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나무는 정든 동네와 함께 사라진대도 [임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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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동네가 늘 그렇듯이 재개발 지역에는 아찔하도록 키가 큰 나무가 집 마당에 심긴 경우가 많다.
대단지 아파트 정원에 관리하기 쉽고 혹독한 환경에 강한 한정된 종의 나무가 천편일률적으로 심긴다면, 재개발 지역에서는 오롯이 집주인의 취향에 따라 심은 나무를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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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동네가 늘 그렇듯이 재개발 지역에는 아찔하도록 키가 큰 나무가 집 마당에 심긴 경우가 많다. 대단지 아파트 정원에 관리하기 쉽고 혹독한 환경에 강한 한정된 종의 나무가 천편일률적으로 심긴다면, 재개발 지역에서는 오롯이 집주인의 취향에 따라 심은 나무를 즐길 수 있다. 어쩜 저리 많은 꽃을 피우는지 믿을 수 없는 목련나무, 얼룩덜룩한 멋진 나무껍질과 연꽃 같은 우아한 꽃을 자랑하는 모과나무, 향기에 취해 황홀한 기분을 맛보게 해주는 인동덩굴과 오동나무, 달콤한 꿀 향기를 풍기는 무화과나무 등 그 어느 아파트 정원에서도 보기 힘든 다양한 종류의 나무를 만나게 된다.
재개발 지역에서 만나는 큰 나무는 아쉽게도 ‘공덕동 식물유치원’의 구조 대상에서 제외되곤 했다. 뽑을 방법도, 힘도 없는 데다가 둘 곳도 없다. 나무는 뿌리째 뽑아 다시 심는 과정이 매우 어렵다. 많은 경우 이식한 후 새로운 장소에서 적응하기 힘들어 고사하곤 한다. 때때로 화분에 심겨 버려진 작은 나무를 발견하면 스쿠터에 실어서 데려가지만, 크고 웅장한 나무는 구조하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이런 상황을 식물 모임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털어놓았더니 ‘꺾꽂이는 어때요?’라는 해법이 돌아왔다. 일명 ‘삽목’으로 가지를 꺾어서 물에 담가두거나 흙에 묻어두어 새로운 뿌리를 내리는 무성생식의 한 방법이다. 친구 말대로 인터넷에 검색하니 생각보다 쉬워 보였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실제는 다르지 않을까?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두려워하던 나는 작은 원예 가위를, 친구는 커다랗고 날카로운 전지 가위를 들고 길을 나섰다.
무화과나무도 쓱싹, 버드나무도 쓱싹, 목련나무도 쓱싹! 그의 손놀림에 순식간에 나뭇가지가 도막 났다. 영양분이나 물 흡수를 잘하도록 줄기는 어슷하게 자르고 큰 잎사귀는 절반으로 잘라 뿌리내리는 데 힘을 쏟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나뭇가지 몇 개는 흙에 꽂고 몇 개는 뿌리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갈색 유리병에 꽂아두었다. 한 개만이라도 성공하길 바랐다. 유리병의 물이 줄어들면 채워주고 화분의 흙이 마르면 물 주는 것 외에 내가 할 일은 딱히 없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어느 날 초록색 싹이 가지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빼꼼 작은 연둣빛 손을 내밀며 기지개를 켜는 듯한 모습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성공이다!”
도전한 모든 가지에서 뿌리가 나진 않았지만, 다행히도 대부분의 가지에서 뿌리와 싹이 돋았다. 든든한 동료 덕분에 새로운 구조 방법을 알았다. 잘라낸 가지의 모체 나무만큼 거대한 크기로 다시 자라기까진 한참 먼 훗날의 이야기겠지만 첫발을 뗀 것이 뿌듯하다. 뿌리째 뽑아 구조하는 것 외에도 꺾꽂이라는 방법을 찾았으니 계속 시도하며 성공 확률을 높이고 싶다. 비록 누군가의 마당에서 사랑받으며 살던 큰 나무는 정든 동네와 함께 사라지더라도, 그 일부분인 나뭇가지에서 뿌리내린 작은 나무는 새로운 장소에서 그 사랑과 정성을 기억할 것이다.
백수혜 (‘공덕동 식물유치원’ 원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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