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틈타 은근슬쩍 경영 복귀한 창업자들, 그들의 성적표는
‘책임경영’ 무색하게 실적은 ‘미온적’…22개사 중 8개사만 매출 증가
(시사저널=이석 기자)
"대내외적인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오너의) 신속하고 치밀한 의사결정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다."
지난해 8월 이중근 부영그룹 창업주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 3년여 만에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한 말이다. 그의 말처럼 전 세계 경제가 최근 동반 불황에 빠졌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지속되고 있는 '3고'(금리·물가·환율)와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붕괴가 겹치면서 '불황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상황은 더하다. KDI와 IMF(국제통화기금) 등 국내외 기관들이 잇달아 한국 경제성장률을 하향 조정하고 있다.
적자에도 고배당 이어온 부영그룹에 '뒷말'
이중근 회장이 경영에 복귀한 것도 이와 같은 불확실한 경영 환경이 반영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위기 상황이니만큼 전문경영인 체제 대신 오너가 이끄는 강력한 '책임경영'을 하겠다는 얘기다. 실제로 부영그룹의 매출은 코로나 팬데믹 직전인 2020년까지만 해도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연결 기준 매출은 2조4877억원으로 전년 대비 140%나 증가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이나 당기순이익 역시 1286억원과 1337억원으로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됐다.
하지만 2021년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치면서 건설 경기가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부영그룹의 매출 역시 1조7440억원으로 1년 만에 3분의 1 토막이 났다. 이듬해에는 매출이 6626억원까지 하락했다. 견실하게 흑자를 이어가던 영업이익이나 순이익 역시 적자로 전환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적자 규모는 커지고 있다.
주목되는 사실은 이런 실적 변화가 이 회장의 사임이나 경영 복귀 시기와 맞물린다는 점이다. 이 회장은 2020년 8월 횡령·배임 혐의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고 경영에서 물러났다. 5년간 취업도 제한됐다. 재계에서는 오너 부재에 따른 경영 리스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그해 부영그룹의 매출은 두 배 이상 증가했고, 영업이익과 순이익 모두 흑자로 전환됐다.
이 회장이 지난해 8월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복권되면서 경영에 복귀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재계에선 '오너의 경영 복귀에 따른 반사효과'를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지난해 부영그룹의 매출은 5365억원으로 전년 대비 19.3%나 하락했다. 2020년 고점과 비교하면 매출 하락률은 78.4%에 이른다. 영업적자나 당기순손실 폭도 1년 만에 두 배 이상 확대됐다. 그럼에도 부영그룹은 고배당 기조를 이어오고 있다는 점에서 뒷말이 나오고 있다. 그룹 사정에 정통한 한 재계 관계자는 "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주)부영은 2022년 1076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지만, 손실액보다 더 많은 1260억원을 현금으로 배당했다"면서 "이 회장이 (주)부영의 지분 93.79%를 보유하고 있다. 배당금 대부분이 오너의 호주머니에 들어가는 건 당연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80대 고령인 이 회장의 경영 복귀를 두고 재계 안팎에서 "올드보이의 노욕 아니냐"고 수군거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복귀한 다른 회장님들의 상황은 어떨까. 최근 창업주가 경영에 복귀한 기업의 면면을 보면 건설이나 제약, 헬스케어, 패션 등의 대기업은 물론이고 IT나 이차전지, 화장품, 패션 스타트업도 포함돼 있다. 시사저널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경영에서 물러났다가 복귀한 창업자만 이중근 회장을 포함해 14명(윤세영 태영그룹 창업회장,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이동채 에코프로 회장, 권원강 교촌 회장, 최진민 귀뚜라미 회장, 양형남 에듀윌 대표,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 조만호 무신사 총괄대표, 박관호 위메이드 대표, 김남주 웹젠 공동창업자, 김장중 이스트소프트 회장, 김도균 탐앤탐스 대표)이다. 직간접적으로 경영에 복귀한 오너 2·3세(이서현 삼성물산 사장,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 어진 안국약품 부회장, 신동익 메가마트 대표, 윤재승 대웅제약 CVO, 김정수 삼양식품 부회장, 강정석 동아쏘시아 회장, 구본진 LF네트웍스 대표)를 포함할 경우 경영에 복귀한 인사는 모두 22명에 이른다.
논란 잠잠해지자 슬그머니 경영 복귀
이 중에서 법적 리스크나 갑질 등 불미스러운 일로 물러났다가 경영에 복귀한 인사만 8명이다. 에코프로 창업자인 이동채 회장이 대표적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회장은 떠오르는 차세대 경영자 중 한 명으로 꼽혔다. 25년 전 설립한 이차전지 회사를 매출 7조원대 대기업으로 키웠기 때문이다. 자회사인 에코프로비엠과 에코프로에이치엔을 더한 '에코프로 3형제'의 시가총액은 한때 현대차에 필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에코프로는 최근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에 빠졌다. 매출은 늘어났지만 영업이익과 순이익률은 시간이 갈수록 하락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23년에는 이 회장이 미공개 정보 이용 거래 등의 혐의로 검찰에 의해 기소됐다. 이 회장은 그해 5월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2년이 선고돼 법정 구속됐다. 회사 이미지가 크게 손상을 입었고, 주가는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했다.
