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제왕적 대통령제와 87년 체제의 종언
결국 대통령 1인 못 막아
87년 체제의 가장 큰 약점은
제왕적 대통령제 그냥 둔 것
여소야대 분점 정부에선
대통령 실패가 곧 집권의 길
이번 기회에 바꾸지 않으면
12·3 사태 같은 불행 반복될 것
12·3 비상계엄 사태의 직접적 원인은 윤석열 대통령의 시대착오적이고 편집적 정치 인식이다. 하지만 이 사태는 얼굴이 여럿이다.
한국 보수의 이념적 위기상이 그 하나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담화와 포고문 1호에는 1987년 민주화 이전 반공 자유주의의 전형적 내용이 담겼다. 민주화 이후 한국 보수는 민주주의, 법치, 인권에 부합하는 자유주의 이념을 새롭게 정립하지 못했다. 실제로 12·3 사태를 지지하는 집회에서 한 연사는 “비상계엄 선포가 늦은 감이 있다” “계엄령이 잘못됐다는 모든 언론의 앵커부터 바꾸라”고 촉구했다.
갈림길에 선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또 다른 모습이다. 1945년 한국은 세계 최빈 약소국이었다. 지금은 세계 국력 순위 6위, 군사력 순위 5위다. 해방 79년 만에 선진국을 넘어 강대국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미 포브스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옳고,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따라갈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문제는 정치다.
마지막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상이다. 이번 사태로 한국 민주주의의 부끄러운 민낯이 여실히 드러났다. 하지만 ‘87년 체제의 취약성과 잠재력을 동시에 보여줬다. 대통령 한 사람의 허술한 도박에 “순식간에 군부 반란이 판치는 아프리카·남미의 후진국”으로 떨어졌지만, 또한 기적같이 순식간에 계엄을 해제했다. 그런데 국회 헌법연구자문위원회는 이미 2009년에 “기존 사고와 패러다임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도처에서 노정되어, 국가 시스템 전반에 걸쳐 헌법적 차원에서 재검토가 불가피해졌다”는 보고서를 냈다. 12·3 사태는 선을 한참 넘었지만, 87년 체제의 밑바닥에 오랫동안 잠재해 있었다.
탄핵만이 12·3 사태의 유일한 해법이라는 생각이 단견인 이유다. “지금은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제를 탄핵해야 할 때”다(윤상현 의원). 한국갤럽 3~5일 조사에 따르면, 유권자의 51%가 문제가 있는 현행 대통령제의 개헌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87년 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제왕적 대통령제다. 이 문제의 역사는 장구하다. 1948년 제헌 헌법부터 한국 현대 정치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대통령제를 채택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 해밀턴은, 대통령을 “모든 위협과 악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수호자”로 보았다. 국회의원 같은 범상한 정치가와 다르다. 대통령의 이런 탁월함이 공화국의 자유와 평등을 해치지 않으려면, 대통령 개인의 절제와 제도적 억제가 수반돼야 한다. 왕위도 거절하고, 임기 후 스스로 물러난 워싱턴 대통령이 그 전범이다.
하지만 한국 대통령들의 끝은 언제나 비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부, 박정희 대통령은 영도자였다. 이런 제왕적 권력은 먼저 개인을 부패시키고, 그것이 국가의 위기로 확대되었다. 87년 민주화 후에도 예외가 없었다. 87년 개헌 때 제왕적 권력을 온존시킨 게 큰 잘못이었다. 12·3 사태도 그 오랜 폐단의 산물이다. 국무위원 대부분이 계엄을 반대했지만, 대통령 1인의 결정을 막지 못했다.
87년 체제의 또 다른 문제는 이중적 정통성(dual legitimacy)이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과 국회는 주권을 나눠 갖는다. 양자는 대화와 타협으로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 하지만 양자가 맞서 평행선을 달리면 국정이 마비되는 비토크라시(vetocracy)가 만성화된다. 그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민주적 원칙은 없다. 그래서 독재의 유혹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본능에 가깝다. 1952년 6·25전쟁의 국난 속에서 부산 정치 파동이 벌어진 이유다. 1987년 이전 한국 국회는 대통령의 시녀로 전락했다. 민주화 이후 국회는 비로소 주권의 한 축으로 부활했다. 그리고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성공하면서, 대통령의 생명도 끊는 국가 최고 권력에 등극했다.
민주화 이후, 국회는 만성적 입법 교착에 시달리고 있다. 여소야대의 분점 정부에서는 국정 운영이 거의 불가능하다. 입법이 국정을 돕는 수단이 아니라, 나라를 찌르는 흉기가 되었다. 대통령과 정부의 실패가 곧 집권의 길이기 때문이다. 22대 국회의 탄핵 남발은 그중 악성이다. 정부는 사실상 마비 상태고, 삼권분립조차 위태롭다. 그런데도 대통령에게는 국회 해산권이 없다. 윤 대통령은 거부권으로 가까스로 버텼다. 12·3 사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대통령의 절망감도 이유가 있다.
87년 민주화는 민주주의의 끝이 아닌 시작일 뿐이다. 87년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12·3 사태 같은 불행이 반복될 것이다. 임기 단축을 포함한 개헌으로 한국 민주주의를 살려야 한다. “좋은 위기를 낭비하지 말라.”(Never waste a good crisis.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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