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 6시간 전후 결정적인 순간들…저돌적 대통령·우왕좌왕 계엄군에 맞선 시민과 야당
2024년 12월3일 밤 10시25분,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무시무시한 문장을 뱉어냈다. 윤 대통령은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이후 45년 만에 발령된 비상계엄령이었다.
윤 대통령은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국회를 “범죄자 집단 소굴”이라고 저주했고, 더불어민주당을 향해서는 “오로지 탄핵과 특검, 야당 대표 방탄으로 사법 행정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전복을 기도하고 있다”는 극언을 쏟아냈다. 하릴없는 드립이나 날리며 대통령 담화를 기다리다 그대로 얼어붙었다. ‘비상계엄 정국’의 시작이었다. 파업에 복귀한 전공의들을 ‘처단’까지 하겠다는 대통령의 입장문은 과연 누가 썼을까. 윤석열 캠프에서 정책업무를 총괄했던 신용한 교수는 “정제되지 않은 언어, 사리에 맞지 않는 표현들이 들어갔다는 것은 정상적인 참모 라인에서 입장이 정리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며 “전문 참모가 쓴 문장들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급박하게 쓰여졌거나 강한 동기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부랴부랴 노트북을 펼치며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시나 사변에 준해야 한다는 비상계엄의 요건은 성립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야당의 국무위원과 검사들에 대한 탄핵, 예산 삭감을 이유로 꼽았다. 탄핵은 찬반이 엇갈리더라도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문제다. 군대를 동원할 일이 아니다. 아무리 부당한들 예산이 삭감된다고 국회를 해산해야 한다거나 점령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공무원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비상계엄 선포는 국무회의 심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20명에 달하는 국무위원들이 납득했단 말인가. 길었던 의문은 ‘서울의 밤’ 6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풀렸다.
대통령실 안보 라인도 ‘깜깜이’
윤석열 정부의 전체 국무위원은 20명이다. 11명 이상의 국무위원이 참석해야 개의가 가능하다. 2024년 12월5일 현재까지 비상계엄 선언 당일, 언제쯤 국무위원들이 대통령실에 모두 모였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당일 울산에서 일정이 있던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서울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8시 무렵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밤 9시 무렵 국무위원들이 대통령실에 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1명 이상이 모였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한덕수 국무총리, 최상목 기획재정부 장관, 김용현 국방부 장관, 이상민 행안부 장관,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의 참여는 확인됐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과 김영호 통일부 장관도 참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 김완섭 환경부 장관,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 강도형 해양수산부 장관 등은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아예 ‘소집 연락을 못 받은’ 장관도 있었고, 정진석 비서실장과 신원식 안보실장도 회의 개최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 대목은 중대한 외교적 실패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다. 행안부 장관이 아닌 국방부 장관이 건의한 계엄은 내치의 문제가 아닌 ‘안보 사태’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신원식 안보실장, 김태효 안보실 1차장, 정진석 비서실장 등 대통령실 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멤버들이 모두 ‘패싱’당한 셈이다. 대통령의 안보라인이 국방부 장관이 건의한 비상계엄을 몰랐다는 것은 미국과 동맹관계의 실무를 맡고 있는 라인이 사실상 무능력자들임을 인증한 꼴이다. 과거 12·12 사태 당시에도 미국과의 협의, 통보 문제가 외교 문제로 비화됐다. 유엔사나 한미연합사 입장에서 보면, 이번 비상계엄령은 군부 내 일파가 대통령의 독단적인 지시를 받아 저지른 군사행동이다.
복수의 국무위원들은 비상계엄에 대한 대통령의 뜻이 이미 확고했고, 형식적 들러리를 서는 분위기였다고 언론에 전하고 있다. 정족수 성원이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린다. 정족수 성원이 안 된 상태에서 국무회의가 개시되고 심의가 이뤄진 것이라면 그 자체로 위법이다. 또한 비상계엄 선포 이후 벌어진 일련의 과정이 ‘내란’에 해당한다면, 이 국무회의 참석자들은 ‘내란죄 공범’이 될 수 있다. 내란 모의에 참여, 지휘, 그 밖의 중요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금고형에 처해진다. 이 밖에도 국무회의는 여러 가지에서 의문이 든다.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해제하며 “국무회의를 소집했지만 새벽이라 아직 의결정족수가 충족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비상계엄을 심의한 국무위원들이 심의를 마치고 해산한 뒤 새벽에 다시 모였다는 설명인데 국가의 비상사태가 진행 중이던 6시간 동안 국무위원들이 어디서 무얼 했는지 복기가 필요하다.
