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완벽한 불확실성의 시간’으로 진입[계엄령 이후 한국 경제①]
[커버스토리 : 계엄령 이후 한국 경제①]
“단기적으로는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의 불신이 서서히 스며들겠죠. 그게 우려스러운 겁니다.”
12월 3일 한밤의 비상계엄 사태가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을 묻자 한 금융투자업계 대표는 이렇게 답했다. 그는 몇몇 사장들 간에는 “‘시국 선언문’이라도 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온다고 말했다. 그들이 가장 불안해하는 건 이날의 정치 리스크가 가져올 초유의 불확실성이었다.
정부가 불지핀 ‘밸류다운’
12월 3일 밤 10시 27분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대한민국의 정치적·경제적 시스템을 뒤흔들었다.
이날 세계 주요 외신의 헤드라인에는 “한국, 계엄령 선포”란 충격의 뉴스가 등장했다. 윤 대통령의 의중이 무엇이었든 간에 이날의 정치 파동은 한국의 국가 신인도를 1970년대로 돌려놓기에 충분했다.
‘서울의 봄’으로 군사독재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뒤 한국의 자본시장은 글로벌 시장에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구조적 문제일지언정 지정학적 위험이나 정치적 불안정 탓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기까지 긴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이날 야당 대변인에 총부리를 겨눈 특수부대원과 국회 앞에 바리케이드를 친 계엄군, 이들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글로벌 투자자와 시장 참여자들에게 원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다시 각인시켰다.
AP뉴스는 “이례적 계엄은 1980년대 이래로 한국에서 사라졌던 권위주의 지도자 시대로의 회귀였다”고 보도했으며 블룸버그통신은 이날 윤 대통령의 계엄령 도박이 한국 금융시장을 바라보는 투자자들의 인식에 악영향을 끼쳤다며 이번 사건이 이미 저평가되고 있는 한국의 주식시장이 코리아 디스카운트에서 벗어나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영국, 독일, 미국 등 주요국에서 자국민에게 한국 여행 주의보를 발령했고 일각에선 일부 환전소에서 원화를 받지 않는다는 안내문까지 내걸었다. ‘K콘텐츠’로 세계에 명성을 날리던 한국 대외 신인도의 추락이자 대한민국이 불확실성의 그림자에 갇힌 순간이었다.
불신은 즉각 한국 경제를 겨냥했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 원·달러 환율은 이날 장 마감 기준 1402.90원 수준에서 1442원까지 치솟았다. 전례 없는 수준의 원화 약세였다. 국내 증시 야간선물옵션 지수가 5%대 급락세를 보였으며 미국 증시에 상장된 한국 관련 상장지수펀드(ETF) 역시 큰 폭의 하락을 맞닥뜨렸다. 암호화폐 시장에서도 글로벌 중 ‘김치 코인’의 가격만 급락하며 한국의 경제 불확실성을 선반영했다.
윤 대통령이 대국민 긴급담화를 시작한 지 2시간 40분 만인 새벽 1시 여야 국회의원 190인이 합심해 비상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요동치던 숫자들은 차츰 진정세를 보였다. 다음 날 오전엔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김병환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등 거시경제를 담당하는 주요 인물 4인이 당분간 주식·채권·단기자금·외화자금시장이 완전히 정상화될 때까지 유동성을 무제한으로 공급하겠다고 밝히면서 금융시장의 충격 강도는 시장 참여자의 예상보다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불신은 서서히 스며든다’고 했다. 장기적인 경제 전망에는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증권의 알리 시코 칸은 “고객들은 한국 ETF 등에 대한 매도(숏)를 통해 하방 압력에 대비하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즈호증권의 아시아 매크로 리서치 책임자인 비슈누 바라단은 “이번 계엄령 선언이 한국 자산에 정치적 리스크를 남겼다”며 “한국 자산의 저평가 현상이 지속될 가능성이 있고 계엄령 사건이 이를 극복하는 데 어려움을 더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국 경제의 위기가 심화하는 과정에서 정치 리스크가 설상가상 악재를 더했다는 평이었다.
그의 말대로 최근 한국 경제는 저성장의 늪에서 동아줄을 찾는 시점이었다.
발목을 잡는 저출산·저성장, 사상 최대의 가계부채와 자영업의 위기는 고착화 됐고 코스피 대장주 삼성전자의 주가마저 급락했다. 롯데와 포스코 등 한국의 주요 기업과 경제의 근간이 되어준 석유화학, 철강 등 기간산업들이 미·중 갈등의 여파 속에서 하나둘씩 흔들리는 시기였다.
갈수록 격화하는 AI 경쟁, 내년부터 본격화될 ‘트럼프 스톰’, 보다 심화할 관세 및 공급과잉의 전쟁은 한국 기업과 경제가 맞닦뜨린 위기의 파고였다. 기관과 외국인 투자자 역시 한국 자산에 관심이 줄어드는 시점에 터진 계엄령 사태는 정부가 불지핀 ‘밸류다운’이 분명했다.
기업들도 초유의 사태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재계는 환율과 주가 동향을 주시하며 이번 사태로 정국 불안이 커진 만큼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비한 대응 전략 마련에 집중하고 있다. 한 기업 관계자는 “당장 계약 취소와 같은 직접적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번 사태로 국가 대외 신인도 하락이 불가피해지면서 장기적으로 수출 기업들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우려된다”고 밝혔다.
문제는 앞으로의 시간이다. 야당이 추진하는 탄핵이든 개헌이든 최소 6개월에서 1년 이상 한국 경제를 정치적 리스크에 묶어둘 가능성이 크다. 세계가 ‘트럼프 스톰’과 ‘차이나 쇼크’에 대응책을 마련하는 동안 우리는 대내외 악재를 짊어진 채 한국 역사상 ‘가장 완벽한 불확실성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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