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깊은 불황 늪에 빠진 석유화학 산업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2024. 12. 11.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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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 다우공장 단지내의 SK종합화학 에틸렌 아크릴산(EAA) 설비. 연합뉴스 제공

우리 경제를 지탱해 주는 핵심 기간 산업인 석유화학 산업이 깊은 불황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기업이 경영진을 대폭 물갈이하고 비용 절감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역부족이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대규모 생산라인의 가동을 중단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LG화학은 알코올을 생산하는 나주 공장의 가동을 중단했고 4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롯데케미칼도 여수 제2공장의 일부 라인을 접기로 했다.

자칫하면 세계 5위의 원유 정제 능력과 세계 4위의 에틸렌 생산 능력을 갖춘 '화학 강국'의 위상이 심각하게 흔들릴 수도 있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기업에 있다. 획기적인 구조조정과 연구개발을 통해 석유화학 산업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은 온전하게 기업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정부도 석유화학 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기업의 '자율'만 고집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석유화학 산업의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필요한 모든 제도적·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화학산업에 대한 도를 넘은 사회적 거부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하는 일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 경기 침체와 중국발 공급 과잉

나날이 깊어지는 석유화학 산업의 불황은 복합적·구조적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로 글로벌 경기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극단적인 '미국 우선주의'를 강조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선 성공도 국제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공개적으로 예고하고 있는 높은 관세 장벽이 걱정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석유화학 제품의 중국발 공급 과잉도 심각하다. 중국은 그동안 국가 주도로 석유화학 산업에 대한 공격적인 시설 투자를 계속하고 있었다. 특히 나프타·에틸렌·프로필렌 등의 범용 소재의 자급율이 100% 가까이 늘어났다. 우리 석유화학 산업계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악재일 수밖에 없다. 거대한 중국 시장이 사라져 버린 것도 모자라 이제는 국제 시장에서 중국산 범용 소재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다.

실제로 글로벌 시장에서의 공급 과잉은 우리 기업에게 직격탄이 되고 있다. 석유화학 산업의 수익성 지표인 에틸렌의 국제 시세가 2022년 이후부터 손익분기점인 톤당 300달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에틸렌을 생산할수록 적자가 누적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특히 중국산 에틸렌은 국산보다 30% 이상 낮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앞으로 상황이 크게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중국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산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쏟아져 나올 중동산 범용 소재도 경계해야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는 사우디아라비아·중국·한국에 건설 중인 7개의 정유·석유화학 통합 공장을 순차적으로 가동해서 연 1150만톤의 에틸렌을 생산하게 된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양의 에틸렌을 생산하는 LG화학의 생산 능력 330만톤의 3.5배에 달하는 엄청난 물량이다.

결국 현재 걱정하고 있는 석유화학 산업의 불황은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간 산업인 석유화학 산업을 통째로 포기할 수는 없다. 길은 하나뿐이다. 부가가치가 낮은 범용 소재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부가가치가 높은 스페셜티 제품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좌고우면(左顧右眄)할 여유는 없다.

● 석유화학 산업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

우리의 화학산업은 1961년 충주비료로 시작되었다. 호남비료·영남화학·한국비료 등에서 비료용 요소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3년의 '중화학공업육성정책'으로 본격적인 석유화학 산업이 출발했다. 석유화학·철강·비철금속 등의 소재산업이 중화학공업육성 정책의 핵심이었다.

원유와 철광석 등의 천연자원도 없고 기술력과 자본도 없었던 우리에게는 무모하고 비현실적인 시도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과감하게 도전했고 크게 성공했다. 세계 수준의 품질·규모를 자랑하는 정유·화학산업·제철이 그 결과였다.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강의 기적'은 석유화학 산업에서 시작한 성과였다는 뜻이다. 

범용 소재산업은 전형적인 소품종·대량생산 업종이다. 품종은 많지 않지만 엄청난 물량을 쏟아내는 거대 장치산업이라는 뜻이다. 이윤은 크지 않더라도 시장의 규모가 충분히 큰 덕분에 넉넉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산업이다. 투자의 성과도 확실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일본의 소재산업도 역시 범용 소재에서 시작했다.

그런 석유화학 산업이 토사구팽(兎死狗烹)의 형편이 돼버린 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2011년 이명박 대통령의 '기름값이 묘하다'는 발언이 그 시작이었다. 정유사의 담합이나 폭리의 근거를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국제 원유·석유제품 시장에서 시작된 급격한 가격 상승의 책임을 정유사에게 떠넘겨버린 것이었다.