들러리 선 국무위원들, 내란죄 공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언 20여 분 뒤, 여당 한동훈 대표는 페이스북 메시지로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헌법학자들은 ‘국회가 과반수로 계엄 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점과 ‘국회의원들의 국회 출입을 막거나 회의 소집을 막으면 그 자체로 내란범죄가 성립된다’는 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준비되지 않은 비상계엄의 시작은 혼란스러웠다. 비상계엄 선포시 반드시 수반돼야 할 조처들이 이행되지 않았다. 우선, 국무회의 개최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고, 국회에 계엄 선포가 통보되지도 않았다. 비상계엄 선포와 함께 발표됐어야 할 계엄사령관은 선포 1시간여 뒤에야 알려졌다. 계엄법상 계엄 선포시에 시행일시, 시행지역 등을 공고해야 하는데 이조차도 생략됐다. 군사전문가인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에 따르면 애초 비상계엄 계획은 “밤 11시까지 1공수대 특임여단이 국회를 점령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참수작전 등 특수전을 주로 수행하는 707특수임무단이 국회를 장악해 “조를 이뤄 우원식, 이재명, 한동훈 등을 체포한다든지 통제하려 했던 것”이 계획이었다. 이들에게 하달된 명령은 ‘11시까지 국회를 점령하라’는 단편 명령이었고, 점령 이후 통제 계획은 현장에서 하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기자의 눈으로 여의도 하늘에 1공수 특임여단 장병들을 실은 헬기가 보인 시각은 12월3일 밤 11시40분이 넘어서다. 국회에 군 병력이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48분이었다. 이 과정은 지휘체계 혼선과 준비되지 않은 비상계엄을 수행하는 지휘관들의 무능과 태만이 겹친 것으로 풀이된다. 당일 현장에서 본 1공수대와 707특수임무단 대원들도 우왕좌왕할 뿐 국회를 실질적으로 점령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일부는 현장행, 일부는 신문사 복귀
군 병력이 국회에 도착하기 20여 분 전,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 1시간이 지나서야 계엄사령관이 발표되고 계엄 포고령 제1호가 발표됐다. 계엄사령부는 포고령을 통해 “2024년 12월3일 오후 11시부로 대한민국 전역에 다음 사항을 포고한다”며 1항에서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2항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선동을 금한다”, 3항에서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고 밝혔다. 4항에선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행위를 금한다”며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고 했다. 마지막 항에서 계엄사는 “반국가세력 등 체제전복세력을 제외한 선량한 일반 국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며 “이상의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계엄법 제9조(계엄사령관 특별조치권)에 의하여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14조(벌칙)에 의하여 처단한다”고 했다.
모든 언론과 출판이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는 초현실적인 현실 앞에서 언론사의 움직임은 긴박하고 비장했다. 45년 만의 비상계엄을 맞은 언론사들은 구성원들에게 지침을 하달했다. 작지만 전방위적인 취재 영역을 갖고 있는 한겨레21 기자들도 내근자와 현장 취재 기자를 분리해 속보 체제를 갖췄다. 기자들은 조를 짜서 흩어졌다. 일부는 국회로 이동하고, 일부는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로 이동했으며, 일부는 자택에서 대기하며 신문사 봉쇄 상황에 대비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집회·시위는 물론 모든 언론과 출판이 계엄사 통제 아래 놓인다. 신문사가 봉쇄되기 전에 사무실을 사수해야 했다. “저도 현장에 갈까요?” 그걸 왜 이제야 묻느냐는 듯 편집장이 답했다. “그래.”
밤 11시30분 무렵 국회로 가는 서강대교 위에 멈춰 섰다. 여기서 내리겠다는 말에 택시 기사 아저씨는 “여기는 유턴도 안 되고 그럼 나만 갇히는데…” 하면서도 “기자 양반이신 거 같은데 어서 가보세요. 뭔 개벽이 났길래 계엄이랍니까. 지가 박통도 아니고”라고 했다. 비슷한 시간 편집장은 ‘아직까지는 회사 출입에 문제가 없는 상황’이라고 알렸다. 기자들이 속속 회사로 모여들었다. 뉴스룸 국장단은 “주요 부서 부서장들은 짐을 챙겨 오늘 밤 회사로 들어와주시라”라고 공지했다.
