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살 학생에게 내란죄 겁주고 성폭력”…국가책임 묻는다

김효실 기자 2024. 12. 12.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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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성폭력 피해자, 국가상대 첫 집단소송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등이 저지른 성폭력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냅니다. 5·18 성폭력 피해자들의 모임 ‘열매’는 서울중앙지법에 국가를 상대로 위자료 지급을 구하는 소송을 2024년 12월12일 제기할 예정입니다.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의 국가배상 소송은 꾸준히 이어져왔으나, 성폭력 피해자들의 집단소송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5·18 성폭력 피해는 2018년 김선옥씨의 한겨레 인터뷰를 통한 ‘38년 만의 미투’로 처음 공론화됐기 때문입니다. 한겨레는 지난 5일 소송 제기와 관련한 고민을 나눈 열매 모임 현장을 찾았습니다. 소 제기를 앞둔 열매 회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편집자
지난 9월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도서관 강당에서 ‘5.18 성폭력 피해자 증언대회 용기와 응답’이 열렸다. 이날 증언자로 나선 김선옥씨 등 피해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누나,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12·3 내란’의 밤, 광주광역시에 사는 강희숙(가명·75)씨는 모처럼 일찍 잠들었는데 심상치 않은 꿈을 꿨다. 꿈 속의 목소리는 44년 전인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 계엄군들에게 희생당한 시민들의 것이었다. 강씨는 당시 희생자의 몸에 낭자한 피를 닦고 총알을 빼내는 등 사망자를 돌봤다.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였다.

4일 새벽녘 꿈에서 깬 강씨는 텔레비전을 켰는데 뉴스에서 계엄군의 모습이 보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곧장 집에 있는 수건들을 가방에 넣고 택시를 불러 “도청”(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향했다. “혹시 다친 사람이 있으면 응급처치를 하려고 (수건을) 챙겼어.” 44년 전 계엄군에게 맞아 여러 장기가 파열되는 등 폭력의 후유증으로 몸 구석구석이 성치 않다. 그런데도 지팡이를 짚고 광장으로 향했다. “사람이 최대한 많이 모여야 해. 그래야 덜 다치고 죽어. 그래서 나도 갔어.” 이미 거리로 나온 사람이 많았다. 1979년 10월26일 선포된 비상계엄은 1년 넘도록 이어지다가 1981년 1월24일 해제됐다. 45년 만에 맞이한 비상계엄은 6시간 만에 해제가 선포됐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사람이 많구나 했어. 옆에 사람들이 있으면 든든해.”

다음날인 5일 강씨는 또 다른 “든든한 사람들”을 만나고자 광주광역시 화정동에 있는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로 향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등이 저지른 성폭력 피해자 모임 ‘열매’ 회원들이 이날 센터 2층 다목적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열매 회원인 강씨는 44년 전 목격한 사망자와 실종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수십 년 동안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함구해왔다. 수치심도 컸다. 2018년 김선옥(66)씨가 한겨레 인터뷰로 성폭력 피해 사실을 38년 만에 밝힌 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에서 다른 피해자를 수소문하며 강씨에게도 연락을 취했는데 수차례 조사를 거부했다.

강씨가 어렵게 조사에 응한 건 한 5·18 유관단체 관계자의 설득이 있어서다. 조사를 마친 강씨는 다른 피해자 15명과 함께 지난해 12월 조사위로부터 ‘진상규명 결정’을 받았다. 공권력의 임무 수행 과정에서 성폭력이라는 중대한 인권침해를 당한 사실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나는 너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개인별로 조사를 마친 피해자 가운데 10명이 올해 4월 처음 만난 뒤 넉달이 지난 8월, 참가자가 15명으로 늘어난 상태에서 모임 ‘열매’가 발족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폭력 피해를 증언할 ‘용기’를 내면서 서로가 서로의 ‘증언자’가 된 피해자들은, 함께 모인 자리에서 대중을 마주할 힘을 얻었다. 열매는 지난 9월30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5·18 성폭력 피해자 증언대회―용기와 응답’을 열었다. 피해자 최미자, 김선옥, 최경숙, 김복희씨가 공개 증언에 나섰다. 5·18 성폭력 피해자들이 300여명 앞에 얼굴과 이름을 공개한 채 나선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다른 열매 회원들이 같은 자리에서 공개 증언자들의 곁을 지켰다.

지난 5일 광주광역시 화정동에 있는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왼쪽) 2층 다목적실에서 ‘열매’ 모임이 열렸다. 김효실 기자

5일 열린 열매 모임은 증언대회 뒤 새로운 용기를 나누기 위한 자리로 마련됐다. ‘12·3 내란 사태’로 시국이 혼란해지며 모임이 미뤄질 뻔했지만, 44년 전에 그랬듯 움츠러들지 않기로 했다. 피해자 가운데는 1980년 전두환 등 헌정 질서를 파괴한 내란 행위자들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애쓴 과정에서 성폭력 피해를 당한 이들도 있다. 당시 정치적 관심이 큰 편이 아니었음에도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비겁하다, 이건 대학생들이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학생수습대책위원’ 활동을 한 김선옥씨도 그랬다.

