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어린 계엄령에 머뭇거린 그들의 '잘못된 복종'

이정현 평론가 2024. 12. 13.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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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커버스토리 視리즈
다시 열린 탄핵의 문 7편
디트리히 폰 콜티츠의 고뇌
전황 불리해진 히틀러의 명령
“파리의 모든 것을 파괴하라”
복종을 군인의 명예로 생각한
디트리히 폰 콜티츠의 선택
히틀러 명령 따르지 않고
파리의 역사와 문화 지켜내
불법 계엄령에 머뭇거린 사람들
그들이 읽어야 할 콜티츠 이야기

1944년 9월. 연합군은 파리 탈환을 앞두고 있었다. 히틀러는 프랑스 군정청 장관인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에게 하나의 명령을 하달했다. "파리를 파괴하라." 연합군의 승리 무드를 깨려는 시도였다.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군인의 명예로 알았던 콜티츠 장군은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그의 선택으로 파리는 파괴를 면했다. 콜티츠의 일화를 보며 광기 어린 계엄령에 머뭇거린 그들을 떠올린다.

12월 3일, 시민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무너졌을지 모른다. [사진 | 뉴시스]

1944년 9월 노르망디에서 악전고투를 거듭하던 연합군은 '팔레즈 전투'를 기점으로 파리 탈환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특히 드골 장군 휘하의 자유프랑스군 병사들의 사기는 절정에 달했다. 덩케르크(Dunkirk) 철수 이후 줄곧 꿈꾸던 조국 해방의 순간이 드디어 다가왔다는 생각에 그들은 한껏 고무됐다.

그러나 파리 해방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1944년 7월 벌어진 암살 시도 사건으로 히틀러는 악에 받쳐 있었다. 게다가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공세'로 동부전선이 붕괴 직전에 이르렀고, 독일군은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연합군이 파리로 다가오자 히틀러는 프랑스 군정청 장관인 디트리히 폰 콜티츠(1894 ~1966년) 장군에게 파리의 가스, 수도, 전력시설을 비롯해 문화유산과 관공서까지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괴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파리를 폐허로 만들어서 연합군이 만끽할 승리 무드를 반감하려는 의도였다.

전통적인 프로이센 명문가 출신의 군인 콜티츠는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군인의 명예로 여겼지만, 광기 어린 히틀러의 명령을 접하고 고뇌에 빠졌다. '패전은 이미 확실하다. 그런데 파리를 파괴하면서까지 버텨야 하는가. 전쟁이 끝난 후 유럽의 상징적인 도시 파리를 파괴했다는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자신의 부하들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콜티츠가 고뇌하는 와중에도 전투는 계속됐다.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 조직 중 가장 큰 세력을 차지한 것은 프랑스 공산당이었다. 프랑스 공산당은 전쟁 초기 독·소 불가침 조약이 유지되던 기간에는 침묵했지만,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나치 괴뢰정부인 비시정부(Gouvernement de Vichy)와 독일군에 맞서 저항운동에 나섰다.

1943년 독일이 63만명의 프랑스인들을 강제징용하자 프랑스인들의 반발이 거세졌다. 공산주의자 외에도 공화국 이념을 지닌 지식인들, 드골을 추종하는 민족주의자 등이 제각각 독립된 조직을 만들어 독일과 비시정부에 맞섰다.

프랑스 고위 관료 출신인 장 물랭(1899~1943년)의 주도 아래 레지스탕스 조직은 점차 통합됐다. 장 물랭은 나치에 체포·사살됐지만, 그의 죽음 이후 레지스탕스 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레지스탕스 조직들은 잡지를 발간하고, 라디오 방송으로 자유프랑스군의 소식을 알렸다. 독일군과 부역자를 암살하는 무장투쟁도 이어졌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에는 철도역과 무선송신소를 파괴해 독일군의 이동을 방해함으로써 연합군에 큰 도움을 줬다.

