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 모종 200주, 더위에 메마르고 벌레에 초토화

정인환 기자 2024. 12. 11.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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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은 기가 막혔다.

지난 8월 중순 양주화훼단지에서 배추 모종 200주를 사는 호기를 부렸다.

방충망처럼 초토화되다시피 한 배추를 그나마 살린 것은 친환경 기피제였다.

약간의 불안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매주 조금씩 몸집을 키우는 배추를 보며 텃밭 동무들 모두 기대감에 들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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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들]경기 고양 편
총각무 크기의 무와 알배기 크기의 배추 ‘초라한 수확’…한 입 베어무니 ‘와, 달다’
2024년 11월24일 수확한 텃밭 김장배추는 대형마트에서 파는 ‘알배기 배추’를 연상시켰다.

시점은 기가 막혔다. 그래도 팍팍한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지독히도 미미했던 올해 김장농사 얘기다.

2023년 첫눈이 온 뒤 수확한 배추는 실한 편이었다. 모종을 9월 초에 낸 터라, 비닐까지 덮어주면서 1주일이라도 더 키운 게 주효했다. 얼어붙은 겉잎을 쳐낸 뒤에도 단단히 찬 속이 듬직했다. 2024년에는 예년보다 일찍 모종을 낸 것도 추위를 피해 제대로 키워내기 위해서였다.

지난 8월 중순 양주화훼단지에서 배추 모종 200주를 사는 호기를 부렸다. “벌레가 아무리 실컷 먹어도 충분히 남을 것”이라고 히히댔다. 오후에도 제법 해가 잘 드는 쪽으로 골라 밭 11고랑에 배추를 냈다. 듬직했다. 1주일 뒤엔 ‘영양제’(복합비료)까지 듬뿍 줬다. 이제 찬 바람만 불면 아무 문제가 없겠다 싶었는데, 기다리던 찬 바람은 모종을 내고도 한 달여를 불지 않았다.

더워도 너무 더웠고, 배추는 메말라갔다. 설상가상 좁은가슴잎벌레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방충망처럼 초토화되다시피 한 배추를 그나마 살린 것은 친환경 기피제였다. 기다리던 찬 바람이 불고, 이내 날이 차가워졌다. 배추도 제법 의젓해졌다. ‘최대한 키워보자. 속은 차겠지. 그래도 지난해보단 낫지 않겠어.’ 희망을 품었다. 약간의 불안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매주 조금씩 몸집을 키우는 배추를 보며 텃밭 동무들 모두 기대감에 들떴다.

기상청 중기예보를 보니, 11월 마지막주 중반부터 영하권 날씨가 이어진단다. 밭장이 동원령을 내렸다. 11월24일 낮 빨리 올 수 있는 동무 4명이 먼저 모였다. 전날 지역에 갔던 동무는 부랴부랴 상경 중이었고, 막내는 예배당이 끝나는 대로 달려오기로 했다.

무부터 뽑았다. 땅 위로 올라온 부분이 제법 ‘시장 무’처럼 보였던 무는 줄기를 잡아당기니 ‘쏙’ 하고 올라왔다. 땅속에 있던 부위가 모조리 오종종하다. 그나마 제일 잘 자란 녀석이 ‘시장 무’ 절반이나 될까? 나머지는 크다 말거나, 아예 총각무 수준이다. 씨를 두 봉지나 뿌렸는데, 종잣값은 되려나? 속 좋은 밭장은 “동치미 담그면 맛나것다”며 웃는다.

배추는 2인2조로 나눠 수확했다. 한 사람이 벌레가 다 먹어치운 겉잎을 손으로 펼쳐 밀어내면, 칼을 든 사람이 배추를 뉘어 뿌리를 잘라 거두는 식이다. 200포기 다 수확하는 데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간혹 속이 꽉 찬 게 없는 건 아니지만, 수확한 배추 대부분은 대형마트에서 파는 ‘알배기 배추’와 닮아 있다. 벌레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뒤늦게 도착한 두 동무는 “벌써 다 끝냈느냐”고 한 번 놀라고, 초라한 수확물에 한 번 더 놀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밭장은 채 크지 않아 수확을 포기한 돌산갓밭에서 계속 잰 손을 놀린다. “어따, 동치미에 넣어 담그면 맛나것다” 하면서.

모종을 200개나 내며 화려하게 출발했던 올 김장농사는 희비극으로 끝났다. 더위를 내다보지 못하고 일찍 모종을 낸 것부터가 패착이었다. 헛헛한 마음에 수확한 배추와 무를 물에 아무렇게나 씻어 베어 물었다. 와, 달다. “배추를 이렇게 맛있게 키웠으니, 벌레가 그렇게 꼬였지.” 동무의 말에 너나없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배추, 무를 갈무리해 나눈 뒤 한 해 뜨거운 햇살을 가려줬던 그늘막을 내려 평상을 덮는 것으로 올 농사를 마무리했다. 사흘 뒤 첫눈이 내렸고, 영하의 추위가 이어졌다. 수확 시기만큼은 ‘신의 한수’였다.

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세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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