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이모의 25년 인생이 담긴 ‘최루탄 라면’ [.txt]
‘문학의봄’으로 등단해 장편소설 ‘구디 얀다르크’ ‘인생 마치 비트코인’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 ‘여고생 챔프 아서왕’ ‘블루아이’를 썼다. ‘월급사실주의’ 동인이다.
신촌의 작고 낡은 술집 훼드라에서
매일 12시간씩 라면 끓인 ‘지나 오’
200명 단골과 정다운 정 나누고
‘너른 품’으로 청춘들 품어와
신촌의 밤을 지켜온 작고 낡은 술집 ‘훼드라’. 현대백화점 건물 서쪽에 자리한 이곳은 군사독재 시절, 이한열 열사를 비롯한 연세대 학생들의 아지트였다. 이곳에는 단골들이 ‘러시아 이모’라 부르는 이가 있다. 러시아 이모는 눈물 콧물 쏟게 만드는 최루탄 라면을 끓이고 계란말이를 부치는데, 매일 12시간씩 25년 동안 쉬지 않고 일했다.
“나는 오정순이고, 러시아 이름은 지나예요.”
러시아 이모의 이름은 지나 오. 사할린 동포인 ‘까레이스키’다. 사할린에서 대학을 나와 회사에서 30년 가까이 일하다 은퇴하고 고국에 왔다. 처음에는 이곳저곳 놀러 다녔다. 여수식당 사장의 소개로 이곳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도 1, 2년 돈 벌고 가려던 생각이었지, 이토록 오랫동안 신촌에서 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손님이 별로 없을 일요일 밤을 골라 방문했지만 이모는 바빴다. 구석진 방에 있던 20대 커플이 나가자 운동복 차림의 남성 둘이 들어와 연신 소주를 비웠다. 이어서 중년 남성 셋, 연세대학교 점퍼를 입은 캠퍼스 커플이 차례로 들어와 라면과 맥주를 주문했다. 휴대폰 녹음앱을 켜놓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출근해서 하는 일부터 물었다.
“양파 조금 썰고. 그다음에 또 고추도 썰어놔요. 콩나물 준비하고. 이렇게 라면 끓여서 팔지요. 계란말이도 하고. 집에 갈 때는 정리 다 하고.”
이석증 때문에 가끔 서 있기 힘들다는 이모는 1949년생이다. 고령에 저녁 7시 반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12시간 동안 매일 하는 과업은 명료했다. 2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반복한 일이다. 퇴근 후의 삶은 어떨까?
“집에 가면 너무 피곤하니까. 거의 밥 먹고 잠만 자고, 빨래 조금 하고, 그런 거밖에 안 하지요.”
문화의 거리 한복판에 살아도 영화는 보지 않는다. 취미라 할 것이 없었다가 요즘에는 영어 공부와 체스에 빠졌다. 어릴 때부터 영어를 좋아해 영어 선생이 되고 싶었지만 사할린에서 영어를 배우려면 9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에 가야 해서 포기했다. 외국인 손님이 오면 영어로 주문받는 것을 목표로 공부를 시작해 이제 간단한 회화 정도는 충분한 실력이 됐다. 발음도 유창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며 힘든 유년을 보낸 이모는 나고 자란 사할린을 기반으로 악착같이 일하는 전문직 여성이었다. 한인 사회에서는 성공한 고려인으로 유명했다. 한국에 오기 전 77평짜리 집도 사 두었다. 한국에 먼저 온 언니를 보러 신촌에 놀러 왔다가 눌러앉게 됐단다.
서울살이가 만만치 않았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식당에서 일하는 외국 국적 노동자라면. 일당을 받으며 일하다가 1999년부터 월급을 받기 시작했다. 첫 월급은 120만원. 현재의 사장은 창업자에 이어 2010년에 식당을 인수했다. 당시 이모의 월급은 150만원이었고 이제 200만원이 넘는다. 살인적인 집값의 서울에서 주거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고시원에서 살았어. 내가 낮에 자고 밤에 일하는 사람이라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면 발자국도 나고, 말하는 소리도 나고 그래서 고시원에서 진짜 좀 어렵게 살았어요. 잘 못 잤어.”
15년 정도 있던 고시원을 떠나 지금은 훨씬 나은 환경에서 지낸다. 여기서 한 유명인의 이름이 등장한다. 한국적 포크 음악의 창시자인 싱어송라이터 한대수. 신촌 길거리에서 만난 한대수 부부와 이모가 친해진 건 얼마 전 작고한 한대수의 부인 역시 러시아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이모의 사정을 알게 된 한대수는 자기 집을 선뜻 내주었다. 소설 같은 얘기다.
“콘서트 할 때마다 표도 보내줘요. 그런데 딱 한번 가봤어.”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생활이 뻑뻑하지는 않았단다. 초대 사장님은 옷 사 입으라고 만원, 목욕비 하라고 만원씩 보태주곤 했다. 그렇게 모은 돈 대부분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자녀들에게 송금했다. 이한열 기념사업회에 만원이며 십만원이며 기부도 했다.
식당에서 밤새워 일하는 삶에 육체적인 고단함만 있는 건 아닐 터. 감정노동도 상당할 것 같았다. 2차, 3차를 거쳐 거나하게 취한 이들이 마지막 코스로 찾는 곳이기에 더욱 그렇다.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젊은 남자들이 거친 육두문자를 뱉으며 위협적으로 탁자를 탕탕 내려치기도 했다. 그런 손님이 오면 못 본 척 일에 집중하는 게 이모가 체득한 노하우, 그보다는 좋은 손님이 훨씬 많으니 괜찮단다.
