신의 이익에만 충실하고 사회의 변화와 공익엔 관심이 없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한국 과학기술인은 중인이라는 의미다.
윤석열의 과학기술예산 삭감과 과학계 중인계급
박성래의 중인계급론을 듣고, 처음엔 화가 났다. 과학기술인이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 시간이 없었던 한국적 상황에서 박성래의 지적이 지나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게 20년 전의 일이다. 그렇게 20년이 지나고, 한국의 연구개발비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세계 1~2위를 다투는 시절이 왔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박성래가 지적했던 한국 과학기술인들의 중인의식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내란 수괴 윤석열은 계엄령 발동 이전에 헌정사상 최초로 연구개발비를 대폭 삭감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연구개발비가 삭감된 것 이상으로 심각한 것은 과학기술인의 미래를 꿈꾸던 수많은 학생이 희망을 버렸다는 것이다. 이 엄중한 사태 속에서 한국 과학기술계의 리더들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초유의 연구개발비 삭감을 작은 고통으로 봐야 한다는 망발을 하고 떠났고, 그의 과기정통부 산하에서는 무용 전공자에게 수백억원의 디지털 헬스 관련 연구비가 지급됐다. 한국 과학기술계의 대표단체라고 자부하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는 아무런 성명서조차 내지 못했다. 국가의 미래가 걸린 씨앗이 사라지는 와중에도 한국 과학기술계의 리더들은 여전히 중인의식에 사로잡힌 국가의 노예임을 여실히 증명했을 뿐이다.
황당한 연구개발비 삭감에 정면으로 저항한 것은 카이스트 출신의 젊은 대학원생이었다. 하지만 졸업식장에서 그는 이른바 ‘입틀막’을 당하며 짐승처럼 끌려나갔다. 카이스트 총장과 교수들은 이 사태에 대해 대통령과 정부에 제대로 된 유감조차 표시하지 못했다. 다행히 계엄이라는 비극적인 사태를 맞이하고 나서야 카이스트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있었다고 한다. 짧은 시국 성명서에는, “우리는 과학자의 진리 탐구와 민주 시민의 정의 추구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제야 한국 과학계는 과학자도 시민임을 깨달은 것이다.
저항하지 않으면 과학은 존중받지 못한다
이번 계엄 포고령에는 의사 집단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다. 한국사회는 지난 몇 개월 동안 의료대란으로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다. 윤석열은 자신이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의사 집단에 심각한 적개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의료인 계층 또한 조선시대에는 과학기술인 계층처럼 중인이었다. 조선이 망하고 근대가 시작되면서 의사라는 직업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했고, 이제는 한국의 상위권 학생들은 모두가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지경이 됐다.
한국 의사 집단과 과학자 집단의 가장 큰 차이는 저항의 여부에 있다. 의사들의 집단 저항을 정당화할 생각은 없다. 한국 의사 집단은 분명 이기적이다. 하지만 자기 권리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과학자 집단보다는 낫다. 여전히 이공계 대학 총장과 교수 중에 학생들에게 계엄과 탄핵 사태에 동요되지 말고 연구에 집중하라는 어이없는 꼰대질을 하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젊은이들이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려는 이 역사적인 시기에, 연구실에 틀어박혀 자기 연구나 했던 학생이 과연 미래에 자랑스레 이 나라의 주인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이 든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거리로 나갈 용기가 없다고 해서, 미래세대 과학자들조차 당당한 한국의 민주시민이 될 기회를 박탈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나라의 과학기술을 이끌어갈 그들이, 마음껏 윤석열을 비판하고 시민들과 함께하게 하라. 그것이 조국의 근대화에 기여하고도 노예 취급을 받는 과학기술계의 처참한 현실을 혁파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주간경향에서 직접 확인하세요. 해당 언론사로 이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