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車·배터리, 계엄發 벼랑끝…트럼프 대응 골든타임 놓친다
美 칩스법·中규제에 K-반도체 태풍권…車·배터리 공급망·보조금도 휘청
(서울=뉴스1) 한재준 최동현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비상계엄 선포 사태와 이어진 정치권의 탄핵 추진으로 정국이 급속히 얼어붙고 정부의 국정운영이 마비 위기에 놓였다. 반도체와 배터리, 자동차 등 국내 주요 산업들이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대비해야 할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8일 경제계에 따르면 불법 비상계엄의 선포와 윤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 부결로 국정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트럼프 2기 시대를 서둘러 준비해야 할 기업들의 속이 타들어가고 있다.
국익 확보 사활 걸어도 모자란데…입술 마르는 기업들
트럼프 당선인은 취임 전부터 세계 무역질서 재편을 예고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추가 관세는 물론 인접국인 멕시코·캐나다에 25%의 관세를 예고하면서 기존 공급망 하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기업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트럼프 당선인이 취임 전 각국 정상을 만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음에도 각국 정부가 국익을 위해 외교 총력전에 나선 이유다. 글로벌 기업들은 로비스트를 고용해 트럼프 시대 사업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민관이 힘을 합쳐 대응해도 트럼프 행정부의 불확실성을 완벽하게 걷어내기 힘든 상황인데 탄핵정국 돌입으로 기업과 발을 맞춰야 할 공직사회가 마비되면서 대미 아웃리치(접촉)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특히 주력 산업인 반도체와 자동차, 배터리 업계가 얽혀있는 칩스법,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트럼프 당선인이 보조금 축소 등을 예고하고 있어 대미 협상의 골든타임을 놓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올 거란 우려가 커진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정부의 정책 집행력이 떨어져 대외 협상에서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며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이 상대와 계속 협상을 해야 되냐'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대미 협상에서 굉장히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이어 "국내 상황과는 상관 없이 정부 차원에서 (각국에) 지금의 협력 기조는 계속 유지해 나갈 거라는 점을 표명할 필요가 있다. 여야를 가리지 말고 정치권이나 국회 차원에서도 얘기를 해줘야 한다"며 "국내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지금과 같은 행태를 보이면 국가 전체의 협상력이 떨어진다"고 강조했다.
홍기용 인천대 교수도 "설득력 없는 계엄과 그에 따른 탄핵국면으로 대미 협상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우리나라의 핵심 기간 산업이 견제를 받고 경쟁력도 떨어지는 의사결정이 지속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재계에도 긴장감이 돌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트럼프 측과 협상은 기업이 혼자 할 수 없다. 정부와 함께 해야 한다"며 "지금 트럼프 당선인이 예고한 관세도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유관부처와 기업이 긴밀하게 협의해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지금은 상당히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中 수출 막히고 보조금도 불투명…K-반도체 위협받는다
우리나라 경제를 지탱하는 반도체 산업은 트럼프 당선인 취임 전부터 노심초사 중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대중제재를 강화한 가운데 차기 행정부에서는 더 강력한 대중 수출 통제와 자국 우선주의 정책이 추진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미 예고편 상영은 시작됐다. 최근 미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은 대중 반도체 수출 통제 방안을 발표하고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규제 품목에 포함했다. 제곱밀리미터(㎟)당 초당 2기가바이트(GB)를 넘는 HBM이 대상으로 사실상 모든 HBM 제품의 중국 수출을 막았다. 중국에 구형 HBM을 수출 중인 삼성전자에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미국은 우리나라가 주도하는 HBM 수출을 막고 중국 메모리 기업인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는 제재 대상에서 제외했다. 범용 D램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기업을 빠르게 추격하는 CXMT에 길을 터준 것이다. 수출길은 막히고 중국의 추격은 거세지면서 우리 반도체 업계가 궁지에 몰리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칩스법 보조금마저 손질할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400억 달러(약 57조 원)를 투자하는 삼성전자는 64억 달러(약 9조 원)의 보조금을, 인디애나주에 38억 7000만 달러(약 5조 5000억 원)를 투자하는 SK하이닉스 또한 4억 5000만 달러(약 6400억 원)의 보조금을 약속받았지만 아직 확약을 받진 못한 상태다.
업계에서는 트럼프 당선인이 보조금을 축소하거나, 보조금을 빌미로 추가 투자를 요구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전기차·배터리 "보조금에 공급망까지 위기…대미협상 실기할라"
자동차와 배터리 업계도 속이 타들어 가는 실정이다. 반(反)전기차 정책을 내세운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IRA에 따른 각종 보조금을 축소할 가능성이 있다. 업계에선 민관이 원팀으로 대미협상에 나서야 할 시점에, 동력이 반토막 나면서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분위기다.
특히 K-배터리는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로 실적을 지탱하는 실정이라 치명타가 불가피하다. 국내 배터리 3사의 올 1~3분기 AMPC 누계액은 총 1조 3787억 원(LG에너지솔루션 1조 1027억·삼성SDI 649억·SK온 2111억 원)이다. 그중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은 AMPC가 없으면 영업적자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중국산 흑연에 대한 세액공제 혜택을 취소할 가능성이 높은 점도 고민거리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2026년까지 유예했던 전기차 구매 세액공제에서 중국산 흑연에 대한 해외우려집단(FEOC) 요건 적용을 트럼프 행정부는 즉시 취소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중국산 천연흑연 수입 의존도는 90%에 달한다.
국내 업계로선 IRA 보조금 축소로 인한 직접 피해뿐 아니라, 중국산 흑연 봉쇄에 따른 공급망 위기까지 '이중고'에 직면한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 5월 중국산 흑연 보조금 유예를 받아내는 데 정부의 역할이 컸던 것처럼, 트럼프 2기 정권인수팀과의 협상에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민관의 유기적 협력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고 토로했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미국과 물밑 협상을 통해 국내 기업이 활동하기 좋은 여건을 만드는 게 정부의 역할인데 지금 정부가 동력을 잃은 상황에서 (협상을) 기업체에 떠넘긴다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 상당히 곤혹스러운 상황"이라며 "탄핵 전후라도 여야가 공조해 대미 정책과 국내 기업 지원을 일관되게 추진하겠다는 메시지를 내야 한다"고 제언했다.
hanantway@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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