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휴전, 더 참혹해진 팔레스타인

정인환 기자 2024. 12. 8.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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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가자의 참극]헤즈볼라와 휴전 합의 뒤 가자지구 공격 강화한 이스라엘… 민간인 희생자 급증
레바논 무장 정치단체 헤즈볼라와 이스라엘이 합의한 휴전이 발효된 2024년 11월28일 피란을 떠났던 젊은 부부가 폭격으로 무너진 옛집 터를 살피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레바논 무장 정치단체 헤즈볼라와 이스라엘이 휴전에 합의했다. 양쪽이 산발적 공격을 주고받으며 불안한 평화가 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다. 양쪽 간 휴전을 성사시킨 프랑스는 돌연 태도를 바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등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체포영장 효력을 부정하고 나섰다.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는 다시 철저히 고립됐다. 굶주림과 추위 속에 맹폭을 견뎌내고 있다.

“이스라엘에 무기 공급을 지속하는 국가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들은 집단살해(제노사이드)를 금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의무를 위반하고 있다. 집단살해에 가담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 특히 주요 무기 공급국인 미국과 독일은 물론 유럽연합(EU) 각국과 영국 등 여타 국가는 당장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에서 벌이고 있는 참상을 즉각 끝내기 위한 노력에 나서야 한다.”

앰네스티, 최초로 ‘집단살해’ 규정

세계적 인권단체 앰네스티인터내셔널(AI)은 2024년 12월5일 펴낸 보고서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32쪽 분량의 보고서엔 ‘인간 이하라 느낀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에서 벌이고 있는 집단학살’이란 제목이 붙었다. 2023년 10월7일부터 2024년 7월까지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이 벌인 상황을 낱낱이 분석한 앰네스티는 “이스라엘은 뻔뻔하고 지속적으로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상태로 230만 가자지구 인구를 지옥으로 몰아넣고 있다”며 “2023년 10월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겨냥해 벌인 ‘참혹한 범죄행위’는 결단코 집단살해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앰네스티는 “이스라엘은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이 금지한 집단의 구성원을 살해하는 행위(협약 2조1항)와 중대한 육체적 또는 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행위(2조2항), 전체적 또는 부분적으로 육체적 파괴를 초래할 목적으로 의도된 생활조건을 집단에 고의로 부과하는 행위(2조3항)를 자행하고 있다”고 못박았다. 이 단체가 진행 중인 무력갈등 사태를 두고 ‘집단살해’라고 규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앰네스티 쪽은 “보고서를 발간하는 목적은 국제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다. 이스라엘이 집단살해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점을 알리고, 즉각 중단시켜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11월27일 레바논 무장 정치단체 헤즈볼라와 이스라엘이 향후 60일 동안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2023년 10월7일 가자지구 전쟁이 시작된 이후 이스라엘과 ‘저강도 전쟁’을 이어온 헤즈볼라는 2024년 10월1일 이스라엘의 지상군 투입과 함께 전면전을 벌여왔다. 헤즈볼라는 창설자인 하산 나스랄라를 포함한 최고지도부를 다수 잃었지만, 중동에서 이스라엘에 맞서 끝까지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란 점을 새삼 입증했다. 이스라엘은 압도적 화력을 바탕으로 레바논 전역에서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그럼에도 가자지구에서 ‘하마스 뿌리뽑기’를 시도하는 것처럼, 레바논에서 ‘헤즈볼라 뿌리뽑기’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했다. 처음부터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는 전쟁이었다.

휴전 합의로 120여만 명으로 추정되는 레바논 피란민들은 환호성 속에 속속 귀향길에 올랐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1월27일 레바논 남부지역에서 만난 피란민 제이납(28)의 말을 따 “휴전 협상 타결 소식에 웃다 울기를 반복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면서도 정말 휴전이 됐는지 믿기지 않는다. 꿈만 같다”고 전했다. 레바논에서도 이번 전쟁으로 숨진 이가 4천 명을 넘어선 터다.

2024년 12월4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남부 최대도시 칸유니스 인근 무료급식소에서 피란민들이 필사적으로 배식을 받으려 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휴전 중재한 프랑스, 네타냐후 두둔 급선회

“국가는 국제법에 따라 국제형사재판소 비회원국에 부여된 면책과 관련해 자국의 의무와 양립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강요받을 수 없다. 이런 면책 특권은 네타냐후 총리와 다른 장관들에게도 적용되며, 국제형사재판소가 이들을 체포해 인도하도록 요청할 경우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한다.”

