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 지옥에 빠졌다, K드라마의 앞날은?
‘제2의 〈오징어 게임〉’은 보이지 않는다. 〈오징어 게임〉 시즌2(12월26일 공개)가 먼저 나올 예정이다. 지난 3년간 나온 대작 OTT 드라마는 대부분 흥행 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메가 히트작만 부족한 게 아니다. 업계 전체가 ‘보릿고개’다. 한국 드라마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놀랍게도 K드라마의 산파로 여겨졌던 넷플릭스가 그 주범으로 꼽히고 있다.
〈오징어 게임〉(2021)의 흥행 기록은 다른 작품과 궤가 다르다. 넷플릭스가 제작 단계부터 관여하는 ‘오리지널 드라마’ 중 〈오징어 게임〉의 전 세계 누적 시청 시간은 약 23억 시간이다. 한국 작품 중 2위인 〈지금 우리 학교는〉(2022)은 그 3분의 1 이하인 약 6억6000만 시간, 3위 〈더 글로리〉(시즌1 2022·시즌2 2023)는 5억6000만 시간 시청됐다. 4위부터는 〈오징어 게임〉 시청 시간의 10% 이하인 1억 시간대로 떨어진다. 국가별 흥행 성적도 편차가 크다. OTT 시청률 집계 업체 플릭스패트롤은 각 작품의 국가별 시청률 순위와 톱10에 오른 기간에 따라 점수를 매긴다. 2021년 TV쇼 부문 1위를 차지한 〈오징어 게임〉은 국가별로 고른 인기를 얻었으나 여타 대작들은 남미와 동아시아 등지에 인기가 쏠렸다. 올해 이 업체 집계에서 세계 10위권에 한국 작품은 없다.
뜻밖의 상황이다. 〈킹덤〉(2019), 〈마이 네임〉(2021) 등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가 좋은 성적을 거두고 〈오징어 게임〉이 정점을 찍자 ‘K드라마의 성공 공식’은 윤곽이 드러나는 듯했다. 국내에서는 비주류였던 재난·공상과학·미스터리·스릴러 등 ‘장르물’이 흥했다. 피가 튀기고 살점이 날아가는 등 노골적 묘사가 인기였다.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가 아니라 제 잇속을 챙기는 다수 인물이 서사를 이끌었다. K드라마는 이런 할리우드 특유의 문법에, ‘한국적이지만 보편적인’ 요소를 일부 가미한다. ‘인정에 흔들리는 악당’ ‘인간성을 지닌 괴물’ 등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꼬집는 식이다. 하지만 이 성공 공식에 충실한 작품이 〈오징어 게임〉의 후광을 등에 업은 채 쏟아져 나오는데도 그 성적은 시원치 않다.
대표적 사례가 지난 5월 나온 〈더 에이트 쇼〉다. 이 드라마는 막대한 상금, 생존경쟁, 음산한 분위기 등 여러 코드를 〈오징어 게임〉과 공유한다. 연기력이 검증된 배우들을 기용했다. 그러나 올해 플릭스패트롤 TV쇼 부문 점수는 68위에 그쳤다(11월21일 기준). 인기도 국내에 편중됐다. 지난 9월 공개된 〈경성크리처〉 시즌2나 〈스위트홈〉 시즌3(2024),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2022) 등 거대 자본이 들어간 기대작 대다수가 비슷했다. ‘K드라마 현상’이 아직 유효하다기에는 절대적 인기가 부족하고, 시청률의 국가별 쏠림도 심하다.