김씨는 ‘내란’이란 단어로 뒤덮인 최근 뉴스들을 보며 과거를 다시 떠올렸다. “내란이 엄청 큰 죄인데, (1980년 당시) 24살 학생인 나에게 수사관이 내란죄를 뒤집어씌운다고 했을 때 느낀 공포가 얼마나 컸으면 그게 트라우마로 내 삶을 지금까지 지배해왔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래도 ‘12·3 내란 사태’는 우리사회 시민들에게 축적된 ‘민주적 역량’을 보여줬다. 열매 회원들도 많은 시민의 응답에 힘입어 다음 용기를 낸다. 5일 모임에서는 국가를 상대로 정신적 피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에 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나눴다. “12월12일, 45년 전 군사반란이 일어났던 내란의 시작일에 맞춰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려고 합니다.” 열매 회원들의 법률대리를 맡은 법무법인 율립 하주희 변호사가 이날 모임에 참여해 1시간 가까이 소송에 대한 설명과 질의·응답을 했다.

하 변호사는 “5·18 성폭력 피해는 전두환 등 내란 행위자들이 헌정 질서를 파괴한 광주 도심 시위 진압 작전 전개, 외곽 봉쇄 작전, 연행·구금·조사 과정에서 발생한 계엄군 등에 의한 불법행위이므로 국가 책임이 있다”고 했다. 국가배상법상 5·18 성폭력 피해의 국가 책임이 성립한다는 주장이다.

지난 5일 열린 열매 모임에서 하주희 변호사(오른쪽)가 국가 대상 소송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효실 기자

하 변호사는 또한 “국가폭력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생존해 있을 때 기본적 정의로서 실질적인 배상이 이뤄지는 것은 필수”라고 강조했다. 열매 회원들은 지난해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광주광역시에 보상 신청을 했지만, 적정한 피해 회복이 이뤄질지 장담할 수 없다. 기존 보상 기준이 성폭력 피해 특수성을 반영하지 못한 신체 장해 중심이어서다. 지난 9월 말에 연 증언대회 이후 추미애·전진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기존 법을 바꾸는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12·3 내란 사태’로 빠른 입법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열매가 열매를 맺을 때까지

조사위 보고서를 보면 계엄군 등은 총과 대검 등으로 피해자를 폭행·협박하거나, 상해를 입히며 성폭력을 했고, 군인 2명 이상이 가해자인 경우도 많았다. 강간, 강제추행, 성고문, 성적 모욕·학대, 재생산폭력(강간으로 인한 임신이나 유산, 구타·자상으로 인한 유산, 하혈, 자궁적출 등) 등 평시와 비교할 수 없는 폭력이 일어났다. 국가에 의한 폭력이기에 개별 가해자를 특정하기도 쉽지 않다. 5·18 성폭력 피해는 △군부독재와 결부된 국가폭력의 역사성 △성폭력 피해자를 ‘정조 잃은 여성’으로 비난하는 가부장적인 성차별 통념 △이러한 사회적 통념의 내면화로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여러 억압이 중첩돼 있다(윤경회, ‘5·18 성폭력 진상조사 결과와 남겨진 과제’ 참조).

이 때문에 피해자들이 겪는 사건 뒤 고통도 신체·정신적 후유증에 국한되지 않는 복합성을 지닌다. 조사위 보고서를 보면 모든 피해자가 사건 뒤 자살 충동을 느꼈고 대다수가 1회 이상 자살 시도를 했다. 직장과 학교를 그만두거나 가족의 강압에 못 이겨 서둘러 혼인해 고향을 떠나기도 했다. 가족·사회관계에서 2차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그날’의 기억이 생존자들의 일상에 도돌이표처럼 되돌아오듯, 5·18 성폭력 피해도 아물지 않은 채 피해자들의 삶에 축적됐다.

40여년 만에야 성폭력 피해를 증언할 수 있었던 피해자들에게 이번 소 제기가 또 다른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 이유다. 5일 모임에서 피해자 일부는 “승소가 확실치도 않은데 다시 피해 경험을 떠올리며 고통받아야 하는 소송을 포기하고 싶다”는 심정도 토로했다. 하지만 열매 회원 다수는 “배상이나 치유도 중요하지만, 아직도 성폭력 피해를 말하지 못한 피해자들이 우리보다 덜 어려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앞장서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들은 여전히 5·18 성폭력 피해를 겪고도 이를 말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많다고 믿는다.

지난 5일 열린 열매 모임에서 참가자들이 열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의미하는 시간을 기록한 피켓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효실 기자

‘5·18 성폭력 미투’의 문을 연 김선옥씨는 “이 모임(열매)이 갈수록 단단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며 “마지막엔 우리가, 진실이 이겼다는 걸 모든 사람 앞에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정조 관념이랄지 ‘몸을 짓밟혔다’는 데 대해서 정말 수치스럽게 생각해서 나부터도 (성폭력 피해를) 감추며 살아오면서 그 분노 때문에 몸이 암으로 힘든 것도 참고 살아온 그런 고통을 겪었잖아. 내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은 나처럼 아프고 병들지 않을 수 있게, 언제든 손을 잡아주고 싶어.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누구의 부끄러움도 없이 당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고 국가로부터 사과받고 치유 받을 기회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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