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터전에서 나를 마주하고 내면을 채우는 시간
법천사지 국보 101호 지광국사탑… 화려한 조각-장식이 주는 웅장함
거돈사지 산자락 아래 포근한 빈 터… 흥법사지 상처를 어루만지는 고독함
차를 타고 길을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도로가 혼자만의 것처럼 느껴진다. 고요한 시골 풍경이 차창 밖으로 펼쳐지면 나만의 시간이 열린다. 가는 길에서부터 설렘을 안고 도착한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부론면의 법천사지유적전시관. 이곳에 국보 101호인 지광국사탑이 있다.
고요해야 들을 수 있다
고려시대 문종(재위 1046∼1083)은 국사를 지낸 원주 출신 해린(海麟, 984∼1070)이 법천사로 돌아와 입적하자 ‘지광(智光)’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과 탑비를 세우도록 명했다. 자그마치 15년이라는 세월이 걸려 고려 선종 2년(1085)에 승탑이 완성됐고 그 자체로 역사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2년 일본 오사카로 반출되는 등 10여 차례 옮겨지는 수난을 당했고 한국전쟁 중 폭격으로 산산조각이 나기도 했다. 2016년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재보존과학센터가 완전 해체해 대전으로 이송한 뒤 2020년까지 과학적 조사와 보존 처리를 진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해 고향인 원주로 돌아왔고 113년 만에 과학적 복원 과정을 거쳐 국보의 위용을 다시 드러냈다.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다
유적전시관을 나오면 법천사가 자리했던 터전이 넓게 펼쳐져 있다. 한때 활기찬 신앙의 중심지였으나 이제는 그 흔적만이 고요히 남아 있다. 이곳에는 지광국사탑과 한 쌍을 이루는 지광국사탑비(전체 높이 4.55m)가 기다리고 있다.
거북 모양 받침돌과 왕관 모양 머릿돌이 눈에 띄며 비석에는 지광국사의 행적이 기록돼 있다. 바람 소리와 함께 ‘진리가 샘물처럼 솟는다’는 말이 떠오른다. 법천사가 품고 있던 뜻이다. 텅 빈 공간이지만 ‘비어 있음’ 속에 새로운 진리가 채워질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원주에는 법천사지처럼 번창했던 시절을 뒤로 하고 폐사지(廢寺址)로 남아 있는 곳이 많다. 법천사지를 나와 시골길을 따라가다 보면 1000년 수령에 7m가 넘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눈에 띈다. 절집의 흥망성쇠를 묵묵히 지켜본 수문장이다.
저물어야 새벽을 맞이할 수 있다
이제 여행을 마무리할 시간, 마지막 장소로 이동했다. 부론면 흥호리의 흥원창(興元倉)이다. 일부러 해가 지기 시작하는 오후 5시쯤으로 맞춰 갔다. 노을 명소, 아름다운 일몰, 캠핑 명소, 자전거 타기 좋은 곳, 걷기 좋은 곳 등 수많은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과거 조선시대까지 지방의 각 고을에서 세금으로 징수한 곡식 등 세곡(稅穀)을 강변에 설치한 창고인 조창(漕倉)에 보관했다가 배를 통해 도읍지로 운송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지금은 커다란 배 모양의 조형물이 과거의 영광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2일 국가생태탐방로 조성사업의 준공도 앞두고 있어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함께 흥원창의 역사적인 가치를 더욱 잘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원주의 역사적 의미를 지닌 비밀스러운 명소에서 나를 마주했던 시간, 내가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 본질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얻어간다.
고은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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