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 밀레이 1년] '전기톱 개혁' 명암 뚜렷…물가 안정 속 빈곤층 급증
인플레 작년 12월 25.5%→지난 10월 2.7%…만성적 재정적자도 흑자로 돌아서
빈곤율 최악, 취임 후 520만명 빈곤층 전락…실업률 ↑·경제성장률 뒷걸음질
[※편집자주 = 20년 가까이 경제난을 겪는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개혁과 기득권 심판론을 내세우며 취임한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오는 10일(현지시간) 집권 1년을 맞습니다. 극단적인 시장경제 원칙주의자로 통하는 밀레이의 정책은 각종 경제지표를 개선하며 구체적 성과를 냈다는 평가와 함께, 빈곤층 급증 및 성장세 둔화라는 또 다른 부작용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낳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지난 1년간 아르헨티나에서 나타난 변화상과, 미국의 트럼프 2기 정부 출범과 같은 국제환경 변화에 따른 전망을 살펴보고, 현지 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르포 등 기획 기사 3건을 송고합니다.]
(멕시코시티=연합뉴스) 이재림 특파원 = "우리나라에서 왼쪽 중 쓸모 있는 건, 리오넬 메시의 왼발밖에 없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왼발잡이' 축구선수 메시를 칭찬하는 것 같은 이 언급은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좌파 성향의 전임 정권을 비난한 대표적인 메시지 중 하나다.
전 세계 주요 언론에서 '극우 성향'으로 분류하는 밀레이 대통령은 수십 년간 권력 다툼을 하며 아르헨티나 현대 정치사를 지배한 좌파 '페론주의'(후안 도밍고 페론 전 대통령을 계승한 정치 이념)와 중도우파 '마크리스모'(마우리시오 마크리 전 대통령을 계승한 정치 운동) 심판론을 강조하며 작년 대선에서 승리했고, 그해 12월 10일 4년 임기를 시작했다.
헝클어진 헤어스타일, '턱 주름이 찍히는 건 싫다'며 취하는 평범하지 않은 사진 촬영 포즈, 개혁을 외치며 전기톱을 들고 대중 앞에 선 모습 등 개성적 면모를 앞세운 그는 고강도 개혁안을 밀어붙였고, 환율 안정 및 인플레이션(물가상승) 완화라는 '빛'과 함께, 성장세 둔화 및 빈곤율 급등이라는 '그림자'를 동시에 마주한 채 집권 첫 해를 마무리하고 있다.
잇단 '충격 요법' 개혁 단행…국민에 고통 분담 요구
밀레이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경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재정 흑자'를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20세기 중반 이후 겪은 만성적 재정 적자, 보유 외화 부족, 9차례의 디폴트(채무 불이행) 사태 등 국가 정책의 실패에서 기인한 것으로 분석되는 경제의 악순환만은 해결해 보겠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는 이대로 가면 1만5천%대의 초인플레이션이 도래할 것임을 경고하며 경제난 극복을 위해선 '충격 요법'이 불가피함을 예고하면서 부처 18→8개로 통폐합, 공무원 3만명 감원, 공공사업 중단, 보조금 축소 등을 통한 정부 지출 삭감을 단행했다.
전임 정부에서 그간 인위적으로 고정했던 페소화 공식 환율을 '절반의 가치'로 떨어뜨리는 과감한 평가절하를 통해 비공식 환율과 공식 환율의 격차를 줄였다.
적자를 막기 위해 중앙은행에서 더 많은 페소화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면서 페소화 가치가 하락하며 공식-비공식 환율간 격차가 계속 커지자, 인위적인 페소화 평가 절하라는 '극약 처방'을 통해 환율을 정상화하는 취지였다고 현지 일간 라나시온은 보도했다.
이런 조처는 모두 밀레이 대통령 취임 이후 일주일 안에 전광석화처럼 감행됐다.
아울러 밀레이 정부는 연료·교통 보조금 삭감, 은퇴자 연금 동결, 생필품 가격통제 폐지, 대학 재정지원 축소 등을 내세워 정부의 재정지원에 '익숙한' 국민들에게도 '허리띠 졸라매기'를 요구했다.
"나라에 돈이 없다"며 단행한 이 같은 정부의 조처는 단호하면서도 과격했고, 이 여파로 실물경제는 큰 충격을 받은 듯 출렁거렸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공무원과 들썩이는 생필품값에 분노한 서민은 새로 규정된 '거리 시위 금지' 조항을 무시한 채 밖으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벌였다.
