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환한 미소로 소외된 여성의 존엄성 회복에 헌신
[가신이의 발자취] ‘70년 한국 선교’ 문애현 요안나 수녀를 추모하며
미국 가톨릭 수녀로서 지난 70년 동안 한국에서 선교사로 살았던 문애현 요안나 수녀가 지난 29일 오전 11시3분(한국시각) 뉴욕 메리놀수녀회 본원 요양원에서 향년 94세로 선종했다.
1930년 1월16일 뉴욕주 시러큐스에서 난 고인은 1950년 9월6일 메리놀수녀회에 입회하여 1953년 3월7일 첫 서원을 함으로써 수녀의 삶을 시작했다. 그해 9월15일 동료 수녀 5명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2주 항해를 거쳐 10월1일 첫 소임지 부산에 도착했다. 당시 부산은 한국전쟁 직후라 피난민이 넘쳐났고 그가 일하는 메리놀병원에는 매일 아침 병원 문이 열리기도 전에 환자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그는 문 앞에 서 있는 환자들을 살펴보고 조금 더 위급한 사람에게 표를 나누어 주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문 앞의 수녀’라고 불렀고 그 별명대로 ‘문’씨 성이 되었다. 그는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산꼭대기까지 찾아가서 치료하고 음식도 전달하며 하느님 사랑의 전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1956년 두 번째 소임지 충청도 증평으로 가서 병원을 설립하여 환자 치료는 물론 모자보건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임산부 건강교육, 어머니 대상 영양교육, 아이들을 위한 예방접종을 했고 이동진료소를 운영했다. 1963년엔 강화도로 소임을 받아 ‘그리스도 왕 병원’에서 일하는 한편,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을 통해 노동현장에서 정의를 요구하는 노동자 문제에 대해 알게 되었다. 병원 근처 심도직물에서 여성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하자 가톨릭 교회가 노동자 권리를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일을 가까이에서 겪으며 여성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80년부터는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활동으로 한국사회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며 시국미사, 기도회, 양심수 석방을 위한 앰네스티 활동에 참여했다. 가톨릭교회의 사회참여 현장에 가면 어김없이 그의 모습을 보곤 했다.
1984년 10월 여자수도회장상연합이 이듬해 열릴 아시아∙오세아니아 수녀연합(AMOR) 회의를 준비하며 현장체험 장소로 방문한 용산역 성매매 집결지에서 그는 가톨릭 신자인 이옥정 현 막달레나 공동체 대표를 만났다. 당시 이 대표가 홀로 성매매 여성 돌봄 활동을 하는 고충을 토로하자 방문한 3명의 수녀 중 그가 함께 일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준비작업을 거쳐 1985년 7월22일 용산역 근처에 성매매 피해 여성들을 위한 쉼터 ‘막달레나의 집’을 열었고 이어 돌로레스 가이어 수녀가 합류했다. 의료지원, 탈성매매 여성들의 자활을 위한 기술교육, 아이들을 위한 글방을 운영했다. 특히 성매매 피해 여성들과 인근 가난한 이웃의 장례를 치러주곤 했는데, 어떤 때는 한 달에 여러 번 장례를 치르게 되자 매번 영정사진을 들고 오는 외국인 아줌마의 모습에 화장터 직원이 관을 같이 들어주며 “단골처럼 이렇게 자주 오시면 안 되는 데요”라는 말까지 했단다.
막달레나의 집은 협소하고 누추했지만 모두가 편하게 찾아오는 환대의 장소였고 가난한 살림에도 생일파티, 축일파티 등 다양한 이름으로 잔치를 벌여 음식을 해서 나누는 친교의 장소였다. 이옥정 대표는 자신과 두 분의 수녀 모두 놀기 좋아하고 먹기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점이 일치했고 바로 그 점이 ‘막달레나의 집’을 친교와 환대의 집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는 사람을 가리지 않아서 스스럼없이 성매매 피해 여성과 업소 주인들을 방문했는데, 때로는 재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한테 소금벼락을 맞기도 했으나 개의치 않고 방문하곤 해서 모두의 친한 이웃이 되었단다. 막달레나의 집은 김수환 추기경도 즐겨 방문하는 곳으로 유명했고, 그때 맺어진 인연들은 지속되고 있다.
그는 1986년 성매매 피해 여성 지원 단체들의 네트워크인 ‘한소리회’ 출범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 2004년 성매매방지법 입법에 초석을 다졌다. 또한 1992년 윤금이씨가 미군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나자 동두천 미군기지 앞 시위에 적극 참여했고 그 일을 계기로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출범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옥정 대표는 그가 ‘반미운동’ 참여로 인해 미국과 한국에서 입출국 때 거부당할까 봐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1999년 1월 김수환 추기경까지 참석한 칠순잔치 후 13년간의 막달레나의 집 활동을 뒤로 하고 창조영성을 공부하러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나로파 대학에 가서 2000년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80년대 말 여성신학을 한국 가톨릭교회 여성들에게 소개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60살이 되어 하느님 아버지뿐 아니라 하느님 어머니에게도 기도드릴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여성으로서 나를 해방시켰다. 나는 예수님이 여성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자세히 보게 되었고 성경과 예수님의 생애 안에서 성모님의 역할에 대해 재해석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여성들의 신심을 찬미했다.” 그는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 여성공동체’ 회원으로 2023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호주제 폐지 천주교연대 등을 비롯한 크고 작은 활동을 했다.
그는 지난 70년 한국에서 선교사로 살며 메리놀수녀회의 모토를 따라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을 구체적으로 삶 안에서 보여주었다. 의료 사목에서 여성노동자 사목으로, 정의평화 활동으로, 여성인권 활동으로, 여성신학과 생태영성으로 계속 관심과 활동의 지평이 넓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특히 소외된 여성의 존엄성 회복을 위해 헌신했던 삶을 기리며, 언제 어디서나 환한 미소로 사랑을 나누어 주었던 그를 기억할 것이다. 아울러 오는 7일 오후 3시 합정동 전진상센터에서 수녀님을 기리는 추도미사가 봉헌될 예정이다.
김선실 데레사/메리놀 아필리에이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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