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함께라면’ 실험 1년 약자 복지에 새 신호탄 쏘다
부산·울산·파주·계룡 등 전국으로 확산
(시사저널=정성환 호남본부 기자)
12월2일 오후 전북 전주시 덕진구 반월동 큰나무종합사회복지관. 그곳에 설치된 '전주함께라면' 무인 카페에 들어서자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따뜻한 라면을 끓여 드세요'란 안내문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홀로 사는 이철수씨(가명·73)는 인근 사회복지관에 설치된 '전주함께라면 카페'에서 라면으로 자주 끼니를 잇는다. 이씨는 "처음엔 쑥스럽기도 했지만 복지관 직원들의 따뜻한 배려로 요즘은 마음 놓고 라면을 끓여 먹고, 들고도 온다"며 "고달픈 일상이 끼니 걱정 없이 사는 덕분인지 훨씬 가벼워졌다"고 말했다. 그는 자녀들이 경제적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받지 못해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외톨이 생활을 하던 추영남씨(48·완산구 서서학동)는 라면으로 허기를 채우기 위해 찾았던 복지관에 직원으로 채용돼 순환자원회수로봇(재활용 처리) 관리 일을 맡아 한다. 그는 어려운 주민들을 위해 좋은 곳에 써달라며 복지관 정기 후원까지 하고 있다. 전주시 고향사랑기금 1호 사업인 '전주함께라면 카페' 덕분이다.
전주시는 이용자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일부러 복지관 내 후미진 곳에 카페를 차리고 쪽문도 냈다. 서민의 소울메이트이자 원픽(Pick)인 라면을 매개로 한 혁신정책을 전국에 발신하고 있는 것이다. '전주함께라면 카페'는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라면을 즉석에서 끓여 먹을 수 있고, 필요한 아무나 이를 가져갈 수 있도록 설치한 무인복지관이다. 새로운 복지 사각지대인 자발적·장기 은둔형 고립 위기 가구를 발굴하기 위해 전주시와 6개 종합사회복지관이 협력해 운영하는 저예산·민관 합작 전주형 나눔 특화사업이다.
가설 검증 후 전주 6개 복지관에서 본격 운영
애초 이 사업은 뜻밖의 '사연'에서 비롯됐다. 전주시 산하 한 사회복지관에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이라도 나눠줄 수 있느냐"고 묻는 20대 후반 청년의 전화 한 통이 걸려오면서다. 때마침 위기 가구 발굴에 목말라 하던 전주시는 이 청년의 사례를 기존 복지정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로 봤다. 그를 은둔에서 집 밖으로 나오게 한 방아쇠에 주목한 것이다. 진교훈 전주시 생활복지과장은 "나눔을 통해 기존 복지정책이 닿지 않는 자발적·장기 은둔형 가구 발굴을 위해 '전주함께라면'을 구상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함께라면 사업의 밑바탕에는 기존의 공공 복지제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복지 사각지대의 문제가 깔려 있다. 타 자치단체와 마찬가지로 전주시에도 한때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A빌라 40대 여성 사망 등 다양한 형태의 위기 가구가 존재했다. 전주시는 이 같은 불편한 진실을 극복하기 위해 고립 가구 발굴에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공공요금 체납, 단전, 단수 등의 데이터를 활용한 복지 사각지대 발굴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또 원룸·다가구주택에 상세 주소를 부여해 누락을 최소화하고, 복지등기 우편사업을 시행 중이다. 여기에 더해 초거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상담 서비스를 하고 있다.
하지만 행정이 스스로 고립돼 가는 가구를 발굴하기는 여간 녹록지 않았다. 진 과장은 "아무리 정부나 지자체 차원의 많은 복지정책이 있어도 그 정책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닿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며 "특히 자발적·장기적 은둔형 고립 가구는 복지의 도움을 스스로 청하지 않기 때문에, 행정 당국의 노력에도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전주시는 서두르지 않고 고립 청년의 사례를 정책화하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가설이 이론(정책)으로 정립되는 데 1년이 소요됐다. 일종의 실증 테스트베드 역할을 한 전주시 산하 평화사회복지관에 '전부함께라면 카페'를 설치하고 지난해 7월부터 시범운영에 들어갔다. 그 결과 약 1700명의 주민이 이용했고, 이 가운데 40여 위기 가구를 발견해 관련 복지 혜택을 연계했다. 실효적인 약자 복지 시책으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한 전주시는 올해 6월부터 지역 6개 복지관에 설치하고 정식 운영을 본격화했다.