그렇지만 모든 프랑스인이 열망했던 파리 해방이 다가오자 레지스탕스 조직들은 다시 이념에 따라 분열됐다. 미군 휘하에 배속된 자유프랑스군이 파리에 먼저 입성하면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할 것을 우려한 프랑스 공산당은 자신들이 먼저 파리를 수복해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공산당이 무력투쟁을 전개하자 프랑스 공화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도 자유프랑스군의 입성을 도우려고 나섰다. 그들은 경쟁적으로 더 많은 구역을 차지하고자 했고 곳곳에서 독일군과 충돌했다. 파리 시내에서는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독일군은 여전히 강력했고, 레지스탕스를 압도했다. 레지스탕스가 궁지에 몰리자 이번에는 파리 시민들이 들고일어났다. 골목마다 시민들이 만든 바리케이드가 600여개나 쌓였고 레지스탕스와 일반 시민들, 독일군과 프랑스 경찰들이 뒤섞여 파리 시내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독일군의 피해가 늘어나자 분노한 콜티츠는 히틀러의 명령을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이미 수많은 지역에 폭탄이 설치된 상태였고, 명령 한마디면 파리는 철저하게 파괴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스웨덴 사업가 라울 노들링과 레지스탕스 지도자들이 협상에 나서면서 콜티츠의 생각은 다시 바뀌었다. 전투가 이어질수록 잃을 것이 더 많다는 사실에 동의한 콜티츠는 독일군의 안전한 철수를 조건으로 휴전에 합의했다. 공산당은 협상에 부정적이었지만, 파리 시민의 안전이 걸려 있었고, 독일군보다 무장이 빈약했기에 협상 결과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8월 25일 자유프랑스군이 입성하면서 파리는 해방됐다. 자유프랑스군 제2기갑사단은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를 통과하며 퍼레이드를 벌였다. 런던에 있던 드골은 곧바로 파리로 돌아왔고 열광하는 시민들과 함께 개선문을 거쳐 노트르담 성당까지 걸어갔다.

독일군 잔존 부대의 저항이 계속됐지만, 드골은 의연한 태도로 미사를 마쳤다. 그 모습은 프랑스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고, 드골은 자연스럽게 해방된 프랑스의 지도자로 각인됐다.

레지스탕스 운동을 주도했던 공산당은 해방 정국의 주도권을 빼앗겼지만, 종전 후 의회에서 다수당을 차지해 전쟁 중의 희생을 보상받았다. 그러나 독·소 전쟁이 시작한 다음에야 저항에 나섰던 이력과 소련 강제수용소 문제에 침묵해 격렬한 비판을 받았고, 점차 세력이 약화했다.

연합군의 포로가 된 콜티츠는 미국으로 호송돼 조사를 받았다. 콜티츠는 나치의 고위 장성임에도 파리를 온전히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면죄됐다. 그는 히틀러의 광기를 잘 알고 있었지만, 군인으로서 직분에 충실했다.

파리 탈환 후 환호하는 시민들. [사진 | Universal History Archive]

그는 생애 단 한번 명령에 불복종했고, 그 선택으로 파리는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전범'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그가 사망했을 때 프랑스군 고위 장교들과 레지스탕스 지도자들이 장례식에 참석해 파리를 구한 콜티츠의 선택을 기렸다. 콜티츠가 사망한 해에 프랑스의 르네 클라망 감독은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1966년)'를 만들어 한 사람의 고뇌가 파리를 지켜낸 과정을 기록했다.

2024년 12월 3일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치욕적인 사건으로 남을 것이다. 다행히 계엄령은 6시간 만에 해제됐다. 만약 계엄령이 지속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리고 북한이 날린 오물풍선을 빌미로 원점을 타격해 국지전을 유도하고 계엄령의 빌미로 삼으려 한 정황까지 드러났다.

정보기관과 군대 지휘관들의 반대와 일선 군인들의 머뭇거림, 국회를 둘러싼 시민들의 저항이 없었다면 우리가 애써 이룩한 민주주의는 참담히 무너졌을 것이다. 미친 명령을 거부하고 파리를 구한 콜티츠의 일화를 보며 '계엄의 밤' 당시 '불복'과 '의심'으로 친위 쿠데타를 막은 사람들의 선택을 생각한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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