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명의 '천재 반항아', 보수 문화의 심장 비엔나를 뒤집어 엎었다
'전통의 벽' 깨고 새로운 미술 일궈낸
클림트, 실레, 모저, 호프만, 게르스틀, 코코슈카
6인의 작품과 삶, 그 뒷이야기
19세기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은 세계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도시였다. 전 유럽을 600년간 호령해온 제국의 역사와 전통, 자부심이 모든 새로운 것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이런 농담이 돌 정도였다. “지구가 종말한다면 빈으로 가라. 무슨 일이든 50년 늦게 벌어지는 그곳에는, 종말도 뒤늦게 찾아올 테니.”
그랬던 빈은 20세기 초 갑작스레 유럽 미술의 최전선으로 변신한다.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등 전통을 현대의 자양분으로 삼아 매혹적인 미술을 만들어낸 빈 분리파 예술가들 덕분”(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다. 이 천재 작가들은 서울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탁월한 재능과 노력으로 예술의 새 장을 연 빈 분리파 대표 예술가 여섯 명의 삶과 업적을 정리했다.
① 구스타프 클림트
빈 분리파의 ‘분리’는 고리타분한 전통 미술에서 벗어나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겠다는 뜻이다. 그저 그런 2류 작가들이 이런 선언을 했다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빈 분리파를 결성한 주역들 중에서는 클림트(1862~1918)가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미술에서 두각을 드러내 황제에게 상과 훈장까지 받은, 당대 최고의 화가이자 슈퍼스타였다. 그런 클림트가 초대 회장으로 나서자 빈 분리파의 무게감이 확 올라갔다.
클림트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림 값이 집 한 채 값과 맞먹을 정도로 비쌌지만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섰다. 덕분에 그는 많은 돈을 벌었다. “대중의 입맛에 맞추는 작품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자신감도 이런 재정적 성공에서 나왔다. 인격적으로도 훌륭했다. 에곤 실레 등 후배 예술가들을 살뜰히 챙기며 살뜰히 ‘큰형님’ 역할을 했다. 여성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삶이 늘 장밋빛이었던건 아니다. 어린 시절엔 찢어지게 가난했고, 작가로서의 성공을 뒷받침해준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가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병으로 요절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화가로서 성공을 거둔 뒤에는 정신 질환을 앓는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평생 함께 살며 챙겼다. 진정으로 사랑했던 연인(에밀리 플뢰게)과 결혼을 원했지만 거절당하기도 했다. 그런 클림트에게 예술은 삶의 이유이자, 인생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도피처와도 같은 존재였다.
클림트를 상징하는 금박을 사용한 대형 작품은 전시장에 없다. 대신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그의 초기작들이 나와 있다. 클림트의 탁월한 기본기를 확인할 수 있는 ‘국립극장의 계단 벽화를 위한 습작’이 대표적이다. 소형 초상화들도 만날 수 있다. ‘혁신가 클림트’가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구도와 효과를 실험한 흔적이다.
② 콜로만 모저 & 요제프 호프만
거대한 저택 안에 걸려 있는 고상한 그림과 정원에 놓인 대리석 조각상. 19세기 중반까지 사람들이 ‘예술’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이미지는 이랬다. 그만큼 예술은 지체 높고 돈 많은 사람들의 전유물이었고, 가난한 사람들과는 상관 없는 얘기였다.
“예술이 왜 부자들만의 것이어야 하는가. 예술은 보편적인 선(善)이고,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빈 분리파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래서 이들은 ‘총체예술’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흔한 잔이나 그릇, 가구도 유화나 조각 못지 않은 훌륭한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게 빈 분리파 작가들의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빈 디자인 공방을 만든 두 예술가가 빈 분리파의 공동 창립자인 모저(1868~1918)와 호프만(1870~1956)이다.
빈 응용예술학교 교수 동료였던 모저와 호프만은 둘 다 총체예술을 추구했으나 스타일은 조금 달랐다. 모저가 장식적이고 회화적인 디자인을 선호했다면 호프만은 비교적 기하학적이고 단순한 디자인을 좋아했다. 세부적인 사상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모저는 더 많은 사람들이 총체예술을 즐기려면 ‘가성비’도 중요하다고 봤다. 반면 호프만과 다른 빈 디자인 공방의 예술가들은 ‘예술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결국 이런 의견 차이로 인해 모저는 1907년 공방을 떠나게 된다.
그 후 모저는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시장에서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인상주의와 일본 목판화 양식이 반영된 그의 회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반면 호프만의 디자인은 더욱 간결해지고 기능을 강조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모저는 1918년 암으로 숨을 거뒀고, 빈 디자인 공방은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경영난을 겪다가 1932년 해체됐다. 호프만은 1956년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언젠가는 사람들이 벽지, 가구, 그리고 생필품까지도 예술가에게 주문하는 날이 올 것이다”(호프만)는 이들의 예견은 오늘날 현실이 됐다. 1000원짜리 식기를 살 때조차 사람들은 디자인을 유심히 살핀다. 삶 속에 디자인과 예술이 자연스레 녹아든 것이다. 1900년 모저와 호프만이 비엔나에서 꿈꿨던 총체예술은 그 시작점이었다.
클림트가 댕긴 혁신의 불씨는 그 다음 세대에서 활활 타오른다. 자연이나 인물을 사실 그대로 그리지 않고 갈등과 고독, 고뇌 등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는 ‘표현주의’가 꽃피운 것이다. 그 주역은 리하르트 게르스틀, 오스카 코코슈카, 에곤 실레. 작품 속 뒤틀린 붓질만큼이나 이들은 과감한 사랑을 했고 강렬한 삶을 살았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 뒤에 숨겨진 세 천재 예술가의 이야기.