“아이들이 너무나 나를 좋아하고, 내가 아이들을 좋아하고, 그게 너무나 재미있고 행복하고. 연대 학생들도 많고. 뭐야, 서강대. 우리 서강대 학생들, 홍대 학생들, 이대 아가씨들. 다 나를 좋아하고 나도 그분 다 좋아합니다.”
기억에 남는 손님을 물었을 때는 유명인들의 이름이 나올 것이라 짐짓 기대했다. 역시나 6월 항쟁 당시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 사진 속 인물들, 영정을 든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 우상호, 태극기를 든 배우 우현, 고개를 푹 숙인 배우 안내상에 이어 연세대 출신 인사들의 이름이 줄줄 나왔다. 이모가 낡은 휴대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3년 전에 황신혜 배우도 왔다 갔고. 조여정인가? 그분도 왔다 갔어. 우상호씨는 이번 달에만 세번을 다녀갔어요. 제일 좋아. 정치를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늘 웃는 얼굴이야. 좋은 말도 해주고요. 어제도 다녀갔어요. 사진 보여줄게.”
쉬지 않고 음식을 만드는 것도 힘들지만 치우는 건 더 고된 일이다. 2교대 야간 근무라면 더욱 그럴진대 이모는 늘 밝은 표정이다. 내 돈 벌어서 내가 쓴다는,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자부심이 있다고 했다. 그보다는 이모를 보려고 찾아오는 단골들이 많다는 게 가장 큰 이유란다.
“요즘은 신촌에 사람이 좀 없어졌잖아요. 그래서 손님도 옛날처럼 많이 없어. 어디 가서 많이 먹고 와서 우리 집에서 해장하고 가고. 그런데 나는 또 내 단골손님이 많으니까, 그분들이 이모 보러 자주 오고.”
훼드라를 지키는 건 단골들이다. 예전에는 하루에 라면을 300개씩 끓였다는 이모. 최루탄 라면의 매운맛은 여전하지만 손님은 그만 못하다. 온갖 프랜차이즈가 즐비하던 신촌 상권은 몰락했다. 블루멍키즈와 해머 같은 록카페가 사라진 건 오래전 일이다. 민들레영토도 문을 닫았다.
그런 신촌의 밤거리에 수십명의 젊은이가 목격된다면 이모가 단골들을 초대해 파티를 벌인 날일 수 있다. 정해진 날짜가 있는 것은 아니다. 2월에는 동네 식당 사장들을 모아 고기 파티를 벌였고, 4월에는 박사 학위를 받은 단골들과 치맥 파티를 했다. 문제는 본인 돈을 쓴다는 것.
내가 참여했던 석달 전 파티에서도 이모는 꽤 많은 돈을 냈다. 2차에서 몇몇이 속닥거리다 회비를 걷어 계산했는데 그게 못내 서운했단다.
“파티해 주는 것이 좋아. 내 돈 쓰면서 파티해 주면, 내 마음이 시원해 좋아요.”
다음날 일이 있어 2차에서 먼저 일어났는데 이모는 5차까지 갔단다. 정작 이모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인터뷰 말미에 언제까지 이 일을 하시겠느냐고 물었다. ‘몸이 많이 나빠져서 못할 때까지 라면을 끓이겠다’ 정도의 대답을 기대했건만 이모는 조금 충격적인 답을 했다. 내년 9월에 러시아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이었다. 졸지에 은퇴 인터뷰가 된 판국.
“나갈 거야, 나는 이제. 나이 먹었으니까 집에 들어가야지.”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고, 집도 블라디보스토크에 따로 있고, 이제 나이도 먹었고, 하바롭스크에 있는 언니도 봐야 하고, 돌볼 가족도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러시아 이모가 끓여주는 해장라면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이제 열달 남짓 남았다는 것.
“내가 소원이, 이제 러시아 가면 우리 단골손님들 다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거야. 얼마나 좋아? 이모 보고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좋지. 오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나한테 전화번호가 너무나 많아 가지고, 한 200명 있을 거야.”
나도 초대해주셨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보드카를 마시며 신촌의 밤을 얘기하다가 이모가 끓여주는 해장라면을 먹는 풍경이 그려졌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야 라면을 먹었다. 새벽 1시가 넘었지만 단골들이 수시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도대체 일이란 건 무엇일까. 우리는 왜 일을 하는가. 인공지능(AI)이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불안감이 화두인 시대다. 미래에도 인류는 일을 하고 있을까. 내가 하는 일, 그러니까 소설 쓰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일로 존재나 할까.
이 글을 작성하면서도 인공지능(AI)의 도움을 받았다. 스마트폰으로 녹음한 음성파일 원본을 엘엘엠(LLM) 플랫폼에 올리니 즉시 녹취록 텍스트 파일을 만들어 주었다. 오탈자가 그대로 있는 피디에프(PDF) 파일을 챗지피티(ChatGPT)에 업로드하여 인터뷰 기사를 작성하라고 하니 상당한 품질의 글이 뚝딱하고 나왔다. 고백하자면 인공지능과 경쟁하느라 힘들었다.
버스가 끊겨 일산을 거쳐 돌아가야 했다. 심야버스에 앉아 이모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라면을 끓이고 탁자를 행주로 훔치는 것이 일의 형태지만 본질은 너른 품이었다. 200명이 넘는 단골을 하나하나 기억하는 이모를 떠올리며 나는 이 일을 하면서 몇명을 품고 있는지 생각해봤다. 인공지능은 하지 않을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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