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톡] R&D 카르텔은 가까이에 있었다

임소형 2024. 12. 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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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주변 한 과학자의 영향력
연구 현장 넘어 관가까지 미쳤나
어물쩍 넘기려 말고 책임 따져야
편집자주
과학 연구나 과학계 이슈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일들을 과학의 눈으로 분석하는 칼럼 ‘사이언스 톡’이 3주에 한 번씩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10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원자력안전위원회, 우주항공청 등에 대한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종합국정감사가 진행되고 있다. 뉴스1

A: “R&D(연구개발) 카르텔이 있나, 없나.” B: “뚜렷한 카르텔은 없다.” A: “옅은 형태의 카르텔은 있나.” B: “오랫동안 지적돼왔던 문제고, 일순간에 사라지진 않는다.”

올해 국정감사에서 있었던 질의응답이다. 얼마 전까지 과학기술계를 뒤흔들고 있던 이슈였는데, 시대착오적인 계엄 후폭풍 때문에 혹여 잊힐까 다시 꺼낸다. A는 야당 국회의원, B는 증인으로 출석한 대통령 직속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의 김창경 위원장이다. 증인이 위증을 하지 않았다면, R&D 카르텔이 엄연히, 여전히, 존재한다는 얘기다. 뚜렷하게 드러나지도 않는 ‘옅은’ 형태라면 더 심각하다. 한양대 교수직에서 최근 은퇴한 김 위원장을 야당 의원들은 그 옅은 카르텔의 중심으로 의심하고 있다.

의심의 발단은 김 위원장과 같은 위원회에서 활동 중인 김형숙 한양대 교수가 수백억 원 규모의 대형 연구사업을 따낸 데서 비롯됐다. 정서장애 예방 및 관리 플랫폼, 초거대 인공지능(AI) 기반 심리케어 서비스 기술을 개발하는 사업인데, 김 교수의 전공은 체육교육학이다. 물론 체육을 전공했다고 디지털이나 AI 연구를 못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그만 한 대규모의 국가 R&D를 총괄하기에 체육 전공자보다 더 적합한 경력을 쌓아온 과학자가 없을 리 만무하다.

김 교수가 대학, 그것도 공대에 채용되고, 누구나 납득할 만한 연구 실적도 없이 디지털 전문가로 활동하며 정부 관련 여러 타이틀을 얻게 된 경위를 둘러싸고 김 위원장과의 인연이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의혹이 과학기술계와 국회를 중심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김 교수는 국감에서 카르텔의 존재 여부를 묻는 야당 의원의 질의에 “(연구사업 선정은) 공고대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 모르는 행정 프로세스가 있다”고 답했다. 특혜나 카르텔의 존재를 인정한 답변이나 다름없다.

부친 간의 인연으로 대통령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왔다는 김 위원장이 과학기술계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소문과 제보는 이 외에도 파다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을 포함한 그의 대학 동문들이 줄줄이 정부 요직에 앉았고, 김 교수 연구사업을 지원했던 고위 공무원이 같은 대학 교수가 됐다. 과기정통부 장관은 이 모든 일이 “우연”이라고 국감에 나와 해명했지만, 우연이 쌓이고 정황 근거가 더해져 연구 현장에선 과학자와 과학 관료들 중 김 위원장 ‘라인’이 누구인지 헤아리고 있는 지경이 됐다.

그 라인을 타지 못한 과학자들은 올해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연구비 나눠먹는 카르텔을 타파하겠다고 무턱대고 R&D 예산을 깎아버린 여파는 연구 현장의 약자부터 덮쳤다. 실험실을 나오거나 학업을 중단할 처지에 몰린 청년들이 과학자의 꿈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공계 중·고등학생들은 점점 더 공대를 외면한 채 의대 입시에 매달린다. 카르텔 밖의 과학자들이 연구비가 줄고 제자를 내보내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을 때 김 교수 연구사업은 수십억 원 증액됐다. 그 사업 결과물인 군인 마음 건강 서비스는 어린이용 아니냐는 조롱을 듣고 있다.

인사 시즌을 앞두고 공무원들 사이에선 이 사업의 책임을 떠안게 될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감지된다. 내년 R&D 예산을 부랴부랴 도로 늘려놓은 것만으로 어물쩍 넘길 일이 아니다. 상식 선에서 봐도 석연치 않은 사업에 수백억 원을 쏟아부은 책임을 분명히 따지고, 부적절하게 쓰인 연구비가 있다면 환수해야 한다. ‘등잔 밑’에서 유독 자주 일어난 우연이 카르텔인지 아닌지도 명확히 밝혀야 한다.

임소형 미래기술탐사부장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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