헤즈볼라와 이스라엘의 휴전 협상을 중재했던 프랑스 외교부는 11월27일 성명을 내어 돌연 이렇게 주장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의도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앞서 11월22일 국제형사재판소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전 국방장관에 대해 전쟁범죄 혐의로 체포 영장을 발부했을 때, 프랑스는 “국제형사재판소 설립한 ‘로마 규정’ 비준 당사국(국제형사재판소 회원국)으로서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이행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프랑스 쪽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프란체스카 알바네스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보고관은 11월28일 튀르키예 국영통신 아나돌루와 한 인터뷰에서 “프랑스 쪽 주장은 법적 근거가 전혀 없는 얘기”라고 말했다. 알바네스 보고관은 “국제형사재판소가 오마르 알바시르 전 수단 대통령 사건을 통해 이미 판례를 내놨다”고 덧붙였다.

국제형사재판소는 다르푸르 지역에서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군부 독재자인 오마르 알바시르 전 수단 대통령에 대해 2009년 3월과 2010년 7월 각각 체포영장을 발부한 바 있다. 당시 국제형사재판소 쪽은 “현직 대통령에 대한 첫 영장 발부”라며 “그의 직위가 형사적 책임 면책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한 바 있다. 체포영장 발부 당시 알바시르는 국가수반이었고, 수단은 로마 규정 당사국이 아니었다. 네타냐후 총리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와 마찬가지 상황이란 뜻이다.

프랑스 쪽 주장은 전례와도 맞지 않는다. 국제형사재판소는 2023년 3월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한 전쟁범죄 등의 혐의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당시 프랑스 쪽은 영장 발부를 적극 환영하며 이행 의지를 밝힌 바 있다. 푸틴 대통령도 현직 국가수반이며, 러시아는 로마 규정을 2016년 탈퇴했다. 네타냐후 총리 사례와 일치한다. 국제형사재판소는 2024년 9월 푸틴 대통령의 국빈 방문 때 그를 체포하지 않은 몽골을 로마 규정 제70조(사법운영을 침해하는 범죄) 위반 혐의로 당사국 총회에 회부하기로 했다. 알바네스 보고관이 “국제형사재판소 체포영장 집행을 방해하는 것은 규제 70조 위반에 해당한다. 그것 자체로 처벌받을 수 있는 범죄행위”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유일한 우군 잃고 철저히 고립된 가자지구

휴전으로 레바논 전선이 사라지면서 이스라엘군은 오로지 가자지구 공세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헤즈볼라란 ‘유일한 우군’을 잃은 가자지구는 다시 한번 철저히 고립됐다. 이스라엘군이 공습을 강화하면서 가자지구 북부와 중부 일대에서 사상자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중동 전문매체 ‘미들이스트 아이’는 12월4일 “가자지구 남부 최대도시 칸유니스 인근 해안가에 자리한 마와시에서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인한 사망자가 20명을 넘어섰다”고 전했다. 마와시는 이스라엘군이 ‘인도적 대피지역’으로 설정한 곳이다. 이스라엘군은 9월10일에도 피란민이 몰린 마와시에 공습을 퍼부어 최소 40명이 숨지고 60명이 다친 바 있다. 당시 시엔엔(CNN) 방송은 목격자의 말을 따 “공습으로 약 9m짜리 구덩이가 생겼다. 피란민 텐트 20~40개가 순식간에 파괴됐고, 가족들이 해변 모래 속으로 사라졌다”고 전한 바 있다.

2024년 12월4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남부 최대도시 칸유니스 인근 마와시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피란민촌이 화염에 휩싸이고 있다. AFP 연합뉴스

“일몰 기도를 마친 직후였다. 갑자기 폭발음이 들렸고, 이내 불길이 덮쳐왔다. 삽시간에 피란민촌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아랍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12월5일 마와시 지역 피란민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그는 “아내와 딸, 아들을 찾으려 내달렸다. 가족 모두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갔다. 가족 중 무탈한 것은 나 혼자뿐이다.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인도적 대피지역’에 아득한 지옥불이 지펴졌던 게다.

추위와 굶주림이 가자지구 전역을 뒤덮었지만, 안팎으로 상황은 갈수록 나빠진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12월2일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을 통해 자신이 취임하는 2025년 1월20일까지 중동지역에서 붙잡힌 인질이 모두 석방되지 않으면 “미국의 전례 없이 강력한 화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도 하마스도 구체적으로 거론하진 않았지만, 그가 하마스가 붙잡아둔 이스라엘 인질을 지목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종전’에 대해선 언급조차 없었다. 그는 자신의 취임식 때까지 인질 석방이 이뤄지지 않으면 “지옥 같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옥에 지옥을 더하려는가. 미국 정권이 바뀌어도 가자의 고난은 그칠 기미가 없다.

트럼프 당선, 지옥 위에 지옥 덮치다

팔레스타인 보건당국은 2023년 10월7일 개전 이후 전쟁 425일째를 맞은 2024년 12월4일까지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가자지구 주민 4만4532명이 숨지고, 10만5538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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