철 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들리기도 하는 비상계엄에 대해 애초 이 정부는 “머릿속에 아예 그런 단어가 없다”고 했었다. 김용현 국방부 장관이 인사청문회에 섰던 2024년 9월2일, 야당 의원들은 군 주요 요직을 동문인 충암고 출신들로 채운 것이 계엄령을 ‘빌드업’하는 과정이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김 장관은 “거짓 선동”이라고 맞섰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민주당 의원들을 향해 “뭘 잘못 먹고 얘기하느냐” “황당하다”며 김 장관을 엄호했다. 김 장관은 “계엄을 계획한 적도, 건의할 생각도 없다”고 했다. 그랬던 김 장관이 12월3일 대통령에게 계엄을 건의했고, 대통령실 소집 지시가 ‘개각 관련 논의’인 것으로 알았던 국무위원들을 설득해 비상계엄을 밀어붙였다. 6시간 ‘서울의 밤’이 끝난 뒤에는 “중과부적이었다”는 말도 남겼다.
무능과 혼선의 빈틈 파고든 시민과 야당
45년 만에 계엄령을 맞이했던 밤, 하늘에서 싸라기눈이 날렸다. 도로 위는 한적했고 라디오와 티브이(TV)만 시끄러웠다. 일상을 찢고 들어온 단어 ‘계엄’에 앵커도 기자도 횡설수설했다. “계엄령이 내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 저도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한겨레21 기자들이 국회에 도착한 밤 10시58분께, 벌써 경찰들이 정문을 막고 서 있었다. 평상시 누구든 자유롭게 드나들던 공간이 그날은 굳게 닫혀 있었다. 시민들은 소리 지르며 항의했다. “너희가 뭔데 국회를 막냐.” “대통령의 잘못된 지시를 돕는 거다!” 방패를 세우고 일렬로 선 경찰을 시민이 몸으로 밀며 “국회로 들어가자!”고 소리쳤다. 아수라장처럼 얽힌 시민과 경찰 위로 또 눈이 흩날렸다.
국회 봉쇄를 주도했던 것은 서울경찰청 소속 경력들이었다. 계엄사령부는 서울경찰청장의 지휘에 따라 지방경찰청 경력을 배속받아 국회를 봉쇄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인원의 출동대기를 의미하는 갑호비상령이 필수다. 그러나 갑호비상령 발동 권한을 갖고 있는 조지호 경찰청장은 비상계엄 선포 계획을 미리 알지 못했다. 조 청장은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비상계엄이 선포되기 약 4시간 전 대통령실로부터 ‘사무실에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 비상계엄령 선포는 “뉴스 보고 알았다”고 말했다. 졸지에 서울경찰청장은 계엄사령관과 경찰청장 2명에게 지시받는 상황에 빠졌다. 이 무능과 혼선의 우왕좌왕 시간이 어쩌면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지킨 발판이 됐다. 정확한 명령을 하달받지 못한 경찰이 대오를 촘촘하게 갖추지 않은 사이 격앙된 시민들이 국회 담벼락에 달라붙었다. 경찰 대오가 일시에 뒤로 밀려났다. 문이 열리면서 몇몇 시민이 안으로 들어갔다. “압사당하니까 그만 미세요”라는 말이 반복됐다. 시민들은 “당신들이 문을 열면 된다”고 소리쳤다.
기자들은 정문을 포기하고 측면 담장을 넘어 국회 안으로 들어갔다. 우원식 국회의장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월담해 국회에 진입했다. 국회의사당 로텐더홀 앞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본회의장 안으로 진입하려는 무장 군인을 시민들이 몸으로 막았다. 유튜버들이 실시간으로 그 상황을 중계했다. 군인들도 카메라를 의식한 듯 눈에 띄는 폭력 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몸싸움하는 과정에서 “군인에게 다리를 차였다”는 시민도 적지 않았다. 무장 군인의 등장에 위협감을 느낀 몇몇이 “광주 때처럼 발포하는 것 아니냐” “무섭다”고 웅성거렸다.
