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공포"…'비상계엄' 치하를 상상했다 [스프]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2024. 12. 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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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 연극 '타인의 삶'…지금 여기에도 '비즐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김수현 SBS 문화예술전문기자가 전해드리는 문화예술과 사람 이야기.
 

격앙된 표정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대통령, 국회 정문을 봉쇄하고 시민들과 대치하는 경찰, 국회 상공에 뜬 군 헬기, 국회 안에 진입한 무장 군인, 긴박하게 이뤄진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표결…. 그 밤을 보내고 난 뒤로 일상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습니다. 비상계엄은 해제됐지만, 언제 또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이 가시지 않습니다. 인터뷰를 위해 보러 간 연극에서도 저는 다시 '비상계엄'의 그림자를 느꼈습니다.

제가 본 연극은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공연되는 '타인의 삶'이라는 작품입니다. 원작은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가 감독한 독일 영화로 2007년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등 각종 영화제를 휩쓴 화제작이었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5년 전을 배경으로,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인 배우 크리스타 커플을 도청하는 비밀경찰 비즐러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당시 동독 정부는 수십만 명의 비밀경찰과 정보원을 동원해 주요 인사들을 감시했는데, 예술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성실하고 유능한 비밀경찰 비즐러는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을 낱낱이 지켜보다가 점차 그들의 삶과 예술에 감화되어 갑니다. 드라이만은 사회주의 이념에 비교적 충실하고 반정부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절친한 선배 연출가 예르스카가 동독 정부에 의해 7년 동안 활동을 금지당하고 자살하는 것을 보고 독재 정권에 분노하고, 저항 운동에 동참하게 됩니다. 감시 대상의 행적을 낱낱이 보고해야 하는 비즐러는 드라이만이 '반정부적인' 글을 쓰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거짓말까지 하며 조직을 배신하게 되죠.

배우 손상규가 직접 각색과 연출을 맡은 이 작품은 영화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관객을 사로잡습니다. 비즐러는 도청실에 하루종일 머무르는 사람이지만, 연극에서는 이를 비즐러가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동선을 지근거리에서 따라다니는 걸로 표현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는 느낌을 더욱 강화하고, 비즐러 자신도 모르게 이들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는 과정을 더욱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무대의 활용과 소품, 배우의 동선이 상상력으로 빈 곳을 채우는 연극의 매력을 더욱 배가시킵니다. 제가 본 날 주역이었던 윤나무(비즐러), 김준한(드라이만), 최희서(크리스타)는 물론이고, 1인 다역을 한 조역들의 연기도 훌륭해서 110분이 금세 지나버렸습니다.

이 연극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따뜻한 인간애와 예술의 힘,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자유에의 의지를 이야기하면서, 한편으로는 독재정권 치하에서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겪는지도 보여줍니다. 아마 12월 3일 전에 이 연극을 봤다면, 저는 이를 먼 나라 얘기로만 여겼을 겁니다. 그런데 더 이상 이건 저와 동떨어진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작금의 한국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 연극에는 마침 저와 비슷한 직업을 가진 '하우저'라는 언론인도 나옵니다. 그는 항상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죠. 하우저뿐 아니라 비판적 성향을 보이는 예술가들은 활동을 금지당하거나 체포되고, 정권의 구미에 맞는 예술 작품들만 무대에 올라갈 수 있고, 시민들은 일상 대화를 할 때조차 혹시나 무슨 빌미를 잡히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권력자들은 사회주의 조국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웁니다.

그날 밤 '포고령 1호'가 그대로 시행됐다면? '일체의 정치 활동을 금하고',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 선동을 금한다' 등등의 조항이 있었습니다. 포고령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14조에 의하여 '처단'한다고도 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저는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연극을 보면서 '비상계엄' 치하의 세상을 상상했고, '뼛속까지 스며드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sh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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