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주의 이제는 국가유산] [16] 창덕궁 후원에 눈 내리는 날
첫눈 내린 날 창덕궁을 찾았다. 창덕궁 후원(後苑)으로 들어서니 단풍 든 숲을 품고 내리는 함박눈이 경이로웠다. ‘푸른 솔 변하여 백룡의 비늘이 되었구나’라는 숙종과 ‘하늘 가득 날리는 옥빛 용의 비늘’이라 한 정조, 두 임금이 창덕궁 후원에 남긴 어제(御製)에 감탄하며 설경을 천천히 음미했다.
우리 전통 정원을 즐기는 최고 정수를 ‘미음완보(微吟緩步)’라 한다. 찰나일지라도 나직이 읊조리며 천천히 후원을 거닐며 그렇게 온 마음으로 담고 싶었다. 사철 아름다운 곳이라지만 부용지는 물론이고 애련지와 관람지 전경도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롭게 자리한 창덕궁 후원은 대표적 한국 전통 정원이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어 금원(禁苑), 궁궐 북쪽에 있어 북원(北苑), 상원(上苑)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비밀의 정원이라는 비원(祕苑)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이 명칭은 고종실록에도 등장한 후원 관리 관청 이름이었다.
창덕궁 후원은 태종 시기 처음 조성되어 세조 대에 확장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인조 대에서 순조 대까지 옥류천, 주합루, 연경당 등이 추가로 조성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왕가의 안식처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이상향을 실현하고자 한 흔적이 켜켜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기도 하다.
눈 내린 날을 돌이켜보니 ‘폄우사(砭愚榭)’가 마음에 남았다. 효명세자가 자주 들러 책을 읽고 심신을 돌본 정자로 ‘어리석음에 돌침을 놓아 깨우치게 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폄우사에서 지은 정조의 시를 차운한 효명세자도 ‘중천에 날려대는 것은 새하얀 옥비늘’이라 겨울 눈을 표현했다.
눈 녹은 자리에 낙엽 쌓인 창덕궁 후원은 그새 다른 풍경이 되었다. 게다가 폭설 후 방문객 안전과 후원 정비를 위해 관람이 중지되었다. 창덕궁 후원은 당분간 금원이 된 셈이다. 그럼에도, 내 마음속 별천지는 언제나 그곳이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평안한 날에 눈이 내리면 다시 찾아 느릿느릿 거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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