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북·러 군사 밀월에 흔들리는 한국 안보

이일우 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2024. 12. 1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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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전승절’에 북한군 초청… 한국은 우크라이나 무기 판매 요청 거부
11월 29일 방북한 안드레이 벨로우소프 러시아 국방장관(왼쪽)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오른쪽)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러시아 군사대표단 환영 공연을 지켜보고 있다. [뉴스1]
서양에서 가장 위대한 전략가로 꼽히는 프로이센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내 의지를 적에게 강요하기 위한 폭력 행위이자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세상의 자원은 유한한 반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에 집단·국가 간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런 갈등이 격화되면 반드시 무력 충돌, 즉 전쟁이 발발한다. 인류는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면서도 그 참상에 전율해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도 계속해왔다.

그래서 '손자병법'에서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부전승(不戰勝)을 최고로 쳤다. 손자는 "적이 감히 싸움을 걸어올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적의 의지를 분쇄하는 것(上兵伐謀·상병벌모)이 으뜸이요, 적의 동맹을 파괴하는 것이 차선(其次伐交·기차벌교)이며, 전쟁을 막지 못했을 때 싸워 이기는 것은 그다음(其次伐兵·기차벌병)"이라고 강조했다. 적이 싸울 의지조차 갖지 못하도록 만드는 전략이다.

"적의 싸울 의지를 분쇄하는 게 으뜸"

현대 정치학에도 '억지(deterrence)'라는 유사한 개념이 있다. 무기체계의 파괴력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진 오늘날 모든 위정자가 외교안보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녕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북한이다. 혹자는 대화로도 북한과의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북 포용 정책을 추진한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 시절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은 전례 없는 속도로 강화됐다. 이 같은 역사는 북한의 위협이 대화 정도로 관리될 수 있는 게 아님을 증명한다. 북한은 '국가'를 빙자한 통치 시스템으로 대다수 주민을 억압·착취하는 곳이다. 대량 살상무기로 주변국을 위협해 얻은 경제적 지원을 통해 김정은 일가 등 극소수 지배층만 풍요로운 삶을 누린다. 정상 국가가 아닌 범죄단체에 가까운 체제다.

북한의 목표는 단기적으로 대한민국을 위협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장기적으로는 대한민국을 집어삼켜 휴전선 이남 5000만 주민도 억압·착취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체제를 근간 삼은 대한민국이 이런 집단과 공존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따라서 대북정책은 '대화'보다 '억제'를 지향해야 하고 궁극적으로 '공존'보다 '소탕'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윤석열 정부가 보여준 외교안보 행보는 대화도, 억제도 포기하고 무위(無爲)로 일관한 실패라고 할 수 있다. 국제 정세 급변에도 이렇다 할 조치를 하지 않은 탓에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신의와 위상을 추락시켰고, 앞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안보 위협을 자초했기 때문이다.

11월 말 한반도에는 한창 전쟁 중인 두 나라의 국방장관이 연이어 찾아왔다. 11월 27일 루스템 우메로프 우크라이나 국방장관이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해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외교안보 최고위 인사들을 만났다. 우메로프 장관이 출국하고 하루 뒤인 29일에는 안드레이 벨로우소프 러시아 국방장관이 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을 찾았다. 이들은 김정은을 예방하고 북한군 최고위급 인사들과 회동했다. 러시아 국방장관은 김정은에게 내년 5월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이른바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 북한군 부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북·러 군사협력이 앞으로 어느 수준까지 격상될지 예의주시해야 한다.

우크라이나가 서울에 대통령 특사를 보내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이 공식 확인된 10월 중순이다. 북한군 참전에 대한 대응책을 공동 모색하자는 취지였다. 한국 대통령실은 북한군 파병이 확인된 10월 22일 "우크라이나에 공격용 무기를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과 러시아의 군사협력이 심화되는 가운데 전투 병력 파병을 '레드라인'으로 선언한 데 이은 메시지였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선 한국의 지원을 얻어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남 일 아니다

벨로우소프 러시아 국방장관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내년 5월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 북한군 부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진은 지난해 5월 9일(현지 시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열린 러시아군 퍼레이드. [뉴시스]
사실 한국은 선진국치곤 우크라이나 지원에 인색한 나라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미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러시아 간 대리전으로 확대됐다. 전선이 멀지 않은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발(發) 안보 위기를 절절히 체감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선 여전히 우크라이나가 치르는 전쟁을 먼 나라 얘기로 치부하는 이가 많다. 하지만 신냉전체제 격화 속 한국 입장에서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결코 남 일이 아니다. 74년 전 일어난 6·25 전쟁을 돌이켜보자. 당시 전투 병력을 파병한 16개국, 인도적 지원을 제공한 6개국 국민 절대다수는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이들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신생 우방을 방어하고자 기꺼이 군대를 보냈고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면서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블록의 집단 안보 시스템 덕에 멸망 위기를 넘겼고, 오늘날 번영을 구가하며 '글로벌 중추국가'를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나토 등 은인 같은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군사 지원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할 때 한국은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도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제 역할 하기를 얼마나 꺼리는지, 러시아 등 전체주의 국가들 눈치를 얼마나 많이 보는지 아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방한한 우크라이나 특사는 무기 무상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 대신 무기 판매를 요청했고, 각론에선 '방어용 무기'와 '살상용 무기'를 구분하는 섬세함도 보였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공습으로부터 인구 밀집 지역과 에너지 인프라를 지키기 위한 방어용 무기인 천궁 방공 시스템, 국지방공레이더, 천경 대포병레이더의 판매를 요청했다. 살상용 무기로는 K2 전차와 K9 자주포, K239 다연장로켓시스템 판매를 요청했다.