‘넷플릭스풍’ 작품만 포화 상태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당연한 수순이다. 근본적으로 ‘제2의 〈오징어 게임〉’이라는 수식어가 그리 긍정적인 표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한국 드라마 판은 〈오징어 게임〉의 뒤를 이어 세계시장에서 히트하려는, ‘넷플릭스풍’ 작품만 포화 상태다. 정 평론가는 “‘좀비물이 뜬다’는 성공 방정식이 만들어졌다고 그것만 따라가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 과거 ‘신데렐라 스토리’가 유행을 타다가 금방 사그라든 역사를 생각해보면 된다. 지금 상황은 좋은 그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외신에도 비슷한 의견이 등장했다. 미국 대중문화 웹진 〈스크린 랜트〉는 지난 8월14일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 대체품이 〈오징어 게임〉만큼 성공적이지 못한 이유’라는 기사를 냈다. ‘비슷해서 신선하지 않다’는 게 기사 결론이다. 이 매체는 이렇게 썼다. “궁극적으로 제2의 〈오징어 게임〉이란 게 존재한다면, 그게 예측 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관객이 예측하지 못한 이야기였다는 사실이야말로 〈오징어 게임〉이란 마법의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제작사나 창작자가 ‘공식’에서 탈피하려고 마음먹으면 해결될까? 상황이 그리 간단치 않다. 어떤 한국 드라마를 세계에 내놓을지 최종 결정할 권한이 이제는 OTT에 있다. 팬데믹 이후 제작비가 급격히 올랐다. 넷플릭스 〈경성크리처〉나 디즈니플러스 〈삼식이 삼촌〉(2024) 같은 OTT 대작은 회당 제작비가 30억원, 40억원에 달한다. 팬데믹 이전 지상파 드라마의 제작비는 5억~6억원 선으로 알려져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OTT 외에 지상파 방송국은 대작 드라마 제작이 불가능하다”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 2022년 방송된 한국 드라마는 141편인데 2023년에는 123편, 올해는 107편으로 편수가 줄고 있다. 편수 감소는 작품의 다양성 감소와 맞물린다. 실험적인 작품이 채택되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의미다. 불똥은 주로 배우에게 튄다. 일각에서는 출연료 상한제를 법제화하거나 정부 차원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배우 출연료가 올라서 (이걸 감당 가능한) OTT가 떴다’는 설명은 앞뒤가 뒤바뀌었다. OTT가 스스로 의도에 따라, 제작비 전반을 올렸다.
한국 시장에 진출하면서 넷플릭스는 제작사들에게 ‘제작비 전액과 일부 이윤 지급’이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전까지 제작사는 방송사에서 받는 방영료와 광고 수익, 해외 판매 수익 등으로 제작비를 메웠다. 드라마 손익은 예상이 어려운 영역이었고, 계산기를 잘못 두드리면 업을 접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에 비해 ‘제작비가 얼마든 100% 보장’이라는 넷플릭스의 조건은 위험부담이 적고 기회는 열린 방식이었다. 이제 제작자는 ‘가성비’를 따지기보다 OTT의 ‘간택’을 받기 위해 가능한 한 최선의 배우와 작가를 모셔오는 편이 합리적이다. 배우, 작가 입장에서도 10배, 20배 출연료를 벌 기회가 있는데 굳이 OTT 이외의 작품을 선택할 이유가 없어졌다.
OTT 사정에 밝은 한 업계 관계자는 넷플릭스 영업 방식에 전략적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넷플릭스는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후발주자였다. A급 배우와 작가가 결합된 작품을 사면 실패할 위험이 줄어들고, 현지 구독자 유치에도 도움이 된다. 게다가 한국 인식과 달리 회당 100억원대가 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드라마와 견주면 퀄리티 대비 K드라마는 아직 (투자비가) 싸다. 〈오징어 게임〉만큼의 큰 히트를 치면 대박인 거고, 그게 안 돼도 같은 가격대 해외 드라마 이상의 쏠쏠한 성과를 거두는 작품이 꽤 있다.”
