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건축 세계 <21> 글래디에이터Ⅱ] 21세기 콜로세움, 라스베이거스 스피어의 스펙터클

강현석 SGHS 설계회사 소장 2024. 12. 9. 11:13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라스베이거스 더 스피어 외부. /UFC

리들리 스콧 감독의 최신작 ‘글래디에이터 Ⅱ’는 막시무스의 죽음 이후 20년이 지난 서기 210년쯤의 로마제국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로마는 카라칼라 형제의 폭정으로 내부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식민지 확장의 야망을 이어갔다. 이는 오랜 평화 시대인 ‘팍스 로마나’의 종식과 함께, 50년간 황제가 26차례나 교체된 ‘군인 황제 시대’로 전환되는 로마제국의 쇠퇴기를 드러낸다.

주인공 루시우스는 로마에서 태어나 누미디아로 피신해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아내 아리샷과 함께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아카시우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의 침공으로 아내를 잃는다. 전쟁 포로가 된 그는 노예로 잡혀 로마로 이송된다. 루시우스는 그곳에서 분노와 칼로 무장한 검투사로 싸우며 숨겨진 출생의 비밀을 밝혀나간다.

라스베이거스 더 스피어 내부. /Bright Tree Studios

검투사와 ‘빵과 서커스’

영화는 검투사의 참혹한 경기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황제와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검투사는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고 마는 싸움을 이어간다. 팽팽한 긴장 끝에 한 검투사가 칼에 찔려 피를 흘리는 순간, 집단적 광기처럼 관중의 환호가 울려 퍼진다. 왜곡된 전율에 휩싸인 경기장 아래, 비록 검투사의 대부분이 전쟁 포로, 노예, 범죄자일지라도, 마땅히 지켜져야 할 인간의 존엄은 철저히 짓밟힌다.

로마의 검투사 경기는 본래 장례 의식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전쟁 전사자를 애도하기 위해 고인의 적군이었던 전쟁 포로를 잔혹한 결투로 내몰았다. 피로 물든 살인 경기는 대중의 열광을 일으키기에 충분히 자극적이었고, 귀족과 황제는 이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다. 공화정기에는 투표권을 가진 시민의 환심을 사려는 귀족이 사비를 들여 검투 경기를 주최하고 먹거리를 제공했다. 이어지는 제정기에는 황제가 민심을 얻기 위한 연회를 베풀었으며, 특히 외국 원정에 성공한 군사령관의 개선식에서도 검투 경기를 통해 승리를 자축하고 전사자를 위로했다.

고대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는 국가 권력의 주인인 시민이 ‘빵과 서커스’로 대변되는 복지와 오락에 취해, 통치자에 대한 비판적 감시자 역할을 망각하고 있음을 풍자한 바 있다. 호화로운 귀족과 굶주린 길거리의 빈민이 대비되는 영화 속 로마의 부조리한 양극화는 콜로세움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광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완전히 흩어져 사라진다.

‘글래디에이터Ⅱ’ 주 무대인 콜로세움, 스틸. /파라마운트 픽처스


‘글래디에이터Ⅱ’ 주 무대인 콜로세움, 스틸. /파라마운트 픽처스

콜로세움의 고대 스펙터클

영화의 주 무대인 콜로세움은 지금부터 약 2000년 전인 서기 70년쯤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서기 69년, 제9대 로마 황제로 즉위한 베스파시아누스는 폭군 네로가 사유했던 인공 호수를 메우고 대중을 위한 원형극장으로 대체하기로 결심한다. 이는 황제로서 정통성 부족이라는 신분 한계를 극복하고, 폭정에 지쳐 있던 로마 시민의 지지를 얻기 위한 목적이었다. 따라서 콜로세움은 새로운 시대성을 상징하는 동시에, 되도록 많은 시민을 수용할 수 있는 실용성을 갖춰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군중의 시선을 사로잡을 현란한 스펙터클 제공이었다.

5만 명의 관중을 수용하는 타원형 대공간은 정교하게 맞물린 아치와 볼트 구조로 완성됐다. 80개의 아치형 출입구는 모든 관중이 몇 분 만에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계됐다. 미로 같은 지하 공간은 식민지에서 포획해 온 맹수와 검투사의 대기 공간으로 활용됐고, 사자와 코끼리 같은 대형 동물의 극적인 등장을 위해 리프트가 사용되기도 했다. 아레나로 불리는 경기장은 목재 바닥 위에 모래를 깔아 동물과 검투사의 피를 쉽게 정리할 수 있도록 했으며, 수로를 연결해 물을 채우고 군함을 띄어 장엄한 모의 해상 전투를 연출하기도 했다.