저녁에는 집에서 냄비를 두드리며 시위를 벌이는 남미 특유의 항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일부 개혁안은 여소야대 의회의 반대에 부딪혀 수정 또는 폐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업 투자 환경 개선이나 교역량 증대를 위한 규제 철폐 등 경제 부문 주요 정책 시행을 위한 법률 개정안은 보수우파 야당 협조 속에 대체로 통과되면서, 밀레이 정부에도 힘이 실리게 됐다.
일부 성과지표 개선…인플레이션 해소는 '아직'
토도노티시아스와 인포바에 등 아르헨티나 언론 보도를 보면 정부에서 목표로 삼은 일부 성과지표는 개선된 것으로 평가된다.
밀레이 정부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내세워 온 건 재정 건전성으로, 지난해 말 국내총생산(GDP) 대비 3∼4% 적자를 꾸준히 기록하다가 올해 상반기엔 흑자로 돌아섰다. 수치는 0.2∼0.3%대로 그리 높진 않다.
주가(메르발 지수) 역시 상승 커브를 그리는 중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밀레이 정부 재정정책에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바 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지난 달 루이스 카푸토 경제장관은 현지 라디오 인터뷰 등에서 밀레이 대통령 취임 첫 달인 지난해 12월 25.5%였던 월간 소비자물가지수(IPC)가 지난 10월 2.7%까지 떨어졌다면서, "우리 정부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에 대한 방증으로 밀레이 대통령 지지율이 평균 40%대에서 최근 50%대로 반등한 점을 들기도 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중앙은행(BCRA) 자료를 보면 그동안 누적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연간 인플레이션은 193.0%로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현지 일간 파히나12는 지수 측정상 가격 가중치 문제, 품목 구성 변경, 지역별 차이 등을 고려할 때 향후 정부의 세밀한 정책적 접근 수립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미겔 보기아노 정부 경제자문위원(경제학자)은 영국 BBC 스페인어판(BBC 문도)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에서는 그간 정부가 초과 지출을 화폐 발행으로 조달했다"며 "그러다 어느 순간 아무도 아르헨티나에 돈을 빌려주지 않으면서 문제가 악화한 만큼 이자 부채 흡수를 위한 메커니즘 마련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빈곤층 증가·성장률 둔화…"적자 해소는 사기" 주장도
밀레이 대통령의 과감한 개혁정책 시행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특히, 중산층 붕괴 우려가 나올 정도로 빈곤층이 빠르게 늘어나는 게 눈에 띈다.
지난 9월 아르헨티나 통계청(INDEC)은 올 상반기 빈곤율이 52.9%로, 지난해 하반기 41.7%에서 11.2%포인트 상승했다고 밝혔다.
이는 수치상 2003년 이후 21년 만에 최악으로, 밀레이 대통령 취임 이후 520만명 넘는 이들이 빈곤층으로 전락한 것이다.
최소한의 먹거리 수요마저 충족할 수 없는 극빈율은 18.1%로, 이 역시 지난해 하반기보다 6.2%포인트 늘었다.
실업률은 지난해 4분기 5.7%에서 올해 3분기 7.6%로 상승했고,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1.6%에서 올해(최종 전망치) -3.7%까지 뒷걸음질 쳤다.
이에 관련, 마누엘 아도르니 대통령실 대변인은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 정부는 페론주의자들로부터 비참한 상황을 물려받았다"며, '전임자들의 무절제한 방만 지출'의 병폐라고 항변했다.
일각에선 밀레이 정부가 단순히 적자를 숨기는 데 급급하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1989∼1999년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친 카를로스 메넴 정부의 각료 출신인 카를로스 로드리게스는 엑스(X·옛 트위터)에 "부채 담보 만기 때 이자 지급을 연기할 수 있는 채권(LEFI)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게 아니라면 현 상황에서 흑자 재정은 어렵다"며 "이는 서류에 나오지 않는 적자로, 단순히 찬타다(사기)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만성적인 경제난 극복을 위한 개혁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 아르헨티나가 대통령 약속대로 "4천700만 인구를 위한 풍요로운 미래"로 가는 발판을 다져 나갈지, 아니면 반대파 경고처럼 "더 큰 경제난의 소용돌이"에 휘말릴지 향배는 밀레이 집권 2년 차에 조금 더 선명해질 전망이다.
walde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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