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알수록 어려운 ‘띄어쓰기’…규정보다 소통이 먼저다[한성우의 말과 글의 풍경]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1988년 더 세밀하게 전면 개정
‘원칙’에 ‘다만’ ‘허용’ 더해져 복잡…학생들 시험 문제로 괴롭혀
적당히 띄어 써도 읽는 데 지장 없는 한글의 장점 최대한 살려야
아버지는 가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동시에 흥분할 지점을 지날 일도 없다. 서울에 시어머니들로만 구성된 합창단이 있을 리가 없고, 안동 사람들이 시체 육회를 먹을 거라고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를 몇십년째 우려먹고 있다. 여기에 ‘동시흥분기점, 서울시어머니합창단, 안동시체육회’가 더해진다. 모두 띄어쓰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을 잘못하면 어떤 혼란이 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란다. 그러나 사례들이 모두 엉터리다. 띄어쓰기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지만 상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잘못 띄어 읽어서 뜻을 혼동할 이유가 없다. 한글이 창제되고 난 후 400여년 동안 띄어쓰기 없이 잘 읽었고 최근까지도 띄어쓰기가 안 된 문자 메시지도 잘 끊어서 읽었다.
왜 우리는 띄어쓰기에 대해 어렵다고 생각하고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중국의 한자, 일본의 가나, 그리고 서양의 로마자를 쓰는 이들은 띄어쓰기에 대해 고민하는 일도 없고 불만도 별로 없는 듯하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고 자부하는 한글로 글을 쓸 때 왜 띄어쓰기가 중요하고, 막상 정확하게 띄어쓰려면 어려운 것일까? 이는 한글의 잘못도, 한국어의 잘못도 결코 아니다. 한글의 과학성 덕분에 띄어쓰기를 안 해도 되지만 하는 것이 더 좋다. 그런데 한국어의 특성상 띄어 쓸 단위를 결정하는 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래서 규정을 만들었는데 이왕 만들 거면 세세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 여기까지는 필연이다. 문제는 이에 대한 오해와 불만, 그리고 그 규정에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무시하는 이들에게 있다.
띄어쓰기가 필요한가?
글보다 말이 먼저이니 ‘띄어쓰기’보다 ‘끊어 읽기’가 먼저다. 사람들은 말을 할 때 호흡의 길이 때문에, 그리고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적당한 단위에 따라 끊어 읽는다. 그러나 그 길이가 제각각이고 엄격한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것도 아니니 끊어 읽기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나하나 끊어서 말하지 않더라도 듣는 사람이 적당히 끊어서 이해할 수 있으니 글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일정한 단위로 띄어 쓰지 않아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띄어 쓰는 것이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로마자로 기록된 라틴어도 그랬고, 한자로 기록된 한문, 가나로 기록된 일본어가 그렇다. 우리의 옛 책이나 편지를 보아도 띄어쓰기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문자는 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읽기 위한 것, 그래서 띄어 쓰면 읽기가 편하다. 라틴어에 익숙한 이들은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아도 글을 잘 읽을 수 있었지만 라틴어가 모국어가 아닌 아일랜드의 수도사들은 그것이 어려워 라틴어를 띄어 쓰기 시작했다. 그 효용이 알려지자 이 띄어쓰기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로마자를 쓰는 모든 언어에 적용되기 시작해 오늘날엔 당연시되고 있다. ‘Iloveyou’와 ‘I love you’를 비교해 보면 확실히 그렇다. 앞엣것은 어디에서 끊어 읽어야 할지 알기 어려우니 뜻을 파악하는 데 한참 걸리지만 뒤엣것은 보자마자 뜻이 들어온다. 확실히 띄어 쓰는 것이 좋다.