전쟁 장기화로 극심한 재정난을 겪는 우크라이나가 이 정도 규모의 무기 구매 의사를 밝힌 것은 미국과 유럽 등 서방 세계의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주요 7개국(G7)과 유럽연합(EU)이 동결한 러시아의 해외자산 약 3000억 유로(약 446조 원)의 이자 수익을 담보로 500억 달러(약 70조8000억 원) 대출을 받을 예정이다. 이 대출 원리금은 동결된 러시아 자산의 이자 수익으로 변제되기에 사실상 500억 달러를 무상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이와 별개로 EU는 향후 4년간 우크라이나에 차관 330억 유로(약 49조 원), 보조금 170억 유로(약 25조2600억 원)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우크라이나는 이 자금들을 최대한 활용해 내년 1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전에 최대한 많은 무기를 확보하려 애쓰고 있다.

서방, 우크라이나에 대규모 자금 지원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공습으로부터 인구 밀집 지역과 에너지 인프라를 지키기 위해 한국에 판매를 요청한 방어용 무기 천궁 방공 시스템. [방위사업청 제공]
그런데 우크라이나가 무기 지원이 아닌 구매 의사를 밝혔음에도 한국 정부는 그마저도 불가하다는 답변을 내놨다. 심지어 우크라이나 특사 방문 일주일 전에는 불곰사업으로 도입한 러시아제 장비를 굳이 '전투실험'으로 폭파하는 퍼포먼스까지 선보였다. 이들 장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 1순위로 꼽히던 무기다. 한국 정부는 우크라이나 특사에게 "국내법상 전쟁 중인 국가에 무기를 판매할 수 없다"는 입장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한국 정부 스스로 "한국산 무기를 구입한 국가에 전쟁이 나면 후속 군수지원이 불가능하다"고 천명한 꼴이다.

한국 정부는 지난 3년간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와 나토가 요청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거부했다.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가 우려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최근 들어선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이 '트럼프 변수' 때문에 불가하다고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을 비롯해 차기 미국 행정부 고위급 인사들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을 얘기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무기를 공급하면 한미 관계가 악화된다는 논리다. 이는 현재 한국 외교안보 라인 인사들이 얼마나 근시안적인지를 보여주는 궤변이 아닐 수 없다. 트럼프 당선인이 지명한 키스 켈로그 특사의 종전안에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평화 협상에 나선다면 미국은 무기 지원을 계속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또한 트럼프 당선인과 측근들은 동맹국들에 안보상 '역할 분담'을 강하게 요구해왔다. 자유민주 진영의 집단 안보 시스템 덕에 목숨을 건진 한국이 정작 다른 우방이 위험에 처했음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발을 빼려는 형국이다. 이 같은 모습이 다른 우방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한국 외교안보 당국자들은 생각지 않는 것일까.

무엇보다 한국 정부의 이 같은 무위(無爲)는 상병벌모와 기차벌교를 통한 억제 달성에 역행하는 반(反)안보적 작태다. 북·러 협력은 북한이 러시아에 재래식 무기와 병력을 지원하면 반대급부로 러시아가 첨단·전략무기 기술을 제공하는 형태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 최고위 관료들과 주요 싱크탱크의 분석도 이 같은 전망과 일맥상통한다. 새뮤얼 파파로 미국 인도태평양사령관은 최근 북한이 러시아로부터 받을 대가가 전략미사일과 잠수함 기술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북한이 러시아로부터 핵잠수함 기술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며 "탄도미사일을 장착한 북한 핵잠수함이 태평양을 항해하는 끔찍한 상황을 생각해보라"고 경고했다.

북한이 보내는 병력과 재래식 무기가 점점 늘어날수록 러시아에 청구할 계산서 목록도 길어질 것이다. 러시아는 전쟁 장기화로 현금 지불 능력이 크게 약화됐다. 결국 러시아가 북한에 줄 수 있는 반대급부는 북한이 간절하게 원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재진입이나 다탄두 각개목표 재돌입체(MIRV), 다탄두 기동성 재돌입 비행체(MARV) 혹은 핵탄두 탑재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실은 핵잠수함 기술일 것이다. 이들 무기체계 모두 한국이 가진 방어 시스템으로는 대응할 수 없다. 북한이 이런 전략무기들을 손에 넣는 순간 한국이 마주할 안보 위협은 이전과 차원이 달라진다. 당장 한국군을 직접 위협해 제압하거나 전략무기를 협상카드 삼아 미국 차기 행정부에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할 수도 있다. 어떤 시나리오든 한국에는 재앙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 케네디 결단 되새겨야

애초에 한국이 북·러 군사협력과 북한의 전략무기 역량 강화를 저지하려면 러시아를 압박했어야 한다. 가령 북·러 군사협력이 '레드 라인'을 넘을 경우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모스크바를 타격할 수 있는 현무-2B 미사일을 공급하겠다는 구체적 경고 말이다. 그 시점은 북한이 대러 무기 수출과 파병을 결정하기 전이어야 했다. 그랬다면 러시아의 전략무기 기술이 북한으로 흘러들어 대한민국 존망을 걱정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로버트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핵전쟁을 각오하고 소련 함대를 해상에서 막았다. 그 같은 결단으로 소련을 제압해 제3차 세계대전을 방지했다. 바로 지금 케네디 대통령의 판단이 후대에 어떤 평가와 칭송을 받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 무지(無智)·무능(無能)·무위(無爲)로 점철된 외교안보 노선을 대대적으로 쇄신해야 한다.

이일우 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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