③ 리하르트 게르스틀
주변 사람들보다 너무 앞서나간다는 게 때로 일종의 저주가 될 때가 있다. 게르스틀의 삶이 그랬다. 그의 재능은 탁월했다. 스무 살이 채 되기 전 자신만의 표현주의적 화풍을 만들어낼 정도였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오스트리아의 다른 예술가들을 5~10년 앞선 것이다. 전시장에 나온 ‘반신 자화상’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의 작품은 동시대 미술계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앞서가다 못해 동료 예술가들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새로웠던 화풍, 빈 분리파를 만들어낸 혁신가 클림트조차 ‘꼰대’ 취급하며 무시했던 괴팍한 성격 탓이었다.
이런 그를 이해하고 아껴준 유일한 인물이 작곡가 쇤베르크다. 쇤베르크는 게르스틀을 친동생처럼 대하며 물질적·정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이 참석하는 식사나 사교 모임에 게르스틀을 자주 초대했고, 심지어 가족 휴가를 떠날 때도 게르스틀을 데려갔다.
하지만 게르스틀은 이런 쇤베르크의 아내(마틸데)와 불륜을 저지르며 은인의 뒤통수를 쳤다. 단순한 불장난이 아니어서 더 문제였다. 쇤베르크에게 불륜 관계가 발각되자 게르스틀은 마틸데에게 “새 출발을 하자”며 청혼했다. 하지만 마틸데는 쇤베르크의 간곡한 설득에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게르스틀은 ‘왕따’가 됐다.
사랑에 실패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면서 실의에 빠진 게르스틀은 자신의 작품을 대거 불태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순간 쇤베르크는 마틸데가 참석한 음악회에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몇 남지 않은 게르스틀의 작품에서 그의 천재성, 격렬하고 어두웠던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④ 오스카 코코슈카
코코슈카의 사랑도 게르스틀 못지 않게 강렬했다. 그는 희대의 ‘팜 파탈’로 불린 여성인 알마 말러를 사랑했다. 알마는 천재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를 비롯해 수많은 예술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마성의 여인이었다.
코코슈카가 일곱 살 연상의 알마를 만난 건 1912년, 스물 여섯 살 때였다. 코코슈카는 클림트가 “젊은 세대 화가 중 가장 위대한 재능을 갖고 있다”고 찬사를 보낼 정도로 촉망받는 화가였다. 두 사람은 보자마자 서로에게 끌렸다. 하지만 둘의 연애는 순탄치 않았다. 사교계의 중심이었던 알마는 수시로 바람을 피웠고, 코코슈카는 그런 알마에게 병적으로 집착했다. 알마는 훗날 회고했다. “코코슈카와 사랑했던 시간만큼 지옥과 천국을 여러 번 오간 적은 없었다.”
코코슈카는 알마와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알마는 코코슈카의 질투와 집착에 점차 질려 갔다. 그러던 중 알마가 코코슈카와의 아이를 낙태하는 일이 벌어졌다. 코코슈카는 사랑이 이뤄지지 못할 거란 사실을 직감하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됐다. 그가 갑자기 기병대에 입대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유다. 그 사이 알마는 예전에 만났던 남자친구, 모더니즘 건축·디자인의 산실인 독일 바우하우스의 초대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와 결혼해 버렸다.
전쟁에서 돌아와 그 사실을 알게 된 코코슈카의 광기가 폭발했다. 코코슈카는 알마를 본딴 인형을 주문제작한 뒤 함께 식당에 가고 오페라 공연을 관람했다. 이런 기행이 수 년간 이어졌다.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에서는 그의 독특한 정신 세계와 광기, 천재성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내면의 감정을 단번에 터뜨리는 듯한 색채와 뒤틀린 형상이 인상적이다.
⑤ 에곤 실레
“그림은 잘 몰라도 실레가 천재라는 사실은 알겠다.” 실레의 그림을 직접 본 이들 중에서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유독 많다. 그만큼 그의 화풍은 독창적이고, 척 봐도 ‘이건 실레의 그림’이라고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특징적이다. 그 매력은 실레의 질풍 같았던 삶에서 자라났다.
매독을 앓았던 아버지는 실레가 열다섯 살때 세상을 떠났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실레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다. 부모로부터 애정을 받지 못한 탓에 실레는 남들보다 더 격렬한 사춘기를 겪었다. 한편 실레는 10대 때 이미 대가 수준의 그림 실력을 갖춘 미술 천재였다. 그 탁월한 실력으로 실레는 자신의 불안한 내면과 성적 충동을 그대로 화폭에 옮겼다.
적나라한 묘사 때문에 그의 작품은 “그림이 아니라 외설”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 실레는 자신에게 솔직했고,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을 자신만의 색채와 선으로 그려냈다.
모델인 발리 노이칠과 동거하던 그는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이유로 연인을 버리고 중산층 집안의 딸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했다. 이 시기 독일과 스위스, 체코 등에서 연 전시회가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실레의 명성도 점차 높아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안정과 성공이 찾아오려는 찰나, 유럽에서 총 2000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스페인 독감이 빈을 덮쳤다. 그 희생자 중 하나가 실레였다.
불과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실레는 짧은 삶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남긴 이 말을 현실로 만들었다. “모든 아름답고 고귀한 자질은 내 안에 있다. 나는 썩어도 영원한 생명력을 남길 열매가 될 것이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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