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만찬 참석한 기자가 남겨보는 비하인드 스토리 [2024 노벨문학상]
10일(현지시간) 청중 1300명의 시선이 몰린 ‘노벨 만찬(Nobel Banquet)’. 한강 작가는 8세 때 폭우가 쏟아져 처마 밑에 웅크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산수 학원을 다녀오는 길, 비가 내리자 건너편에도 처마 밑에 선 사람들이 보였다. 그건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며 “그걸 바라보며 깨달았다.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 ‘나’로 살아가고 있었다. 수많은 1인칭을 경험한 것”이라고 운을 뗐다.
깊은 울림을 주는 그의 수상 소감에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 만찬장이 울릴 만큼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국 언론 8곳만 초청받아
만찬 후 무도회로 막 내려
그래도 이날 만찬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시각, 청각, 후각을 ‘황홀경’에 빠뜨리는 종합 예술 퍼포먼스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만찬장 로비에 들어서니, 참석자 전체 명단과 좌석배치도가 인쇄된 64쪽짜리 소책자가 제공됐다. 하얀 바탕에 노벨 메달의 문양이 금색으로 각인된 책자였다. 1300명이 동시에 식사하기에 본인 자리를 찾기가 ‘미로’에 가까운데, 혼란을 방지하고자 노벨 재단이 아예 책자로 안내한 것이었다. 수십 명의 안내 직원들이 횃불을 밝히고 참석자의 동선을 안내하는데 이들은 모두 스웨덴의 대학생들이다.
테이블A엔 한강 작가를 포함해(좌석번호 A-72) 올해 노벨상 수상자,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 부부와 왕가의 후손들, 그리고 노벨 재단 주최 측이 앉게 된다. 과거 노벨상 수상자도 만찬 참석 시 ‘특급 대우’를 받는데, 이날 노벨문학상을 2019년에 받은 올가 토카르추크(A-9)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노벨상 124년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여성 노벨문학상 수상자란 공통점과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로지르는 문학’이란 분모를 공유한 한강 작가와 올가 토카르추크 작가는 반갑게 인사했다. 만찬의 핵심 인물인 칼 구스타브 16세 국왕은 정중앙 좌석인 A-22에 앉아 한강 작가와는 다섯 자리 떨어져 있었다.
그 가운데 메인 디쉬가 서빙되자 기자를 포함한 테이블은 ‘탄성’을 질렀는데 ‘폼 드 뷔(Pomme de Vie)’란 이름의 사과 브랜디가 들어간 소스가 그야말로 ‘천국의 향(香)’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다들 접시 앞에 코를 대고 킁킁거릴 정도였다.
‘노벨 디저트’로 불리는 역사적인 요리 역시 감탄을 자아냈다. 달게 절인 사과를 1mm 두께, 1cm 부채꼴 모양으로 썰어 겹친 모양이었는데 보기만 해도 귀한 예술품 같아 포크를 대기가 망설여질 지경이었다.
노벨 재단 근무 18년차인 레베카 옥센스트롬 언론담당 헤드는 “와인잔 하나가 900크로나(약 12만원)”이라며 “매년 이곳에 오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고 참석자들도 만족도가 높아 뿌듯하다”고 설명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저녁 식사’가 아니라 식사와 함께 진행되는 ‘디너 파티’다. 이날은 총 4번의 공연이 펼쳐졌다. ‘노벨 디저트’가 나오기 직전 40명의 셰프들이 불꽃이 타오르는 거대한 접시를 왼손에 받치고 2층 계단에서 줄줄이 내려오는 장면도 장관이었다. 이걸 ‘노벨 디저트 퍼레이드’라고 한다.
서빙 직원들은 모두 스웨덴 대학생들이며, 노벨 만찬 ‘아르바이트’는 그 자체로 권위가 높아 학생들도 경쟁률이 높다고 전해진다.
식사가 끝나자 다들 계단을 올라 2층에서 열릴 ‘노벨 무도회’로 향하면서, 한 사람당 1개씩 제공된 ‘노벨 초콜릿’을 주머니에 넣기도 했다. 실제 노벨 메달과 똑같은 6.6mm 크기로 만들어진 초콜릿이었다.
2024 노벨상 시상식 ‘1분 전’
좌중을 웃게 한 독특한 그 소리
시상식 개회 1분 전, 장내를 가득 메운 1500명 참석자는 침묵과 정적 속에서 2024년 노벨상 수상자들, 칼 구스타프 16세를 비롯한 스웨덴 왕족들, 그리고 귀빈 입장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때, 한 참석자가 다소 ‘독특한’ 소리를 내며 재채기(기침)를 하자 이 ‘돌발상황’은 누군가의 웃음으로 이어졌다. 근엄한 표정이던 좌중은 긴장감이 확 풀어지면서 서서히 웃음이 번지더니, 참석자 전원이 폭소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영광입니다” 한국어 깜짝인사
노벨 만찬이 열린 스톡홀름 시청에선 ‘한국어’가 발음되기도 했다. 4시간의 만찬이 끝나갈 무렵,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한강 작가의 수상소감이 진행됐다. 마이크를 쥔 스웨덴의 한 대학생이 한강 작가를 소개한 뒤 마지막에 정확한 발음의 한국어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소개하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말했다. 언론 취재진을 포함해 현장을 지켜보던 한국인들은 한마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2019 노벨문학상 토카르추크
“난 한강의 소설을 사랑한다”
노벨 만찬 직후 열린 무도회는 영화에 나올 법한 풍경이 연출 중이었다. 서빙 직원 역할을 맡았던 스톡홀름의 남녀 대학생들이 춤을 추고 악단이 흥겨운 노래를 연주했다.
한강 작가는 다소 소란스러운 장내 옆에서 지인들과 환담하고 있었는데,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올가 토카르추크가 한강 작가를 찾아와 만나자 주변 사람들의 휴대전화 셔터가 터졌다. 무도회 후 밤 12시가 넘은 시각, 올가 토카르추크는 택시를 타지 않고 숙소까지 걸어갔다. 이때 우연히 기자와 마주친 올가 토카르추크에게 “3분만 대화할 시간을 달라”고 묻자 그는 “난 한강을 너무 사랑한다. 한강의 소설을 너무 사랑한다. 이 한마디로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웃으면서 스톡홀름의 밤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무대 위 감동을 주는 장면도 있었다. 올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존 홉필드 프린스턴대학교 명예교수는 건강이 좋지 않아 시상식 연단 위에서 두 개의 등산용 스틱을 손에 쥐고 걸었다. 입장 때 한 명의 직원이 부축하기도 했다. 이후 그의 의자 옆엔 등산용 스틱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본인에 이어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제프리 힌턴이 국왕으로부터 노벨 메달과 증서(노벨 디플로마) 받자, 존 홉필드 교수는 제프리 힌턴을 힘껏 축하해주러 손에 들렸던 등산용 스틱을 힘차게 놔버리고 고령의 몸으로 두 손을 모아 크게 박수를 치는 모습이 감동을 자아냈다.
스톡홀름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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