아레나 상부에는 48m 높이의 외벽에서 뻗은 거대한 차양이 관중석을 햇빛과 비로부터 보호했다. 고대 로마 배의 돛과 유사한 캔버스 천으로 제작된 이 차양은 경기장의 3분의 2를 덮을 수 있었으며, 이를 가동하기 위해 해군에서 선발한 선원이 동원됐다. 콜로세움의 스펙터클은 둘레 525m의 외벽을 따라 배열된 그리스 전통 기둥 양식의 조합으로 완성됐다. 1층부터 3층까지 간소한 도리아식, 부드러운 이오니아식, 화려한 코린트식의 백색 기둥이 순차적으로 적용됐고, 아치마다 배치된 인물상은 콜로세움의 위엄을 한층 더했다.

21세기 라스베이거스의 미디어 ‘구’

2023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베네시안 리조트에 세계 최대 규모의 구형(球形) 공연장 ‘더 스피어’가 문을 열었다. 높이 112m, 폭 157m에 달하는 이 공간은 콘서트, 영화, 스포츠 경기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행사를 위해 설계되었다. 더 스피어의 웅장함과 기능적 목적은 고대의 콜로세움을 연상시킨다. 특히 지난 9월 이곳에서 열린 UFC 격투 경기는 영화 속 검투 경기와 중첩됐다.

이차원의 타원형 평면을 수직으로 쌓아 올렸던 콜로세움의 형태는 21세기 엔터테인먼트의 장에서 삼차원의 ‘구’로 진화한다. 수직 벽과 수평 차양으로 나뉘어 있던 건축적 요소는 더 스피어에서 하나로 이어진 매끄러운 검은색 표면으로 통합된다. 도시를 향해 콜로세움의 위엄을 과시하던 백색 트래버틴 기둥은 이제 구 표면을 균일한 간격으로 수놓는 120만 개의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으로 대체됐다. 하키 퍽 크기의 이 조명은 빛의 삼원색 강도를 조율해 수백만 가지 색상을 구현한다. 각각이 픽셀처럼 작동해 도시를 밤낮으로 물들이면서 끊임없이 변모하는 거대한 디지털 캔버스를 만들어낸다.

비물질성과 몰입의 환경

더 스피어 내부 5만4000㎡에 달하는 초고해상도 LED 스크린은 관객을 압도한다. 이 면적은 세계 최대 아이맥스 영화관의 20배에 달한다. 소리까지 통과할 정도로 얇은 스크린이 곡면을 따라 완벽하게 휘어진다. 평면을 넘어 구형으로 확장된 이 거대한 스크린은 1만8600명의 관객을 완전히 감싸며, 빛과 이미지로 구성된 초현실적인 환경을 창조한다. 이로써 더 스피어의 표면은 안팎으로 디지털 이미지로 뒤덮이며, 건축물의 물리적 경계는 비물질적인 환영으로 변모한다.

더 스피어는 시각을 넘어 다른 감각을 자극하는 첨단 기술을 적용해 몰입감을 극대화했다. 16만7000개의 스피커는 관객 한 명당 8.4개씩 할당돼, 레이저 빔처럼 각 좌석에 맞춰 조율된 소리를 전달한다. 이를 통해 같은 영화를 관람하더라도 관객석마다 각기 다른 언어의 사운드를 전달하며, 헤드셋 없이도 헤드셋을 착용한 듯한 효과를 만든다. 또한, 촉각과 운동감을 전달하는 인터페이스 장치가 장착된 좌석은 바람, 안개, 냄새 등 미시 환경을 제어하는 기술과 결합해 차원의 경계를 허물며 완벽한 몰입 환경을 창조한다.

강현석 SGHS 설계회사 소장 - 코넬대 건축대학원 석사,서울대 건축학과 출강,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스위스 바젤 사무소 건축가

스펙터클의 양면성

프랑스 철학자 기 드보르는 1967년 저서인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현대사회의 미디어와 소비문화가 현실을 왜곡하고 인간 경험을 대체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스펙터클’을 대중매체, 영화, 광고를 통해 생산되는 일방적인 이미지와 현상으로 정의하며, 이러한 스펙터클이 사람을 무비판적이고 수동적인 소비자로 전락시킨다고 경고했다.

더 스피어가 생산하는 이미지와 엔터테인먼트의 환경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압도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소비문화의 상징인 라스베이거스 한복판에서 발산되는 이 스펙터클은 우리가 그에 빠져들며 망각한 현실을 일깨운다. 웅장한 콜로세움의 이면에 드리워진 폭력과 야만의 역사처럼, 더 스피어 역시 황홀한 빛을 발하며 자본주의 도시의 어두운 본질을 드러낸다.

Copyright © 이코노미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