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올해의 英단어: ‘브랫’과 ‘드뮤어’의 두 얼굴

한은형 소설가 2024. 12. 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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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하경

좀 과장되게 말해서 이번 미국 대선은 ‘브랫(Brat)’의 패배라고도 할 수 있다. 올해 ‘브랫’이란 앨범으로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킨 영국 가수 찰리 XCX가 자신의 X(엑스·구 트위터) 계정에 ‘카멀라는 브랫하다(kamala IS brat)’를 올리고 나서 카멀라 해리스 대선 본부는 엑스 대문 사진을 네온그린 배경에 검은색 폰트로 바꿨다. 해당 앨범의 재킷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러고는 네온그린과 ‘브랫’이 들어간 밈의 폭발. 그렇게 ‘브랫그린’이라고도 불리는 이 네온그린이 카멀라를 상징하게 되었다. ‘브랫’이 카멀라를 대변하게 되었으므로 카멀라의 패배가 곧 ‘브랫’의 패배라는 말이다.

‘브랫’은 사전적으로는 ‘버릇없는 애새끼’라는 뜻이지만 찰리 XCX 신드롬으로 ‘자유롭고 거침없고 쿨한 여성’이라는 뜻이 추가되었다. ‘브랫’의 타이틀곡인 ‘360′ 뮤직비디오에는 ‘브랫’의 확장된 뜻이 나온다. 무언가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을 지녀야 하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핫해야 하며(무서울 정도로), 잘 알려진 존재여야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존재여야 한다. 바로 이게 ‘브랫’이다. “난 내가 만든 지각변동 그 자체(I’m tectonic, moves, I make ‘em)”라는 ‘360′의 가사는 브랫이라는 단어가 포괄하는 시대정신이다.

Z세대는 ‘세계의 중심인 나’를 노래하는 찰리 XCX에게 열광했고, 그들이 열광하는 그가 카멀라를 ‘브랫’이라고 승인하자 카멀라는 세상 힙한 이미지를 등에 업고 ‘브랫’ 그 자체가 되었던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꽂힌 이들은 자발적인 밈을 만들어 카멀라를 연호하기에 이르고, 이 현상을 어떻게 볼지 고민하던 35세 이상 전문가들은 ‘브랫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주제로 회의까지 여는데 ‘나도 브랫이 되고 싶음’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기사를 가디언지에서 보았다.

영국의 콜린스 사전은 이 ‘브랫’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미국의 온라인 사전 사이트 딕셔너리닷컴에서는 ‘브랫’이 올해의 단어 2위다. 해리스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딕셔너리닷컴에서도 올해의 단어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딕셔너리닷컴이 선정한 올해의 단어는 드뮤어(Demure)다. 흥미로운 점은, ‘얌전한, 단정한’ 등으로 번역되는 ‘드뮤어’가 ‘브랫’의 대척점에 있다는 것이다. ‘드뮤어’가 올해의 단어가 된 데에는 한 틱톡 크리에이터가 ‘직장에서 얌전하게 지내는 방법’이라는 영상에서 ‘매우 드뮤어하게’라고 한 게 결정적이었다. 전통적 여성상을 조롱한 것으로도 볼 수 있는 이 영상은 ‘드뮤어’라는 단어를 온라인상에서 1200% 증가하게 했고, ‘드뮤어룩’이라는 톤온톤(한 가지 톤) 패션을 유행하게 만든다.

그 말이 어떻게 갑자기 그리 핫해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잠들어 있던 단어가 누군가의 호명으로 되살아나 펄펄 뛰게 되는 현상은 무척 흥미롭다. 단어가 애초에 포함했던 뜻을 넘어서기도 하고, 단어에 담긴 부정적 뜻이 긍정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긍정이냐 부정이냐는 권위자 그룹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고 언중들의 무언의 합의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도 무척이나 놀랍다. 이를테면, 30년 전에 ‘여성적이다’라는 말은 칭찬이었겠지만 지금 ‘여성적이다’라는 말을 칭찬으로만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브랫’과 ‘드뮤어’도 마찬가지다. 두 단어의 갑작스러운 신분 상승에서 보는 것처럼 단어란 고정된 불변의 것이 아니라 시대 혹은 개인의 상황 맥락에 따라서도 다르게 느낄 수 있다. ‘브랫’의 진취성, 능동성, 자발성에서 시끄러움과 피로함을 느낄 수도 있다. ‘드뮤어’의 밋밋함, 수동성, 절제로부터는 안전함과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다. 어제는 ‘브랫’이 피곤했지만 오늘은 ‘브랫’으로 살 수도 있고, 어제는 ‘드뮤어’가 답답했더라도 오늘은 그렇게 살고 싶을 수도 있다. 더 유동적인 사람에게는 두 세계를 오가는 것도 가능하다. 출근할 때는 ‘드뮤어’로 했다가 퇴근하고 나서는 ‘브랫’으로 살 수도 있다. ‘드뮤어’가 통하는 자리에서는 ‘드뮤어’로, ‘브랫’해도 되는 자리에서는 ‘브랫’으로.

그러라고 권장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분열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게 복잡한 이 세속 사회에서의 생존법이라고 느끼고 있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 살아남는 법은 배와 함께 흔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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