그러나 띄어쓰기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위의 영어와 같은 뜻의 중국어 문장 ‘我愛你’는 글자 하나하나가 독립된 뜻을 가지고 있으니 굳이 띄어 쓸 필요가 없다. 같은 뜻의 일본어 문장을 일본의 고유문자로 ‘わたしはあなたをあいしています’와 같이 쓰면 읽기 어렵지만 ‘私は貴方を愛しています’와 같이 한자를 섞어 쓰면 뜻을 나타내는 부분인 한자와 문장을 구성하기 위한 요소인 가나 표기가 적절히 섞여 있어 굳이 띄어 쓰지 않아도 읽는 데 큰 지장이 없다. 한자는 띄어 쓸 필요가 거의 없고 한자를 섞어 쓰는 일본어도 굳이 띄어 쓰지 않아도 된다. 결국 띄어쓰기는 당위가 아니라 필요에 의한 선택이다.
한글은 반드시 띄어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당신을사랑합니다’라고 써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잘 읽어낼 수 있다. 이는 ‘ㄴㅏㄴㅡㄴㄷㅏㅇㅅㅣㄴㅇㅡㄹㅅㅏㄹㅏㅇㅎㅏㅂㄴㅣㄷㅏ’와 같이 풀어쓰지 않고 음절 단위로 모아 쓰게 고안된 한글 덕분이다. 그래서 4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띄어 쓸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 임금을 가리킬 때는 그 앞을 비우기도 했으니 띄어쓰기를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닌 만큼 굳이 혹은 반드시 띄어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라 보는 편이 맞다. 한글을 풀어쓰면 로마자와 비슷해져 반드시 띄어 써야겠지만 음절 단위로 모아 쓴 한글은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또한 한글의 장점이기도 하니 그 장점을 살린 표기이기도 하다.
한글 띄어쓰기의 역사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한글 띄어쓰기의 장점이 확인되었다. 1870년대 말 스코틀랜드 출신의 목사 존 로스가 만주에서 의주 청년 이응찬에게 한국어를 배운 후 영어로 된 한국어 회화책을 만들게 된다. 한글 문장을 먼저 쓰고 줄을 바꾸어 로마자로 표기한 발음과 영어 대역어를 차례로 썼는데 영어 대역과 맞추다 보니 자연스럽게 띄어 쓰게 된다. 그런데 이리 써 놓으니 읽기가 더 수월해진다. 이후 한글로만 써서 누구나 쉽게 신문을 보고 내용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독립신문에 이 띄어쓰기가 적용된다. 띄어쓰기의 장점이 확인된 이상 신문과 잡지, 그리고 각종 출판물에서 띄어쓰기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러나 한국어의 띄어쓰기는 만만치 않다. ‘I love you’는 그저 단어 단위로 띄어 쓰면 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생각해 보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ㅂ니다’와 같이 단위를 끊을 수도 있다. 세세하게 나누면 이렇게 되는데 어떤 것은 붙이고 어떤 것은 띄어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도 이 정도 띄어쓰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잘하지만 ‘너는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야. 돌아서면 보고 싶고 눈 감으면 떠오를 테니까. 그때는 언제든 불러 줘, 바로 달려갈게’와 같은 문장들은 전문가들도 한참을 고민해야 할 문제가 수두룩하다. 글자 하나가 곧 단어인 중국어, 단어에 다른 요소가 덧붙는 일이 드문 영어 등과 달리 문장을 이루는 핵심 단어에 다른 요소가 수없이 달라붙는 한국어는 띄어쓰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띄어 쓰는 것이 좋지만 띄어 쓸 단위를 결정하기 어려워 저마다 띄어쓰기가 제각각이니 이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1933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이 제정되면서 띄어쓰기 규정이 포함된다. 그리고 1988년의 맞춤법 전면 개정 때에도 띄어쓰기 규정이 한층 더 세밀하게 정비된다. 띄어 쓰는 것이 좋은데 띄어쓰기 단위를 결정하기 어려우니 규정이 필요하다. 이왕 규정이 필요하다면 그 규정은 완벽해야 하고 치밀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원칙’에 ‘다만’이 끊임없이 붙는다. 현실이나 관용도 인정해야 하니 ‘허용’도 더해진다. 그 결과 알면 알수록 어렵게 느껴지는 띄어쓰기 규정이 정착되었다.