호응은 기대를 훌쩍 뛰어넘었다. 현재(11월말 기준)까지 8500명이 넘는 시민이 '전주함께라면'을 이용했으며 위기 세대 79건이 발굴됐다. 시는 이들이 처한 상황과 위기 강도에 따라 복지공공서비스와 연결해 기초수급자·차상위계층 신청, 생계비, 의료비, 돌봄서비스 등을 지원하고, 이웃과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복지관에서 진행하는 주민 프로그램에 참여토록 지원했다.
물론 사업의 지속 가능성 여부에 대한 일각의 우려도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전주시는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무엇보다 나눔의 선순환으로 인해 행정의 추가 재정 투입 없이 스스로 돌아갈 수 있는 구조로 사업이 만들어졌다는 게 전주시의 설명이다. 시는 마중물로 고향사랑기금 2000만원을 포함해 총 4000만원의 사업비를 투입했다. 우범기 전주시장을 비롯한 전주시 공무원들이 첫 번째 기부자로 나섰다. 전주시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이 사업에 사용되는 라면은 모두 기부로 충당하고 있다. 자생단체, 지역 4대 종단, 독지가, 일반 시민들까지 릴레이식으로 라면을 기부했다. 시작한 지 불과 3주 만에 모인 라면이 3만여 개에 달했다. 후원금도 총 673회에 걸쳐 5000여만원이 쌓였다. 최근에는 국내 유명 라면 기업에서도 정기적으로 라면 기부 동참의 뜻을 밝혔고, 지역 대학교 내에서 '전주함께라면'과 연계·진행하는 '청년행복할지도' 캠페인을 통해 고립 청년 돕기에 나섰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주함께라면'은 단순히 지역 내 문제 해결에 그치지 않고 전국적 확산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비록 소규모 지역에서 시작됐지만 그 실효성과 가치가 입증되면서 부산·울산·파주·계룡시 등 전국 10여 개 지자체에서 벤치마킹 모델로 삼고 있다. 11월28일 행정안전부의 최우수 사례에 선정돼 특별교부금 3500만원도 확보했다. 이에 힘입어 전주시는 향후 가칭 '커피한잔할래요?' 사업으로 확장해, 커피를 매개체로 한, 또 다른 무인복지관도 추진할 계획이다.
'저예산·실효적 약자 구제 방식' 평가
지역 관가 안팎에선 '함께라면' 사업을 두고 민관 합작을 통한 저예산 투입으로 새로운 나눔과 약자 복지 방식을 제시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존 평면적인 나눔과 위기 가구 발굴 방식에 새 좌표를 찍어 다각화를 더했다는 것이다. 늘상 '개발 위주의 토건 행정을 편다'는 꼬리표에 시달렸던 전주시 입장에서도 반전 효과가 크다. '함께라면' 사업 도입은 민선 8기 전주시가 '서민 지향'을 드러내는 '상징적 선택'이다. 이에 따라 도랑 치고 가재 잡은 격으로 시정 리스크를 분산하고 정책의 균형을 잡았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우범기 전주시장의 말이다.
"현장에 나가 보면 최근 경제난으로 시민들의 일상이 위협받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경제위기가 다가오면 가장 먼저, 가장 깊게 고통을 받는 분들이 바로 위기 가구를 포함한 취약계층이다. 이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해 주는 것이 시급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전주함께라면 카페' 사업이다. 복지관을 방문해 라면을 먹는 과정에서 필요한 복지 서비스를 자연스럽게 안내받고, 복지관이 제공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즉,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라 복지 안전망 안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이 되는 셈이다. 함께라면은 저예산으로 큰 효과를 보고 있는 사업으로 민관 협력체계를 구축한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약자 복지를 위한 좋은 선례이자 기부문화 확산에도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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