회계사 출신이라는 산업부 장관이 '휘발유의 원가를 밝혀내겠다'는 핑계로 걷잡을 수 없는 폭주가 이어졌다. 심지어 정부가 우리 정유사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던 일본 정유사의 경유를 수입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결과는 참담했다. 국가 경제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정유사에 대한 국민적 신뢰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추락해버렸다.

2011년의 '가습기 살균제 참사'도 화학산업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인식을 악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사회적 인식의 악화만으로 끝난 일이 아니었다. 2013년에 제정된 '화평법'과 '화관법'을 통해서 석유화학 산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제도화되었다. '국민 건강'과 '환경 보호'는 핑계였고 사실상 화학물질의 유해성·위해성을 앞세운 '화학산업 퇴출법'이었다.

경제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도 화학산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증폭시켰다. 우리나라 화학산업의 출발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요소'의 생산을 2012년부터 전면 중단해 버린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값싼 중국산 요소가 등장하면서 국산 요소는 경제성을 상실했다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논리가 힘을 발휘했다. 많은 양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요소 생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2021년의 요소수 대란은 단순한 경제 논리가 만들어낸 부끄러운 일이었다.

● 정부의 노력은 국민의 당위적 요구

정부가 핵심 기간 산업인 석유화학 산업의 위기를 먼 산 보듯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고 있는 석유화학 기업이 '자율적'으로 만족스러운 자구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도 자국의 핵심 산업을 지키고 첨단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바로 그런 시도다.

고부가가치의 스페셜티 제품의 중요성이 처음 제기된 것도 아니다. 1980년대부터 시작했던 정밀화학산업이 바로 그런 고급화·첨단화 시도였다. 정부도 상당한 투자를 했고 대기업도 협력했고 중소기업도 노력했다. 상당한 성과도 거둔 것도 사실이다. 울산·여수 등의 산업단지를 채우고 있는 기업들이 그런 스페셜티 제품의 생산업체들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정밀화학 산업 육성을 위한 노력이 만족스럽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2019년 일본의 아베 행정부가 촉발했던 반도체 소재 대란 이후에 허겁지겁 밀어붙였던 '소부장 육성 사업'이 작년의 국가연구개발 사업의 '카르텔' 발언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과학계 전체를 '약탈적 카르텔(떼도둑)'로 매도해 버렸던 것은 정밀화학 산업 육성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분명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카르텔 발언으로 크게 위축된 소부장 육성 사업은 내년에도 되살아나기 어려운 형편이다.

석유화학 산업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도 심각한 걸림돌이다. 석유화학 산업이 국민 안전이나 환경 보호에 부담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위험하고 더럽다는 이유만으로 기술을 거부하는 것이 언제나 능사일 수는 없다.

자동차도 위험하고 비행기는 훨씬 더 위험하다. 그렇다고 자동차와 비행기를 반드시 퇴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안전과 환경을 지키기 위한 기술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제도를 강화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석유화학 산업도 예외가 아니다. 화학산업의 요람이었던 유럽과 미국은 오래전에 정밀화학 산업으로 체질을 개선했다. 우리가 석유화학 산업으로 경제 성장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틈새시장을 놓치지 않았던 결과였다.

일본도 1990년대부터 정밀화학 산업으로의 도약에 성공했다. 일본이 반도체 생산에서 사용하는 고순도 플루오린화 수소(불화수소)의 시장을 틀어쥐고 있는 것도 그런 노력 덕분이었다. 요소의 생산을 완전히 포기해 버렸던 우리와 달리 미국과 일본은 여전히 고품질의 요소를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은 국민의 당위적 요구다. 기업의 '자율'은 핑계가 될 수 없다. 정밀화학 제품의 개발을 위한 국가연구개발 사업의 섬세하고 적극적인 투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화학산업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세계 최악의 규제로 평가되는 화평법·화관법도 폐지 수준으로 개정해야 한다. 위해성 정보를 환경부에 등록한다고 국민이 안전해지고 환경이 깨끗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물론 화학산업에 대한 규제를 모두 폐지해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산업현장에 대한 합리적인 안전 규제는 반드시 필요한 현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책무라는 사실은 아무도 거부하지 않는다.

석유화학 산업은 우리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핵심 기간 산업이다. 특히 원유를 정제하는 정유산업의 경우가 그렇다. 싱가포르 석유 시장과 연동되어 있는 기름값에 대한 국민적 불신도 서둘로 해결해야 한다. 정밀화학 산업의 특성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어떤 정밀화학 제품을 개발할 것인지의 선택은 온전하게 기업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정부의 획일적인 기획은 범용 소재에서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필자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에너지, 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2900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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