문제는 OTT 종속이다. 제작비를 올리면서 지상파와 종편이 경쟁에서 떠밀리자 넷플릭스는 조금씩 제 편에 유리한 조건을 제작사에 내밀기 시작했다. 제작비는 100% 지급하되, 2019년 15%가량이었던 제작사 몫 이윤을 현재 6~7%쯤까지 낮췄다. 이 비율은 점점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전직 드라마 PD인 노동렬 성신여대 교수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는 OTT가 제시하는 ‘좋은 조건’이 결국은 내수시장을 공멸로 이끌고 있다고 본다. 지난해 논문 ‘드라마 시장의 오징어 게임: 글로벌 OTT 생태계로 인한 인센티브 발생 체계의 변화를 중심으로’에서 노 교수는 이렇게 썼다. “글로벌 OTT가 견인하는 제작비 상승은 국내 사업자가 자력으로 드라마를 생산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다. (···) 제작비 부담이라는 경쟁에서 해방된 제작사는 이윤을 높이기 위해 제작비를 스스로 올리고, 그렇게 상승한 제작비를 감당하기 위해 다시 글로벌 OTT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함정에 빠졌다.”
창작 단체들은 넷플릭스에 저작권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 7월25일 한국방송작가협회,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 한국영화감독조합,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 한국독립PD협회는 ‘K콘텐츠 정당한 보상을 위한 창작자 연대(창작자연대)’를 출범시켰다. 창작자연대가 보기에 저작권은 ‘정당한 보상’액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이지만, 단순히 넷플릭스에 ‘지금보다 더 좋은 조건’을 요구하는 것 이상의 문화적 의미도 담는다. 정재홍 창작자연대 대표(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는 〈시사IN〉과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해외에서 각광 받는 콘텐츠가 나오려면 발상이 자유롭고 개성 있어야 한다. 한국적이고 기발한 작품이어야 한다. 넷플릭스가 시장을 장악하면 제작비를 빌미로 그들 입맛에 맞는 것만 요구하게 된다.”
‘제작비 100% 보장’이 만든 함정
기획, 캐스팅 단계에서 넷플릭스의 관여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업계에서는 넷플릭스가 ‘세계에서 잘 팔리는 K드라마’에 대한 판단을 이미 끝냈다고 본다. ‘스릴러·좀비 일변도’ 역시 국내 창작자들이 아니라 넷플릭스의 경영상 전략에 따른 선택이라는 뜻이다. 정재홍 대표는 “아주 작은 플랑크톤부터 큰 고래까지 자생하는 게 문화 생태계다. 넷플릭스는 제작비를 주면서 ‘야, 고래(만) 만들어 와’라고 한다. 이건 궁극적으로 방송 생태계 전반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넷플릭스가 기꺼이 저작권 협상 테이블에 앉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만약 국회가 저작권법을 고쳐서 저작권 보장을 의무화한다면 넷플릭스는 제작비를 지급하지 않거나 한국 시장 철수를 감행할 수도 있다. 이미 넷플릭스 의존도가 높아진 상황에서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노동렬 교수는 넷플릭스와 전면전을 감수하기보다는 방송사가 ‘제작비 다양화’를 꾀하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아직 OTT가 완전히 틀어쥐지는 못한 고연령층 시청자들을 상대로 완제품을 내놓으며 틈새의 내수시장이라도 회복하자는 것이다. “40대에서 60대까지가 방송사 최후의 보루다. 이들의 충성도를 더 높이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A급(배우와 작가)은 비싸다고 푸념만 할 게 아니라, (회당) 5억원짜리, 8억원짜리 드라마를 만들면 된다. 지금 현실에서는 ‘〈오징어 게임〉 같은 블록버스터를 못 만든다면 아무것도 안 만들겠다’는 태도야말로 관성이다.”
낙관론 아닌 낙관론도 있다. 정덕현 평론가는 이미 국내에서 어느 정도 ‘재편’의 기미가 보인다고 말했다. “OTT 드라마보다 콘텐츠 완성도 면에서 더 나은 드라마가 지상파, 종편에서 잇따라 나오고 있다. MBC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 그렇다. 시청자들도 한때 열광했던 ‘OTT식 자극적 콘텐츠’가 슬슬 지겨울 수 있다. 역사적으로 한국 콘텐츠가 원래 좀 극과 극을 오가며 정반합을 통해 성장해왔다.”
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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