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스러운 연애…그리고 찾아온 베를린 장벽 붕괴[책과 삶]
카이로스
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 유영미 옮김
한길사 | 440쪽 | 1만7000원
여자는 자신의 장례식에 와달라는 남자의 말에 간신히 응한다. 넉 달 뒤 여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대신 그를 처음 만났던 오래전 그날 함께 들었던 음악을 재생한다. 6개월 뒤 누군가 여자의 집에 커다란 종이 상자 두 개를 두고 간다. ‘속이기 위해 쓴 것’과 ‘진실이라 생각했던 것’, ‘말하지 않은 것’과 ‘말한 것’, ‘침묵에 붙여진 분노’와 ‘침묵에 붙여진 사랑’이 상자 속에 뒤섞여 있다. 여자 카타리나는 남자 한스를 만났던 19세로 돌아간다.
독일 통일 전 동베를린에서 태어난 예니 에르펜베크는 1999년 데뷔한 소설가다. 2021년작 <카이로스>가 올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하며 더욱 이름을 알렸다. 그는 <카이로스>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를 전후로 동베를린 여성과 남성의 6년간에 걸친 사랑을 들려준다.
세상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사랑은 아니다. 카타리나는 19세 미혼 여성, 한스는 53세 기혼 남성이기 때문이다. 둘은 1986년 7월11일 동베를린의 버스에서 우연히 만났다. 버스에서 내린 둘은 고가 아래 서서 폭우가 그치기를 기다렸고, 눈을 마주치고 미소 지었다. 헝가리 문화센터에 갔는데 문이 닫혔고, 남자가 커피를 한 잔 하자고 청했다. “그게 전부였다. 모든 것이 마치 정해진 것처럼 그렇게 되었다.”
남자는 말한다. “우리는 가끔만 볼 수 있어. 하지만 매번 첫 만남 같을 거야.” 여자는 깨닫는다. “삶은 이제 시작되었음을, 다른 모든 것은 그저 준비에 불과했음을.” 둘은 비밀스러운 연애를 이어간다. 그리고 위험해진다. 카타리나가 또래의 남자와 친해지자, 한스의 태도가 변하고 카타리나를 파멸 직전까지 몰아간다.
우울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동베를린의 풍경이 선명하게 펼쳐진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두 남녀의 사랑에 대한 중요한 배경이자 은유가 된다. 작가는 이 소설을 “지나간 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 사이의 과도기에 대한 이야기”이자 “사랑과, 사랑을 완전히 봉쇄된 시스템으로 만들려는 시도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장 서는데 장돌뱅이가 안 가느냐”…조기 대선 출마 공식화한 홍준표
- ‘계엄 특수’ 누리는 극우 유튜버들…‘슈퍼챗’ 주간 수입 1위 하기도
- “비겁한 당론은 안 따라”···김상욱·김예지·조경태·한지아, 헌법재판관 선출안 표결 참여
- 오세훈, 윤석열 탄핵·수사지연 “옳지 않다”…한덕수에 “당당하려면 헌법재판관 임명”
- [Q&A]“야당 경고용” “2시간짜리” “폭동 없었다” 해도···탄핵·처벌 가능하다
- [단독]김용현, 계엄 당일 여인형에 “정치인 체포, 경찰과 협조하라” 지시
- 혁신당 “한덕수 처, ‘무속 사랑’ 김건희와 유사”
- 병무청, ‘사회복무요원 부실 복무’ 의혹 송민호 경찰에 수사 의뢰
- ‘믿는 자’ 기훈, ‘의심하는’ 프론트맨의 정면대결…진짜 적은 누구인가 묻는 ‘오징어 게임
- 박주민 “어젯밤 한덕수와 통화···헌법재판관 임명, 고민하고 있다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