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내란] 사법부, 역대 '계엄 포고령'에 연달아 '위헌·위법·무효' 판결

코트워치 2024. 12. 6.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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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뉴스타파함께재단과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가 연대 협업하는 한국독립언론네트워크(KINN) 회원 언론사인 ‘코트워치’(https://c-watch.org/)가 취재했습니다.(뉴스레터 구독)

윤석열의 반헌법적 비상계엄은 다행히 실패했다. 만약 성공했다면, 6개항 ‘포고령 제1호’로 대한민국은 쑥대밭이 됐을 것이다. <코트워치>는 1972년 10월 ‘박정희 유신’ 등 과거 비상계엄 상황에서 나온 ‘포고령’와 관련된 법원 판결 120여 건을 발굴, 분석했다. 이를 통해 ‘윤석열의 내란’이 왜 ‘위헌·위법·무효’인지 확인했다. <편집자주>

①사법부, 역대 '계엄 포고령'에 연달아 '위헌·위법·무효' 판결

지난 3일 밤 10시 30분 대통령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현행 계엄법 제9조는 아래와 같다.

“계엄사령관은 군사상 필요할 때에는 체포·구금·압수·수색·거주·이전·언론·출판·집회·결사 또는 단체행동에 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 이 경우 계엄사령관은 그 조치 내용을 미리 공고하여야 한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계엄사령관은 이 조항에 따라 ‘군사상 필요할 때’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제한하는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 바로 ‘포고령’이다. ‘계엄사령부 포고령’을 위반하면 누구라도 처벌받는다.

지난 3일 밤, 대통령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 직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박안수 육군참모총장 명의로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가 나왔다. “국회와 정당 등 일체의 정치적 활동을 금한다”는 등 6개 조항이었다.(아래 전문 참조)

“군사상 필요한 때”가 유무죄 기준

‘포고령 제1호’가 나오자 ‘위헌’, ‘위법’ 주장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코트워치>는 윤석열의 포고령이 ‘위헌·위법’한 것인지, ‘위헌·위법’하다면 왜 ‘위헌·위법’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120건의 과거 법원 판결문을 발굴, 분석했다. 1972년 10월 유신 그리고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당시 나온 계엄포고로 실형을 받은 사람들이 40년이 지난 2016년경부터 진행한 재심 사건 판결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은 대부분 계엄포고가 ‘위헌·위법·무효’라고 결론나면서 원심이 뒤집혀 무죄를 선고받았다. 대법원은 이 두 번의 계엄포고가 나올 때 상황이 법에 명시된 ‘군사상 필요할 때’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한민국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이번 ‘윤석열 계엄’까지 총 17번 계엄(비상계엄, 경비계엄)을 경험했다. <코트워치>가 그중 1972년 유신 계엄과 1979년 부마항쟁 당시 계엄에 주목한 이유가 있다. 두 번 모두 윤석열처럼 현직 대통령(박정희)이 자행한 ‘친위 쿠데타’ 성격의 계엄이기 때문이다. 100여 개 재심 판결로 ‘위법 계엄’이 확인된 것도 이유다. ‘윤석열 계엄’이 왜 위법한 것인지를 확인하는 좋은 증거가 된다고 봤다.

1972년 10월 17일 ‘계엄포고 제1호’를 발표하는 노재현 계엄사령관.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법원, “‘군사상 필요할 때’ 좁게 새겨야”

사법부는 그동안 계엄법의 ‘군사상 필요할 때’라는 조건을 엄격하게 해석해왔다. 비상계엄에 따른, 계엄사령관의 ‘특별한 조치’(포고령)는 제한적으로만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시계를 1972년으로 돌려보자.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가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계엄사령관에 임명된 노재현 육군참모총장이 ‘계엄포고 제1호’를 발표했다. 계엄포고 제1호 1항은 “모든 정치활동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한다”였다.

허모 씨는 1972년 11월 몇 사람과 모여 도박을 하다가 ‘집회 금지 위반’으로 부산경남지구 계엄보통군법회의(군사법원) 재판에 넘겨졌고, 이듬해 대법원에서 징역 8월이 확정됐다. 허모 씨는 그로부터 40년 뒤인 2013년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을 맡은 창원지법 제1형사부는 처벌 근거가 된 ‘계엄포고’의 정당성을 먼저 따졌다.

재판부는 1972년 10월 유신 당시 박정희의 대국민 담화 내용부터 정리했다. ‘계엄포고 제1호’가 법에 명시된 ‘군사상 필요’에 따라 나온 것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다.

근래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기존세력 균형관계 및 남북한 관계는 심대한 변화에 직면하고 있는바,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나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모든 체제에서 새로운 체제로의 일대 유신적 개혁이 있어야 하는데, 기존 정당과 대의기구를 통한 정상적인 방법의 개혁을 시도한다면 혼란만 심해질 뿐이므로 부득이 비상조치로써 체제 개혁을 단행할 수밖에 없다.
- 박정희 대통령 특별선언(1972. 10. 17. 관보 6280호)

1972년 대통령 박정희는 ‘개혁’을 위해 부득이 ‘비상계엄’과 ‘계엄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국가세력 척결’을 명분으로 계엄을 선포한 윤석열과 비슷했다. 하지만 2016년 재판부는 아니라고 봤다. 1972년 10월은 ‘군사상 필요할 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군사상 필요’는 “좁게 새겨야 한다”고 했다.