띄어쓰기에 대한 분노와 조롱, 그리고 악용
띄어쓰기와 관련된 ‘아버지가방’의 역사는 1896년의 영어 잡지 ‘Korean Repository’에 윤치호가 쓴 ‘Commas or Spacing’이란 제목의 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윤치호는 ‘장비가말을타고’를 예로 들어 띄어쓰기에 따라 ‘장비가 말을 타고’와 ‘장비 가말을(가마를) 타고’로 해석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애초부터 예시가 잘못되었다. 장팔사모(丈八蛇矛)를 움켜쥔 장비에게 어울리는 것은 당연히 가마가 아닌 말이다. 설사 가마를 탄다고 하더라도 ‘장비 가마를’이 아니라 ‘장비가 가마를’이어야 하니 띄어쓰기 때문에 이 문장을 오해할 이는 드물다. ‘아버지가방’ 역시 마찬가지여서 당연히 ‘아버지께서 방에’라고 써야 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아무리 약주를 과하게 드셔도 가방에 들어갈 일도, 아버지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가방도 없다.
‘동시흥분기점’, 그리고 ‘서울시어머니합창단’이나 ‘안동시체육회’에 담긴 조롱과 분노 역시 마찬가지다. 도로 표지판의 특성상 띄어쓰기를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누가 봐도 ‘동시흥 분기점’일 텐데 음란마귀의 꾐에 빠져 엉뚱하게 해석한다. 고유명사는 붙여 쓰는 것도 허용되니 이리 붙여서 써놓아도 ‘서울시 어머니 합창단’과 ‘안동시 체육회’로 읽어야 할 텐데 굳이 ‘시어머니와’ ‘시체 육회’를 끄집어내어 문제 삼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내면에는 띄어쓰기 규정의 어려움과 복잡함에 대한 분노가 깔려있다. ‘다만’으로 예외를 덧붙이고 ‘원칙’과 ‘허용’으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에 대한 불만도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띄어쓰기 규정이 최선이다. 한국어의 특성상 띄어쓰기 단위에 대한 생각이 저마다 다를 수 있어 규정을 만들었고 이왕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면 치밀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복잡다단해 보이는 현재의 규정이 되었다. 규정이 너무 빡빡하면 현실과 괴리될 수 있으니 꼭 필요한 예외와 허용 규정을 두었다. 띄어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띄어쓰기 규정을 만들다 보면 여기까지 올 수밖에 없다. 띄어쓰기 단위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어려운 고민은 연구자들이 여전히 하고 있지만 그 치열한 토론의 결과가 규정에 반영된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만족할 만한 규정을 만드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문제는 지독한 원칙주의자들과 띄어쓰기 규정의 궁벽한 곳에서 해괴한 문제를 들고나와 학생들을 괴롭히는 국어 선생들에게 있다. 띄어쓰기가 좀 틀리면 어떤가? 읽고 이해하는 데 지장이 없다면 되지 않는가? 문자 메시지는 다들 적당히 쓰고 찰떡같이 이해하지 않는가? ‘돌아보다’는 하나의 단위로 보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반드시 어느 한쪽으로 정해야 하는 것인가? ‘아는 척한다’와 ‘아는척한다’는 누구나 헷갈릴 수 있는데 이런 것을 시험 문제로 내서 학생들로 하여금 띄어쓰기에 대해 진저리를 치게 할 필요가 있을까?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소통이지 규정이나 시험 점수가 아니다.
