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한 백브리핑 : 딥빽', 복잡한 국제 이슈를 김혜영 기자가 쉽고도 깊이 있게 설명해드립니다.
그 어떤 해외 사례와도 비교 불가인 이유
비상계엄이 선포될 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국회는 계엄 해제안을 의결했습니다. 국민들도 당혹스러운 상황 속에서 동요하지 않고, 헌정 질서를 회복하는 데 큰 힘을 보탰습니다.
과연 우리가 겪은 이 사태와 비슷한 해외 사례가 있을까요?
한국과 같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깊게 자리잡은 국가에서, 그것도 민주적 과정을 통해 권력을 잡은 민선 대통령이 느닷없이 계엄령을 선포했다가 불과 6시간 만에 해제한 사례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모아멘 구다 ㅣ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한국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투쟁을 했습니다. 피와 땀과 눈물로 민주주의를 얻어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계엄령이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유지된 사례는 역사상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물론 계엄령 자체만 놓고 보면, 세계 곳곳에서 계엄령은 최근까지도 선포되고 있습니다.
앞서 제가 미얀마 민족통합정부(NUG) 인권부 장관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여러 번 전해드린 바 있듯이, 2021년 2월 군부 쿠데타로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미얀마도 계엄령이 선포된 사례이긴 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단기간에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뿌리깊게 자리잡은 나라이고, 특히나 이번 사안이 워낙 돌출적이고 돌발적이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나 역사적, 시대적인 맥락에서도 다른 국가와 동일한 범주에 놓기는 어렵습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의 침공으로 2022년 2월 계엄령을 선포했고, 다니엘 노보아 에콰도르 대통령은 올해 1월 '마약왕' 호세 마시아스가 탈옥하고 6주 교도소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자 60일간의 계엄을 선포한 바 있지만, 이 역시 한국과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찾아보자면, 민선 출신의 지도자가 국가 안보 등을 명분으로 비상조치를 내렸다가 결과적으로 민주 시스템을 후퇴시켰다는 비판을 받는 사례들 정도인데, 이마저도 한국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모아멘 구다 ㅣ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한국인들은 자신의 권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상사태에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고, 그것 때문에 고통받았습니다. 하지만 가령 중동에서는 그런 과정이 없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룬 나라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튀르키예조차도 완전한 민주주의가 아니죠.
비상조치 취한 민선 대통령 ① 튀니지 대통령 카이스 사이에드
북아프리카 튀니지 사례부터 보겠습니다.
튀니지의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은 헌법학자 출신으로 최근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는데,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 척결을 명분으로 2021년 이른바 '명령 통치'로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의 기능을 사실상 정지시켰고, 그 이듬해에는 대통령에게 행정부 수반 임명권과 의회 해산권, 판사 임명권, 군 통수권까지 부여하는 개헌을 추진해 자신의 권한을 대폭 강화했습니다.
대선 기간에는 야당 대표를 비롯해 정부에 비판적인 주요 야권 인사들과 언론인들을 반역 음모 등 다양한 혐의로 투옥시켜 국제적으로도 큰 비판을 받은 바 있습니다.
장지향 ㅣ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 '빨리 경제 발전을 이루고 부패를 척결하겠다' 얘기를 하면서 시민단체 엄청 억압하고 야당 지도자들 다 잡아들이고 이랬었죠. 외골수에 자기가 맞다고 생각을 하고, 주변 얘기 전혀 안 듣고 그랬었어요.
모아멘 구다 ㅣ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아랍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보통 부족의 군사력, 준군사조직, 혹은 민병대의 지원을 받습니다. 계엄령 선포는 항상 마지막 단계입니다. 모든 준비가 끝난 후에야 선포되죠.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비상조치 취한 민선 대통령 ② 페루 전 대통령 후지모리
1990년부터 2000년까지 페루 국정을 이끌었던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그는 일본계 페루인이자 수학 교수 출신으로, 민주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됐습니다.
국영 기업의 민영화를 통해 경제 안정화를 추진하고, 강력한 치안 정책을 써서 대중의 신임을 얻었지만, 1992년 군대의 지원을 받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뒤 계엄령을 선포하고, 의회를 해산시켰습니다. 3선 연임에 성공한 그는 재임 중 페루에서 자행된 각종 학살과 납치, 국고 횡령 등의 여러 범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물러난 후 일본으로 도피했습니다.
이후 칠레에서 붙잡힌 후 페루로 범죄인 인도가 됐는데, 2009년에 징역 25년형을 선고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페루 검찰은 그의 범죄와 관련된 사망자가 최소 25명인 걸로 파악했습니다.
비상조치 취한 민선 대통령 ③ 필리핀 전 대통령 마르코스
1965년부터 21년간 필리핀을 철권 통치한 마르코스 전 대통령도 민선 대통령 출신입니다. 민족주의와 경제 발전을 내세우며 대중의 지지를 얻어 1969년 재선에 성공했지만, 1972년 공산주의 반란과 사회 혼란을 명분으로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마르코스가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 9년간 약 7만 명이 투옥되고 3만 4000명이 고문당했으며 32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는 이후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의 길을 열고, 의회를 해산시켰는데, 1983년 정치적 적수였던 베그니노 니노이 아키노 전 상원의원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국민들의 저항이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고, 결국 이는 1986년 '피플 파워' 민중 혁명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실각했습니다.
그는 하와이로 망명한 후 1989년 사망했지만, 그의 부인인 이멜다는 실각 당시 구두 3000켤레와 핸드백 888개를 보유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마르코스와 그 일가족의 부정축재에 대한 조사는 계속됐고, 필리핀 법원은 이멜다에게 최고 징역형인 77년형을 선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