계엄군 동선까지 사발통문… 즉각 대응
밤 11시40분 무렵 시작된 대치는 1시간 넘게 이어졌다. 시민들이 출입구를 등지고 서서 다가오는 군인들을 몸으로 밀어냈다. 그렇게 시간을 버는 사이 국회의원들이 속속 도착해 본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12월4일 0시5분께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모든 국회의원은 본회의장으로 모여달라”고 밝혔다. 국회 본청 안쪽에선 보좌진이 집기류와 나무 칸막이 등을 가져와 문을 막았다. 0시35분, 안으로 들어가려는 군인들의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정문·후문을 가리지 않고 밀고 들어갔다. 0시6분께 더불어민주당 보좌진협의회는 “공수부대가 국회 후문으로 진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후문 방어를 위해 일부 보좌진들께서는 지금 즉시 본청 후문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공지했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동선을 서로에게 소리쳐 알렸다. 건물 곳곳에 흩어져 군인들의 이동 동선을 파악한 뒤 ‘군인들이 이동한다’ ‘이쪽으로 와달라’고 소리쳤다.
0시35분께, 계엄군은 건물을 끼고 돌아 청사 측면에서 국회 본청 진입을 시도했다. 몇몇 군인이 유리창을 깨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군인을 향해 “제발 그만두라” “위법한 명령을 따르느라 국민에게 죄짓지 말라”고 소리쳤다. 어떤 이는 계엄군들 앞에서 태극기를 펼치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외쳤다. 또 다른 이는 애국가를 불렀다. 안으로 들어가려는 군인을 시민들이 잡아당기고 군인들이 그 손을 뿌리쳤다. 깨진 유리창 조각이 온 사방에 흩어졌다. 0시40분께 민주당 보좌진협의회는 “국회 경내에 계신 보좌진분들께서는 의원님들을 모시고 지하통로를 이용해 국회 본청으로 집결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공지했다. 그러나 계엄군은 0시45분께 로텐더홀에 도착했다. 민주당 보좌진이 군인을 향해 소화기를 뿌리며 대치했다.
상황이 반전된 건 새벽 1시 무렵이다. 1시1분께 국회 본회의장에서 비상계엄 해제 결의 요구안이 가결됐다. 재석의원 190명 전원 찬성이었다. 이 속보를 전해 들은 시민들은 일제히 “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비상계엄 해제에 참석한 국민의힘 의원은 모두 18명이다. 대다수 국민의힘 의원들은 ‘당사로 모이라’는 추경호 원내대표의 메시지를 받고 당사에 모여 있었다. 이에 대해 비상계엄 해제 투표에 참석한 김상욱 국민의힘 의원은 “당대표가 국회 본회의장으로 모이라는 문자를 보냈음에도 계속 당사로 모이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낸 추 원대대표가 “사실상 윤석열 대통령과 공범”이라고 말했다.
소화기 뿌려 시간 벌고, 해제 요구안 가결
군인들 기세도 주춤했다. 시민들은 “장병 여러분,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 “다시는 이런 일에 동원되지 말라”고 외쳤다. 그리고 국회를 향해 ‘윤석열 퇴진하라’ ‘윤석열 체포하라’ 등의 구호도 외쳤다. 국회 앞에서 잠시 대기하던 군인들은 1시11분께부터 조금씩 철수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의 소지품으로 추정되는 케이블타이 등도 바닥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국회의원을 체포하려던 도구가 아니냐는 추측이 돌았다.
2018년 논란이 된 국군기무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의 ‘계엄문건'엔 ‘국회의원 대상 현행범 사법처리로 의결 정족수 미달 유도'가 적혀 있었다. 국회로 모인 의원 상당수를 체포해 계엄 해제를 의결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취지였다. 민주당은 건물 안으로 진입한 군인들이 이재명 대표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우원식 국회의장을 체포하려 한 시시티브이(CCTV) 영상을 봤다고도 주장했다. 다만 실제 CCTV 영상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새벽 4시27분, 윤석열 대통령은 계엄을 해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직 국무회의 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잠시 뒤인 4시30분 한덕수 국무총리는 국무회의를 통해 계엄 해제안을 의결했다고 밝혔다. 6시간이 그렇게 끝났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박준용 기자 juneyong@hani.co.kr·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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