이 회장은 지난 9월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경영에 복귀했다. 이후 중국 전구체 제조사인 GEM과의 업무협약식을 체결하는 등 활발한 경영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회사 실적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올 3분기 기준으로 에코프로의 누적 매출은 1년여 만에 반 토막이 났다.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 역시 흑자에서 적자로 돌아선 상태다. 창업자의 복귀 효과를 기대했던 시장은 크게 실망했다. 12월3일 기준으로 에코프로의 주가는 7만3800원에 마감했다. 장 중 30만7800원을 찍었던 지난해 중순과 비교할 때 76%나 하락한 셈이다.
어진 안국약품 부회장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故) 어준선 안국약품 창업주의 장남인 어 부회장은 2022년 대표직을 사임했다. 식약처 승인 없이 회사 중앙연구소에서 개발하던 고혈압약을 직원들에게 복용하도록 지시한 혐의 등으로 검찰에 의해 기소되고, 회사 이미지 역시 크게 실추된 데 따른 책임 통감 차원이었다. 전문경영인인 원덕권 대표가 어 부회장의 경영 공백을 메웠는데, 이 기간 동안 안국약품 영업이익은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하는 등 선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11월 어 부회장이 경영에 복귀한 이후 안국약품 실적 추이가 주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올해 9월 기준으로 안국약품의 누적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소폭 증가했지만, 순이익은 흑자에서 적자로 전환됐다. 그럼에도 안국약품은 매년 25억원 수준의 현금배당을 하고 있다. 이 회사 지분 43%를 보유한 어 부회장이 배당금의 절반 정도를 가져가고 있다는 점에서 뒷말이 나오고 있다.
경영 전문가들은 "경기 침체 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경영에 복귀한 이들 창업주의 행보가 자칫 기업 리스크를 키울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위기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하는 것이 강력한 오너십이다. 전문경영인과 달리 속도감 있는 의사결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면서도 "일부 오너는 사회적 논란을 잠재우고 평판을 되돌리기 위해 잠시 경영을 내려놓았다가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주주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책임 있는 자세가 어느 때보다 아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시사저널이 창업주 및 오너 2·3세가 복귀한 22개 기업의 감사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상당수 기업은 아직 창업주 복귀 효과를 누리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촌과 한국콜마, 에듀윌, 바디프렌드 등은 오너 경영체제 전환 이후에도 실적이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오히려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창업자 등의 복귀 이후나 최근 1년여간 실적이 반등한 곳은 보일러 업체인 귀뚜라미와 (주)대웅, 셀트리온, 삼양식품, 네이처리퍼블릭, 무신사, 위메이드, 탐앤탐스 등 8곳 정도였다. 그나마 이들 회사의 경우 올해 창업주가 복귀한 상황이어서 실적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 중에서도 귀뚜라미의 경우 2022년 최진민 창업주가 83세의 고령에도 경영에 복귀한 이후 실적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은 1조2372억원으로 4년 연속 사상 최대 매출을 경신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과 순이익 역시 각각 13.5%, 42.2% 증가해 주목된다.
90세에 경영 복귀한 윤세영 회장 행보도 주목
올해 91세로 경영에 복귀한 윤세영 태영그룹 창업회장의 행보도 눈에 띈다. 이 회장은 지난해 12월 그룹 지주사인 TY홀딩스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올해 4월부터는 이사회 의장 자리도 겸하고 있다. 2019년 3월 장남인 윤석민 회장에게 회장직을 물려주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 5년여 만이었다. 경영권 승계 이후 태영건설이 유동성 위기에 빠졌고, 결국 지난해 말 워크아웃(재무구조 개선 작업)에 돌입한 게 결정적이었다.
경영에 복귀한 윤 회장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블루원 용인CC와 상주CC, 블루원 다이너스CC 등을 잇달아 팔아 치웠다. 지난 8월에는 폐기물처리 업계 1위인 에코비트마저 2조7000억원에 매각했다. 사업 성과도 일부 나타나면서 태영건설은 완전자본잠식 상태에서 벗어났다. 지난 9월말 기준으로 태영건설의 누적 매출은 1조9983억원으로 예년 수준을 회복했다. 영업이익과 순이익 역시 적자에서 벗어나고, 주식 거래도 재개되면서 워크아웃 조기 졸업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고령임에도 구원투수로 나선 올드보이의 활약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재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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