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응원봉’ ‘K-pop’으로 새로 쓰는 집회 역사
고가 아이돌 ‘응원봉’도 등장…“가장 빛나는 걸 가져오고파”
기성세대 응원도…“아픈 현실, 즐기면서 견뎌줘서 기특해”
(시사저널=정윤경 기자)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의 노래 ≪다시 만난 세계≫가 집회 시작을 알린다. 가사집 없이도 앳된 얼굴의 청년들이 떼창을 한다. 노래에 맞춰 형형색색의 콘서트 응원봉이 좌우로 흔들린다. '로제'의 《APT.》(아파트)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한다. 옆에 있던 기성세대들도 합류해 댄스곡을 따라 부른다. 가사를 모르는 이들도 '멋지다!'며 환호한다.
MZ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가 집회 문화를 뒤바꾸고 있다. 이들은 과거 엄숙주의를 벗어나 발랄하고 즐겁게 집회가 이뤄지도록 주도한다. 11일 오후 6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탄핵 구속 촉구 촛불문화제'에서도 이 같은 MZ세대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친구와 함께 집회에 참여한 정아무개씨(19)가 말했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집회에 참여했을 땐 솔직히 무서웠어요. 어린 마음에 무거운 분위기가 적응이 안 됐나 봐요. 지금은 모두가 집회에 나와서 웃고 있으니 무섭지 않아요. 날씨는 춥지만 사람들과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이젠 집회를 즐기고 있어요".
아이돌 그룹의 'LED 응원봉'도 눈에 띄었다. 꺼지지 않는 이러한 응원봉의 등장은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당시 김진태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현 강원도지사)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촛불은 촛불일 뿐, 바람 불면 꺼진다"고 말한 바 있다. 발언이 전해지면서 LED 촛불, 횃불 등이 집회에 속속 등장했는데, MZ세대는 한 발 더 나아가 알록달록한 LED 응원봉을 집회에 들고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돌 응원봉은 통상 5~6만원 정도로, 케이스까지 합치면 10만원에 달하는 고가로 알려진다. 서아무개씨(19)는 "가장 빛나고 귀한 걸 가져오고 싶었다"고 했다. 서씨는 "처음엔 아이돌 응원봉이 시위의 의미를 퇴색시킨다고 생각했는데, 소중한 걸 꺼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윤 대통령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며 "반짝반짝한 빛들이 대통령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자녀에게 응원봉을 빌려서 왔다는 부모 세대도 있었다. 이유진씨(58)와 심진숙씨(48)는 "딸에게 '포레스텔라' 응원봉을 빌렸다. 딸이 정말 아끼는 건데 조심히 다녀오라고 건전지도 새것으로 갈아 끼워줬다"며 "말도 안 되게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젊은 세대가 즐기면서 견딜 수 있는 힘을 가진 것 같아서 기특하고 고맙다"고 웃음 지었다.
이들은 복장을 통해 소신을 표하기도 했다. 응원하는 프로야구 선수의 유니폼을 입고 온 전아무개씨(28)는 "비록 프로야구가 3S 정책(1980년대 전두환 정부가 군사 독재로 인한 반발을 억제하기 위해 육성한 스포츠(Sports), 섹스(Sex), 스크린(Screen) 산업)의 일환으로 나오긴 했지만, 천만관중은 그런 것에 놀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왔다"고 강조했다.
민중가요 ≪불나비≫ 열창하기도…"젊은 친구들에게 감동"
8년 전 선배들의 '저항의 노래'였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게 된 이화여대생들의 감회도 새롭다고 했다. 23학번 황아무개씨(19)는 "노래를 직접 불러보니까 선배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며 "다시 부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다시 만난 세계≫는 평생교육 단과대학 설립을 반대하던 이화여대 학생들이 1600명의 경찰병력에 맞서 서로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부른 노래다. 이들의 항의는 '최서원(개명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지는 과정에서 그의 딸 정유라씨에 대한 이대의 특혜 의혹으로 번졌다.
이날 집회에서 K-POP만 울려퍼진 건 아니다. 1980년대 민중가요인 '불나비'를 다 같이 배우기도 했다. 사회자가 "MZ세대 여러분, 우리도 민중가요 배울 수 있죠? 선배들 사이에서 많이 불려졌던, 신나게 흔들면서 부를 수 있는 ≪불나비≫ 부를 준비됐나요?"라고 묻자 청년들은 "네!"라고 크게 환호하기도 했다.
이들은 서툴지만 또박또박하게 ≪불나비≫를 열창했다.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 밤이면 밤마다 자유 그리워. 하얀 꽃들을 수레에 싣고 앞만 보고 걸어가는 우린 불나비"라는 가사가 집회 현장을 가득 메웠다.
이정찬씨(53)는 "이 노래를 젊은 친구들과 함께 부르는 것 자체가 감동이고 고마웠다"며 "이전 세대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다는 사실을 젊은 친구들이 고맙게 여겨주는 것 같아 울컥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탄핵안 가결 각오한 용산과 친윤?…헌재 기각 기대하나 - 시사저널
- ‘내란죄’ 尹대통령 구속 임박?…옥중에서 직무수행 가능할까 - 시사저널
- ‘탄핵 이탈표’ 의식? ‘尹 3월 하야 로드맵’ 띄운 與, 속내는? - 시사저널
- 실체 드러난 ‘동남아 거점 3대 마약왕’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 시사저널
- ‘한동훈-박세현 관계’ 파고드는 野…“검찰, 내란수사 손 떼라” 왜? - 시사저널
- “제2의 전두환” “피의 복수 할 것”…‘성지’ 된 유승민의 예언 - 시사저널
- 지겹고 맛 없는 ‘다이어트 식단’…의외로 먹어도 되는 식품 3가지 - 시사저널
- ‘윤석열의 운명’, 4가지 퇴진 시나리오는? - 시사저널
- 겨울에 더 쉽게 상하는 ‘피부’…탄력 있게 유지하려면? - 시사저널
- 尹, 이번 주 운명 결판난다? 흔들리는 한동훈, 최후의 선택은 [김경율의 노빠꾸 정치] - 시사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