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 총리 불신임에 마크롱 동반 퇴진 압박
지난 7월 조기 총선 패배 이후, 여소야대 상황에서도 정국 주도권을 잡으려 애써 온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또다시 궁지에 몰렸다. 마크롱이 임명한 미셸 바르니에 총리 내각이 극우 국민연합(RN)과 좌파 연합 등 야당의 불신임안에 직면, 해산이 유력한 가운데 마크롱 대통령 본인마저 야권의 퇴진 요구에 시달리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바르니에 총리의 후임 인선을 고민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3일 사우디아라비아를 국빈 방문 중인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 매체들에 “의회가 현 바르니에 내각을 불신임해도 나는 사임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앞서 제1야당 RN의 실질적 지도자 마린 르펜 원내대표와 좌파 연합 내 최대 정당인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의 장뤼크 멜랑숑 대표가 “총리가 불신임되면 (그를 임명한) 대통령도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일축한 것이다. 야권은 “총선 이후 야당의 여러 요구를 계속 무시하며 ‘독단적 정치’를 펼친 대통령이 지금의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에 대해 “야당의 주장은 모두 정치적 허구(politique-fiction)”라며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는 것은 프랑스 국민에게 두 번이나 선출된 덕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마지막 순간까지 내 모든 힘을 다해 (국민의) 신뢰를 지키고, 국가에 도움이 되겠다”고 강조했다. 자신이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은 아무 법적 근거가 없으며, 자신은 헌법상 보장된 대통령의 임기를 다하겠다는 뜻을 재확인한 셈이다.
마크롱이 야권에 정면 돌파 의지를 보인 가운데, 프랑스 하원은 4일(현지 시각) 오후 RN과 좌파 연합이 각각 발의한 총리 불신임안 처리에 나섰다. 이번 사태는 본래 내년도 예산안을 둘러싼 정부와 야당 간 첨예한 이견으로 시작됐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 10월 막대한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총 600억유로(약 90조원) 규모의 공공 지출 감축과 증세안을 내놨고, 곧바로 RN과 좌파 연합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바르니에 총리가 전력 소비세 인상 및 의약품 환급 축소 방침을 철회하는 등 야당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바르니에 총리는 결국 2일 프랑스 헌법 49조 3항에 근거한 정부 단독 입법권을 발동, 하원 표결 없이 새 예산안과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기로 했다. 그러자 RN과 좌파 연합은 다음 날 즉시 총리 불신임안을 냈다. 이는 지난해 3월 법적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상향하는 연금 개혁 법안이 통과될 때와 유사한 상황이다. 프랑스 정부는 이 법이 야당 반대로 하원을 통과 못 할 것으로 보이자 단독 입법을 선택했고, 야당은 엘리자베트 보른 당시 총리 불신임에 나섰다.
총리가 불신임돼 내각이 해산되면 하원 표결을 건너뛴 법안도 자동 폐기된다. 보른 총리는 지난해 우파 공화당이 정부·여당 편을 들면서 자리를 지켰지만, 이번 불신임안은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프랑스 하원 재적 의원 577명 중 마크롱의 앙상블 등 여권 의석은 213석(37%)에 불과하다. 반면 RN과 좌파 연합 등 야권은 350석에 육박해 절대다수다. 프랑스 매체들은 “이런 상황에서 예산안 갈등은 표면적인 것”이라며 “마크롱을 정치적 위기에 몰아넣으려는 의도가 더 크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RN과 좌파 연합은 지난 7월 조기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후 “총리 자리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프랑스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의 요소가 결합된 이원 집정부제 국가다. 총리가 행정부 수장 역할을 하며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주요 정책을 이끈다. 그러나 마크롱이 이를 거부하고 지난 9월 범여권 공화당 출신의 바르니에를 총리로 임명하자 RN과 좌파 연합은 “선거로 드러난 국민의 뜻을 무시했다”며 ‘마크롱 하야’를 주장해 왔다.
특히 르펜 RN 원내대표는 최근 유럽의회 예산 유용 혐의로 검찰에 기소돼 징역 5년을 구형받아 2027년 대선 출마에 빨간불이 켜진 상황이다. 이에 조기 대선을 노린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간 르피가로는 “바르니에가 르펜의 덫에 빠졌다는 해석도 있다”고 전했다. RN이 바르니에 총리에게 ‘우리 요구대로 예산안을 수정하면 통과에 협조하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말을 바꿨으며, 바르니에 총리가 이에 격분해 정부 단독 입법을 선택했지만 이는 처음부터 바르니에 총리를 물러나게 만들어 마크롱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계략이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헌법 49조 3항
정부가 긴급 상황에서 의회의 동의 없이 예산안 처리나 입법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정부가 이 조항을 근거로 단독 입법에 나서면 의회는 24시간 내에 총리(내각) 불신임안을 내 저지할 수 있다. 불신임안이 가결되면 내각은 모두 물러나며, 법안도 자동 폐기된다. 가결되지 않으면 법안은 그대로 채택된다. 1958년 프랑스 제5공화국 출범 후 100회 이상 발동됐으나 불신임안이 통과된 건 1962년 10월 조르주 퐁피두 총리 때 한 번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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