‘군사상 필요’는 계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모든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상당한 무력을 갖추고 있어 제압을 위해 군사력 동원이 필요하거나, 상대방이 군이나 국가기관에 고도로 현실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경우 등으로 좁게 새겨야 한다.
- 박정희 유신 계엄포고 관련 창원지법 판결문 (2013재노251)

2016년 창원지법은 1972년 ‘박정희 계엄포고’가 ‘위헌’이며 ‘무효’라고 판단했다. 처벌 근거였던 계엄포고가 ‘위헌·무효’되면서 허 모 씨는 43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위헌이고 위법하여 무효이다”

사건을 넘겨받은 대법원은 한 발 더 나아간다. 2018년 12월 13일 대법원은 허 모 씨에게 최종 무죄를 선고하며 ‘1972년 박정희 유신 계엄포고’가 갖는 정치적 목적을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1972년 박정희 유신 계엄포고의 내용은) 기존의 헌정 질서를 중단시키고 유신 체제로 이행하고자 그에 대한 저항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 박정희 유신 계엄포고 관련 대법원 판결문 (대법원 2016도1397)

또 창원지법 재판부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국내외 정치상황 및 사회상황이 ‘군사상 필요할 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군사상 필요할 때’는 “극도로 사회 질서가 혼란해진 상황이 현실적으로 발생해 경찰력만으로는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한 때”, “군병력을 동원해 직접적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때”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고 결국 1972년 10월 박정희의 유신 계엄포고는 “위헌이고 위법해 무효”라고 결론내렸다. 계엄포고가 헌법과 계엄법이 정한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했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내용이었다고 했다.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해 발표된 계엄포고문. (출처: 전자관보)

“논도 갈고, 밭도 갈고, 대통령도 갈아보자”

허모 씨에 무죄를 선고한 이 대법원 판결은 1972년 박정희 유신 계엄포고에 대한 대법원의 첫 판단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이 판결을 근거로 ‘1972년 박정희 유신 계엄포고 위반’으로 처벌받았던 대한민국 국민 100여 명이 재심에서 줄줄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코트워치>는 해당 판례(2016도1397)를 인용한 ‘계엄법 위반’ 또는 ‘포고령 위반’ 재심 판결문 120건을 확보해 살펴봤다. 아래는 1972년 유신 계엄포고 5항을 위반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사례의 일부다. 5항의 내용은 “유언비어의 날조 및 유포를 금한다”는 것이다.

“논도 갈고, 밭도 갈고, 대통령도 갈아보자.” (징역 1년)
“별 꼴 다 보겠네. 혼자 다 해 먹으려고 자리를 내놓지 않고 헌법을 개정한다.” (징역 2개월)
“씹할 놈이다. 독재 정권이다.” (징역 6개월)
“이번 비상 계엄령 선포는 정권을 연장하려는 야비한 짓이다.”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
“이번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은 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다.”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중앙정보부에서 데모 학생을 잡아 전기 고문을 하고 상처에 고춧가루를 뿌린다. 현 정부는 물러나야 한다. 신문과 방송은 거짓으로 믿지 않는다.”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이승만 독재가 4·19로 무너지고 5·16이 일어나서 개헌을 하고, 계엄령 선포로 국회가 해산하여 서글픈 생각이 든다. 이런 민주주의는 처음 보았다.”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

이들은 집에서, 잡화점에서, 술집에서, 열차에서, 거리에서, 파고다공원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가 군법회의(군사법원) 재판에 넘겨져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40년이 넘게 흘러 2018년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에야 무죄 판결을 받았다. 모두 1972년 10월 박정희의 유신 계엄 자체가 “위헌, 위법, 무효”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무죄 판결을 받을 당시 피고인의 상당수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허모 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대법원 판례는 다른 계엄 관련 재판 결과와도 비슷했다. 1979년 부마항쟁 당시 포고령 위반 혐의로 실형을 받았던 김영일 씨(2018년 사망) 사례가 대표적이다.

‘부마항쟁’ 계엄포고도 ‘위헌·위법·무효’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 체제에 저항하는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는 부산 시내와 마산으로 번진다.

이틀 뒤인 18일, 대통령 박정희는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당시 부산지역 계엄사령관 박찬긍 육군군수사령관은 18일 0시 ‘계엄포고 제1호’를 발표한다. 계엄포고 4항은 “유언비어 날조·유포와 국론분열 언동을 엄금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소속 간사였던 고 김영일 씨는 계엄포고 4항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1981년 유죄 판결(징역 2년)이 확정됐다. 그가 2016년 청구한 재심 사건에서 법원은 계엄포고가 “위헌이고 위법해 무효”라고 판단했다. 원심이 뒤집혀 무죄가 선고됐다. 아래는 법원 판결의 일부다.

(계엄포고 제1호 제4항) 조치를 취해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해야 할 정도로 군사상 필요성이 있었다고 인정할 아무런 자료가 없으므로, 구 계엄법 제13조가 정하는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포된 것이어서 위법·무효라 할 것이다.
- (부산고법 2016재노15)

(계엄포고 내용은) 이른바 유신 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인 부마민주항쟁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고, 당시 국내외 정치상황과 사회상황이 구 계엄법 제13조에서 정한 ‘군사상 필요할 때’에 해당했다고 보기 어렵다.
-  (대법원 2016도14781)

이 사건 재판의 전제가 된 계엄포고는 위헌이고 위법한 것으로 무효이다.
- (대법원 2016도14781)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 선포된 비상계엄과 계엄포고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에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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