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망보험금은 손주 학비로”…‘보험청구권 신탁’ 시장 열려

김회승 기자 2024. 12. 9. 14:2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상 쓸모있는 경제 정보
게티이미지뱅크

서울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김아무개(66)씨는 자신의 사망보험금 3억원을 최근 생명보험사에 맡겼다. 손자녀 3명의 대학 학비로 사용되길 원해 보험금청구권 신탁 계약을 맺은 것이다. 손자녀 3명이 스무살이 되는 시점에 1억원씩 지급하는 구조로 설계했다. 김씨는 “자식들한테 맡기면 어찌 될지 모르니 생전에 미리 정해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사망 보험금을 생전에 미리 관리하는 게 가능해졌다. 금융당국이 지난달 사망보험금 청구권을 신탁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개정하면서다. 이전에는 보험 계약자가 사망하면 보험사가 수익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하고 계약이 종료됐지만, 사망보험금 청구권 신탁을 이용하면 보험금이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지급될지 생전에 미리 설정할 수 있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최근 고령화가 심화하고 축적된 가계 자산이 많아져 규정을 개정했다”라며 “직계존비속의 생애 주기에 맞춰 보험금을 지급할 수 있고, 연락을 끊고 살던 상속인이 보험금을 달라고 나서는 갈등 상황도 일부 방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망보험금 ‘생전에 내 뜻대로’ 설계

신탁은 일정한 목적에 따라 재산 관리와 처분을 금융회사에 맡기는 제도다. 계약은 재산을 맡기는 위탁자와 관리하는 수탁자, 이익을 전달받는 수익자로 구성된다. 사망 보험금은 죽은 뒤에 나오기 때문에 신탁제도의 장점이 극대화되는 자산이다.

가입자들은 어떤 조건을 달아 금융회사들과 신탁 계약을 맺고 있을까? 재산 관리 경험이 부족한 미성년자 또는 장애 자녀 등이 보험금을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지원하기 위해 분할 지급하는 사례가 많다는 게 보험사들의 설명이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이아무개(57)씨는 사망보험금 6억6000만원이 22살 지적장애 자녀를 위해서만 사용되길 원해 삼성생명 신탁에 가입했다. 사망보험금 수령일에 일단 5000만원을 자녀에게 일시 지급하고 이후 10년간 매달 300만원, 그 이후에는 매달 250만원씩 지급하도록 설계했다. 교보생명의 1호 계약자는 말기 암 판정을 받은 40대 여성이다. 초등학생 자녀를 위해 설계했다. 사망보험금 6억원을 9년간 매달 300만원씩 지급하고, 대학에 입학하는 해에 1억원, 졸업하는 해에 2억원을 각각 지급하는 조건이다. 흥국생명의 1호 계약자는 50대의 기업체 임원인데, 그는 사망보험금 5억원을 자녀가 40살이 되기 전까지는 이자만 지급하다가 40살이 되는 해에 절반, 45살이 되는 해에 나머지 절반을 지급하길 원했다. 자녀가 지출 부담이 큰 생애 주기에 금전적 도움이 되길 원했기 때문이다.

소액 사망 보험금 가입자도 많다고 한다. 삼성생명의 경우, 보험금청구권 신탁 상품의 3억원 미만 가입자가 전체의 62%를 차지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자녀의 대학 졸업, 결혼 등 유가족의 의미 있는 시점에 고인을 기억할 수 있는 용도로 지급하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사망 보험금 신탁의 보장 대상은 3000만원 이상 일반사망 보장에 한정된다. 재해·질병사망 등 특약사항으로 획득한 보험금청구권은 신탁할 수 없다. 신탁할 수 있는 보험 구조는 보험 계약자, 피보험자, 위탁자가 동일인인 경우로 한정된다. 신탁 수익자는 직계존비속(부모, 조부모, 친자녀, 손자녀 등)과 배우자만 가능하다. 신탁 계약 시 보험계약대출(약관대출)이 없어야 한다. 대출이 있으면 신탁하는 보험금을 정확히 계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보험사와 은행들이 놓칠 수 없는 새로운 시장으로 보고 선점 경쟁이 상당히 치열하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 집계를 보면, 22개 생명보험사의 사망 담보 보험금 규모 6월 말 기준 883조원에 이른다.

분쟁 없는 상속·배분 ‘유언대용신탁’

70대 중반의 홍아무개씨는 자신의 집과 상가, 현금을 대부분 하나은행에 신탁하고, 자신의 자산을 운용해 나온 수익으로 시니어타운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 또 사후에 일부 유산을 상속하는 조건으로 조카를 후견인으로 지정하고, 치매에 걸렸을 때 병원비와 간병비를 관리·지출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보험금이 아닌 다른 동산·부동산 자산을 생전에 내 뜻대로 설계해 상속하는 ‘유언대용신탁’ 역시 은행권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고객이 금융사에 현금·유가증권·부동산 등의 자산을 맡기고 살아있을 때는 운용 수익을 받다가 사망 뒤에는 미리 계약한 방식대로 자산을 상속·배분하는 서비스다. 미성년 자녀를 대상으로 재산을 상속한다면 금융사가 재산을 관리하면서 운용 수익을 지급하다가 일정한 나이가 되면 남은 재산을 지급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유언은 사후 자신의 재산이 한꺼번에 넘어가지만, 유언대용신탁은 상속자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자산을 상속할 수 있고 자산의 처분도 제한할 수 있다”며 “법적 효력도 유언장보다 유언대용신탁이 덜 까다롭다”고 말했다. 계약한 대로 상속·증여를 집행하기 때문에 법적 분쟁에 휘말릴 여지가 적은 것도 장점이다. 4대 은행의 유언대용신탁 수탁액은 최근 3년간 연평균 52%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다만, 신탁 계약을 체결해도 유류분은 염두에 둬야 한다. 유류분은 피상속인의 유언과 관계없이 특정 상속인이 보장받는 일정 비율의 상속 재산인데, 최근 법원 판례는 유언대용신탁 재산도 유류분 반환 대상으로 보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특정 가족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기로 신탁 계약을 체결했더라도 소송을 걸면 다른 상속인들이 유류분만큼 상속 재산을 가져갈 수 있다.

김회승 기자 honesty@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