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조은아]佛 성탄마켓에 日라면 등 이색 먹거리… “지갑 얇아진 소비자 잡자”
전통 성탄 마켓에 ‘암벽 등반’… 라면 등 다국적 음식도 추가
‘낮잠 장소’ 있는 이색 시장도… 獨에서 시작된 ‘변신의 역사’
최근 경제난에 차별화 모색… 쇼핑객은 임금 적어 지갑 닫아
해마다 연말이 되면 프랑스 전국 곳곳에 들어서는 크리스마스 마켓의 풍경이 올해 다소 달라졌다. 프랑스 전통 공예품이나 크리스마스 장식품보다 야식용 간식이 유독 많아졌다. 예전엔 뱅쇼(따뜻한 와인)나 크레프, 초콜릿 등 프랑스 전통 음식이 다수였지만 최근엔 독일 소시지, 일본 라면, 인도 카레 등 다국적인 메뉴가 늘어난 점도 눈에 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정치적 혼란, 경기 침체 장기화 등이 겹쳐 성탄절 특수마저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 전통보단 즐길거리, 먹거리 중시
올해 성탄절 마켓의 특징은 프랑스 전통 문화와 크리스마스 본연에 충실했던 과거와 달리 다국적이고 상업적인 면모가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크리스마스 마켓은 주로 도시를 대표하는 ‘광장’에서 열렸지만, 이제 가족 단위 방문객이 편하게 찾는 박물관이나 백화점 등으로 마켓이 확산됐다.
마켓이 여기저기 늘어나면서 저마다 의미와 개성을 강조하려 애쓰는 모양새다. 파리 중앙 시테섬에 위치한 노트르담 대성당 앞 크리스마스 마켓은 특히 올해 그 의미가 남다르다. 2019년 4월 화재가 발생한 뒤 약 5년 8개월 만인 7일에 노트르담 대성당이 재개관했기 때문이다. 올해 이 시장은 프랑스의 상징인 대성당의 재개관을 축하하며 축제 분위기를 띄우려는 분위기가 물씬하다.
원래 크리스마스 마켓은 공예품 판매장이 주류였지만 올해는 먹거리 잔치를 벌이듯 시식 구역이 늘어났다. 운영 기간도 예년보다 1주일 늘린 27일이다. 주최 측은 자폐 청소년을 지원하는 협회 ‘메종 아르모니아’와 협업해 시장 수익의 일부를 기부하기로 했다.
상업적 성격이 짙어진 크리스마스 마켓이지만 때론 사회적 캠페인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파리 18구에서 이달 7, 8일 열린 ‘그랑드 크리스마스 마켓’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며 성소수자(LGBTQ+)를 지원한다는 목표도 내세웠다. 해당 마켓은 시민들이 편안하게 낮잠을 즐길 수 있는 장소도 제공해 큰 관심을 받고 있다.
● 나치는 정치적 선전 도구로 삼아
유럽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이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오랜 세월과 역사를 겪으며 추운 연말에 유럽인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기능을 해왔다. 13세기 독일의 ‘성 니콜라스 시장’이 기원으로 추정되는 크리스마스 마켓은 두터운 신앙과 선행으로 유명한 성 니콜라스 주교(270∼343)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초기엔 종교적 성격이 강했던 크리스마스 마켓은 실제로 가톨릭 포교의 장과 같은 역할이 주된 임무였다. 실제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알려진 드레스덴 크리스마스 마켓은 외진 곳에 떨어져 살던 농민들을 성당에 불러 모으려는 의도가 짙었다. 이후 프랑스를 포함해 유럽 전역에서도 이런 문화가 확산됐다.
크리스마스 마켓이 본격적으로 커진 건 19세기 초 산업혁명의 영향이 컸다. 도시가 커지고 시민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덩달아 소비력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내셔널지오그래픽에 따르면 독일 수도 베를린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1805년 303개였으나 1840년에 두 배가량인 약 600개로 증가했다.
1930년대 나치 독일은 크리스마스 마켓을 정치적 도구로 삼기도 했다. 당시 아돌프 히틀러는 크리스마스를 독일 유산을 찬양하는 민족주의 휴일로 삼았다. 이에 따라 크리스마스 마켓의 장식은 표준화됐고, 독일산 제품만 판매됐다. 당시 정부의 강력한 지원으로 1936년 베를린 크리스마스 마켓에는 약 200만 명이 몰리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치가 패망한 뒤 사라지는 듯했던 크리스마스 마켓은 1960, 70년대 경제 호황과 소비주의 확산으로 다시 호황을 맞았다. 프랑스의 경우엔 1990년대까진 독일과 국경 지역인 프랑스 알자스 지역을 중심으로 섰지만 2000년대부터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됐다. 현재 프랑스는 유럽에서 독일에 이어 크리스마스 마켓이 두 번째로 많은 국가다.
● 올해 佛 성탄 쇼핑, 8만 원 줄 듯
역사적으로 정치 종교적인 이유로 변모를 거듭했던 크리스마스 마켓은 최근엔 다른 이유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바로 경제 침체다. 경기가 안 좋아 장사 자체가 어려워지다 보니 성탄절 마켓 역시 영향을 받는 것이다. 차별화되고 이색적인 시장들이 늘어난 것도 이 때문이다. 전통적인 방식으론 매출이 줄어 고전하다 보니 새로운 크리스마스 마켓을 키워 매출 반등의 기회로 삼으려는 분위기다.
실제로 프랑스는 소비가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소비자 관련 업체인 코피디스와 CSA리서치가 지난달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인들은 올해 크리스마스에 497유로(약 74만7900원)를 지출할 계획이다. 1년 전보다 52유로가 줄어들었다. 여론조사기관 이포프의 설문조사에서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할 수 없을까 봐 걱정’이라고 답한 비율이 33%나 됐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위해 다른 구매를 포기할 것’이라고 답한 이들도 49%나 됐다.
꼭 성탄절이 아니어도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는 분위기는 뚜렷했다. 프랑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8월∼2024년 8월 지출 규모는 부진한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칸타에 따르면 올여름 가계의 평균 구매 품목은 11개뿐이었다. 팬데믹이 확산됐던 2020년에도 14개였던 점을 고려하면 심각한 경기 위축인 셈이다.
소비자들이 지출을 줄이고 필수적인 소비에만 집중하며 엥겔계수(생계비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율)도 올라가고 있다. 할인마트 리들 프랑스법인의 미셸 비에로 부회장은 현지 매체에 “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물가 위기 이전에는 식품 외 제품이 매장 매출의 10%를 차지했지만 요즘은 6∼6.5%가량”이라며 “최근엔 제품 가격이 10유로(약 1만5000원)를 넘으면 잘 팔리질 않는다”고 설명했다.
프랑스는 최근 들어 물가는 다소 진정되고 있는 국면인데도 시민들은 여전히 소비를 꺼리는 분위기다. 일각에선 물가가 워낙 임금보다 훨씬 빨리 올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란 해석이 나온다. 물가 상승세가 최근 둔화되긴 했어도 임금이 천천히 올라 소비 여력은 여전히 현저하게 떨어져 있단 것이다. 프랑스 경제관측연구소(OFCE)의 마티외 플란 부국장은 “2021년 중반부터 2024년 중반까지 물가는 평균 13% 올랐지만, 급여는 11% 증가했다”며 “결국 실질임금은 2% 감소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크리스마스 마켓도 이런 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된 셈이다.
조은아 파리 특파원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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