띄어쓰기의 미래
띄어쓰기를 완벽하게 하는 것은 어려울지라도 띄어서 쓰는 것이 읽기에 편하므로 띄어쓰기가 사라질 가능성은 없다. 띄어쓰기에 대한 규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규정을 제정한다면 현재보다 더 나은 규정 혹은 더 많은 사람들이 만족할 규정이 만들어질 가능성도 희박하다. 결국 띄어쓰기는 필요하지만 완벽한 규정은 불가능하니 어느 지점에서든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방법은 여러 가지다. 규정에 따라 엄격하게 띄어쓰기를 하는 것과 규정을 폐기하고 쓰는 사람 마음대로 띄어 쓰도록 하는 것까지 포함해 그 사이의 모든 것이 방법이 될 수는 있다.
북한에서는 일찌감치 느슨한 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우리는 단어 단위로 ‘할 수 있다’와 같이 띄어 써야 하지만 북한에서는 의미 단위로 ‘할수있다’와 같이 붙여 쓰도록 하고 있다. 띄어 쓰는 규범에 익숙해져 있는 이들은 북한의 규정을 납득할 수 없겠지만 의미 단위로 적당히 읽고자 하는 이들의 눈에는 오히려 한눈에 뜻이 들어올 수 있어 좋아 보이기도 한다. ‘남이냐, 북이냐’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나 어느 쪽이 옳다고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 기준은 어느 쪽이 소통에 유리한가와 어느 쪽이 이해하기에 쉬운가에 있어야 한다. 띄어 쓰는 것이 좋지만 적당히 띄어 써도 읽는 데 큰 지장이 없는 한글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것도 방법이다.
아버지는 가방에 들어가지 않듯이 띄어쓰기 규정이 쓰레기통에 들어갈 일은 없어 보인다. 폐지나 개정을 두고 싸우기보다는 적당한 자리에 규정을 놓아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쓰면 된다. 띄어 쓰는 것이 좋지만 한글은 적당히 띄어 써도 된다. 고속도로에서 흥분할 일은 없으니 엉뚱하게 오해하지 않으면 된다. 시어머니와 안동 사람들을 끌어들여 이상한 사람들을 만들지 않으면 되고 띄어쓰기가 조금 잘못됐다고 초등학교도 안 나온 사람 취급을 하지 않으면 된다. 규정보다 소통이 먼저다. 일부러 ‘개떡’같이 글을 엉터리로 쓰는 이는 없으니 그 글을 ‘찰떡’같이 이해하려는 마음이 먼저다.
■필자 한성우
한국어의 방언과 말소리를 연구하는 국어학자이다. 삶 속의 말과 글을 쉽게 이해하고 깊게 생각하도록 돕는다.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로서 또 하나의 삶을 살고 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 박사까지 마쳤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어규범정비위원회 위원이며, 한국방언학회 수석부회장이다. 문화방송(MBC) 우리말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방언정담> <우리 음식의 언어> <노래의 언어> <문화어 수업>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 <꿈을 찍는 공방> <방언, 이 땅의 모든 말> 등의 책을 썼다.
한성우 국어학자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장 서는데 장돌뱅이가 안 가느냐”…조기 대선 출마 공식화한 홍준표
- ‘계엄 특수’ 누리는 극우 유튜버들…‘슈퍼챗’ 주간 수입 1위 하기도
- “비겁한 당론은 안 따라”···김상욱·김예지·조경태·한지아, 헌법재판관 선출안 표결 참여
- 오세훈, 윤석열 탄핵·수사지연 “옳지 않다”…한덕수에 “당당하려면 헌법재판관 임명”
- [Q&A]“야당 경고용” “2시간짜리” “폭동 없었다” 해도···탄핵·처벌 가능하다
- [단독]김용현, 계엄 당일 여인형에 “정치인 체포, 경찰과 협조하라” 지시
- 혁신당 “한덕수 처, ‘무속 사랑’ 김건희와 유사”
- 병무청, ‘사회복무요원 부실 복무’ 의혹 송민호 경찰에 수사 의뢰
- ‘믿는 자’ 기훈, ‘의심하는’ 프론트맨의 정면대결…진짜 적은 누구인가 묻는 ‘오징어 게임
- 박주민 “어젯밤 한덕수와 통화···헌법재판관 임명, 고민하고 있다고 했는데”